제10화
세정은 한쪽 눈을 실그러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꾸 예상치 못한 말을 툭툭, 주어 없이 내던진다.
“여진 언니가 기세정 씨를 사랑하면요.”
백여진을 결혼 고려 대상에서 지우게 만들던 호감 가득한 눈빛이 떠오른다.
“분명 여진 언니는 기세정 씨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곤란하게.”
여자는 곤란하다는 말을 힘주어 발음했다. 세정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래서 둘 다 아니라는 겁니다. 자격 조건 미달.”
“저는……!”
“입양아잖아.”
“…….”
“다른 조건이 다 돼도, 입양아잖아.”
네가 결코 극복할 수 없고, 결코 상쇄시킬 수 없는 본질이 그렇잖아.
“사생아 동생들 때문에 그러세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호연의 입으로 듣는 것은 조금 새삼스러웠다. 평상시에 직설적으로 들어본 바 없는 말이기도 했다. 누가 감히 세정에게 사생아 동생들 이야기를 꼬집어 꺼내겠나.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고작 2년짜리 결혼에도 혈통이 그렇게나 중요하신가요. 본인은 하자 덩어리면서.”
아아, 하자 덩어리.
여자가 발음하는 제 평판이나, 감상을 들을 때면 그저 웃겼다.
한참을 큭큭거리며 웃던 세정이 씻어낸 듯 표정을 지웠다. 순식간에 붙잡힌 손목을 돌려 호연의 손목을 아프게 잡았다. 뼈와 뼈가 맞닿아 세게 눌리는 감각에 호연이 소리 없는 고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내 손목이 놓였다. 고통이 빠르게 잠들고 호연은 눈앞으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압도됐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손을 허공에 들어 올린 채로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의 보폭은 넓고 여자의 보폭은 좁으므로 순식간에 간격이 확확, 줄어들었다.
호연은 등에 차가운 적벽돌이 닿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젖혔다. 반쯤 돌아간 턱을 세정의 손이 잡아 정면으로 고정했다. 벌레의 다리 같은 능소화 가지가 머리카락에 엉키고 뺨을 긁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미약한 조롱을 담고 있었다. 커다란 몸은 또 얼마나 위압적이고.
호연은 조금 겁이 나서, 얇은 능소화 줄기를 움켜잡았다.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잊었다.
“백호연 씨는 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낮은 음성이 오연하다.
세정은 과연 그럴까? 하듯이 턱을 쥐던 손을 떼어내고 뺨을 할퀴는 능소화 가지를 분질렀다. 뚜둑, 뚝, 목을 꺾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호연은 더 겁이 났다. 세정의 손이 언제라도 목을 움켜쥐고 두둑, 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호연은 바닥이 꺼지는 듯한 감각에 눈을 내리깔았다.
“이래도?”
이어지는 건 시험을 빙자한 장난에 불과하다.
세정은 떨고 있는 호연을 눈에 담았다. 날개가 찢어진 나비 같다. 아무리 날개를 퍼덕여도 날지 못하는, 도망가지 못하는.
세정의 손가락이 뺨에 닿을 때 호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했다. 허공에 남은 손이 갈피를 잃었다가 호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쭉 뻗은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호연이 고개를 내리며 불편하다는 티를 여실히 드러냈다. 세정은 픽, 웃으며 물었다.
“다정하게 굴었는데 왜 떨어요.”
“…….”
“한 번만 더 다정하면 울겠네.”
더 짙은 농도의 장난을 치고 싶었으나 이쯤 갈무리하기로 했다.
“백호연 씨는 나를 좀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 지금처럼.”
서늘하게 경고했다.
겁도 없이. 자꾸 기어오르려고 들잖아.
호연이 차마 신발을 챙기지 못한 탓에 신게 된 실내화와 그 앞에 교차로 놓인 세정의 단정한 구둣발.
“연락할게요. 기다리진 말고.”
세정은 말을 남기고서 오랜 시간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집으로 가죠.”
한마디에 바로 차가 움직였다.
기사는 흘긋, 제 상사의 시선을 백미러로 훔쳐보았다.
휘청휘청, 몇 걸음 걷지 못해 푹, 주저앉는 여자에게로 꽂혀 있었다.
* * *
과호흡 증상이었다. 끅, 끅, 넘어갈 것 같은 숨을 울음과 함께 삼켰다. 온몸에 힘이 빠져 거의 엎드린 것과 진배없는 상태로 바닥을 짚었다. 시야가 핑글핑글, 회전했다.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의 펌프질도. 눈물이 흘렀다. 이유를 모르는 울음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익숙한 공포만이 머리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이내 펑, 터진다. 생의 최악이던 나날, 아빠가 손찌검하던 그때 그 순간으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세정이 아빠를 닮았다는 말은 아니다. 세정이 행한 행동이 아빠의 행동에 비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그러나 조금의 공포만 유발이 되면 온몸이 말썽이었다. 학습된 공포는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고는 했다. 지금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호연이 누군가에게 공포를 주는 일이 일상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은 트리거 속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를 감수할 만큼이나 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고.
바닥을 긁는 손 옆으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괜찮다. 괜찮아. 영문 모를 위로를 연신 내뱉는다. 실제로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괜찮다고 속인다. 그렇게 십수 년을 살아왔다. 더 못 할 것도 없다.
호흡이 점차 본래의 빠르기로 돌아갔다. 급하게 오르내리던 어깨가 느려졌다. 눈을 몇 번이고 고쳐 뜨던 호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손끝이 온통 까져서 엉망이었다.
호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뒤늦은 욱신거림이, 급격한 피로가 몰아쳤다.
* * *
“호연아, 자?”
여진의 얇은 음성이 문틈을 파고들어 왔다. 늘 얕은 잠을 자는 호연이 신음을 앓으며 작게 뒤척였다.
누군가 온몸을 뜨거운 것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붙어버린 것 같은 눈꺼풀은 또 어떻고.
얼마나 잤을까.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불을 끄지 않고 잤던가. 호연은 두 눈을 찌푸리며 빛에 적응했다. 초점이 잡히지 않아 여러 번 끔뻑이다 벽면에 달린 시계를 읽었다. 아마 한 시간 남짓 잔 모양이었다.
사실 이쪽이 꿈인지, 저쪽이 꿈인지 정신이 몽연한 상태였다. 저쪽이 꿈이라면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꿨다.
민형과 헤어지던 그날로 돌아가서 결코 혼자 도망치지 않는. 작은 몸으로 아빠를 막아주던 민형의 두 손을 붙잡고 같이 도망치는 장면.
그러나 금방 알겠다. 저쪽이 꿈이고, 이쪽이 현실이다.
“호연아.”
대답하지 않으면 자는 것이라 여길 법도 한데. 연신 제 이름을 부르는 여진의 음성에 깨어났다. 잠긴 문고리도 쩔걱거리며 여러 번 돌아갔다.
호연이 몸을 세워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댄 채 뜨거운 한숨을 뱉었다.
아직 꿈의 여운이 남아 있어 좀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동시에 찾아온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내렸다.
묻지 못한 말들이 침처럼 혓바닥에 고였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민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세정과의 결혼에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세정과의 결혼을 이뤄내야만, 망해가는 엔마트가 살고 석훈이 살고 천사보육원이, 미국에서 투병 중이라던 민형이 산다.
호연은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호연아, 자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옷소매를 길게 끄집어내려 손가락을 최대한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 위에 곱게 개어 있는 담요가 보였다.
침대에서 내려와 기우뚱하는 시야를 무시하고 담요를 어깨에 둘러 목을 가렸다.
예고 없이 방문을 열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여진이 몇 걸음 딸려 들어왔다. 여진은 문고리에서 손을 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 호연아, 잤어?”
“응. 무슨 일 있어?”
“자는 줄 몰랐어, 미안.”
자는 줄 몰랐다기엔 꽤 오랜 시간 두드리지 않았나.
“나 들어가도 돼?”
실내화를 신은 여진의 발이 불쑥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호연은 몸을 비키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너무 피곤해서 더 자고 싶은데, 꼭 해야 할 말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아침에. 아침에.”
힘없이 두 번 반복해 강조한 호연이 문을 닫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여진은 얼른 문을 잡았다.
“혹시……!”
여진은 오늘따라 호연이 싸늘하리만치 무심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얼굴 근육만이 사용되는 듯한 느낌.
“기……세정 씨, 있잖아.”
침을 꼴깍, 삼켰다.
제 방으로 들어와서도 한참을 복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같던 세정이 떠올랐다. 의자에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건성인 것 같은 느낌.
묻는 말에 하나하나 섬세하게 대답해 주면서도 묘하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던 분위기.
“계단에 있는 그림, 백호연 씨가 그린 겁니까?”
이내 들어줄 만큼 들어줬다는 듯 물어오던 문장.
“너랑 하겠대?”
여진은 호연의 동공을 빤히 들여다봤다.
“결혼 말이야.”
호연은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물음에 속웃음을 지었다.
이제 외면할 수 없어진 배신감이 밀려왔다.
별로 같으니 나를 줘야겠고, 좋아 보이니 가져가려는 그 마음이…….
“응, 하시겠대.”
호연은 거짓말을 하며 이 결혼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무도 제 편이 아닌 집을 나가고 싶었다.
“아……. 그렇구나. 축하? 축하한다고 말해야 하나?”
여진은 잠시 잠깐, 호연보다 제가 나은 점을 나열하며 세정이 자신을 고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주 찰나의 순간,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 없던 호연의 처지가 부러웠다. 친딸이 아니라 양딸, 그리하여 팻감으로 쓰이는 게.
여진은 감정을 처음 느끼는 어린애처럼 어설프게 표정을 지으며 동공을 도르륵 굴렸다.
빼곡하게 차오르는 여러 가지 감정을 몇몇 개 읽어낸 호연은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여진이 왜? 하는 물음표를 얼굴에 띄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뭔데?”
“축하할 일은…… 누가 봐도 아니지 않나, 싶어서.”
“호연아, 미안해. 아빠가…….”
다 지겹고 피곤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참을 미안하다, 괜찮다. 주고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호연은 괜찮아 한 번으로 대화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더 이어질 수 없도록 방문을 닫았다. 그 틈으로 보이는 여진의 표정이 복합적이었다. 미안하기도, 멋쩍기도, 부럽기도 한.
호연은 불을 끄고 담요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다시 침대로 가 풀썩, 맥없이 드러누우며 몇 시간 뒤를 가늠했다.
석훈이 제가 1층으로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겠지.
사실 세정은 기약 없는 말을 하고 갔을 뿐인데.
결국, 내가 아니면 어떡하지. 내가 아니면…….
“몰라…….”
나도 이제 몰라.
호연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이대로 세상이 끝장났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다가 이불을 홱, 걷어 올리고 협탁을 더듬었다.
손에 핸드폰이 쥐어졌다. 쑥, 끌어내려서 잠금을 풀자 다음 학기의 시간표가 보였다.
아직은 평범한 미대생이었다. 아직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