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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9화 (9/98)

제9화

이리 짓궂게 굴 생각은 없었다. 시시껄렁한 행위도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호연은 타격감이 좋아서. 행하는 족족 반응하는 게 또 다른 짓을 해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네 탓이지.

“옷 좀 골라주세요.”

기어코 여자를 젖게 만들고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 보려는데 여자가 백 대표를 데려갔다.

봐. 재밌잖아, 상황이. 계속 재밌게 굴잖아.

뒷골이 당기는 느낌에 어깻죽지를 꾹꾹, 누르는 새 여진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제게 보였던 눈빛과는 성질부터가 다른 거였다. 명백한 호감, 내지는 음험한 어필. 결혼을 전제로 두고 가장 경계하는 것이자,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이와 같았다.

“저…….”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던 때였다.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음성에 세정이 말하라고 눈짓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여진이 가까스로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몇 살이세요?”

제 딸이 어떤 실언을 할지 몰라 긴장한 연실 앞에서 세정은 발씬, 웃었다.

“몇 살 같아 보이는데요?”

느슨한 대답에 여진은 전보다 자신감이 생긴 어투로 대답했다.

“저랑 동갑…….”

“몇 살?”

“스……물 여섯이요.”

“아기네.”

여진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정은 그 위로 파사삭, 얼굴이 굳던 호연을 덧씌웠다.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여진은 세정의 헤픈 웃음에 용기가 생겼다. 그만하라고 테이블 아래로 제 손을 꽉 쥐는 연실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식사 다하셨으면 2층 구경시켜 드릴까요?”

얘! 연실이 여진을 작게 다그쳤다. 그러나 방긋 올라간 여진의 광대는 쉽사리 내려올 것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눈이 반짝였다.

2층이라…….

세정은 다이닝룸으로 오는 길에 거쳤던 거실과 옅은 어둠이 깔려 있던 계단을 떠올렸다.

“그래요.”

* * *

세정은 문가에 기대어 서서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경영학 책과 심리학 책이 혼란스럽게 꽂혀 있고 어질렀던 것을 대충 치운 눈치로 침대 대각선에 삐져나온 것들이 보였다.

“지저분하죠……?”

어색하게 웃으며 묻는 여진의 말에 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지저분하긴 한데,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세정의 정신은 방문을 열고 나가 계단 위, 두 그림에 가 있었다.

복도에 걸려 있던 비슷한 듯 완전히 다른 두 그림. 호연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해했던가. 아마, 그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물을 많이 써 흐리고 옅은 색의 번진 듯한 수채화. 꼭 닮은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런데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있었다.

아주 훌륭한 작품을 봤을 때의 압도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은은한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저……. 낮게 저를 부르던 호연의 음성이 거푸 되감겼다. 마찬가지로 불쾌했다.

뒤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여진의 방을 나왔다. 다시 계단의 두 그림을 눈에 담았다. 사슴의 눈이 이쪽을 향하는 것 같다. 왜인지 도망치는 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슴의 눈망울과 똑 닮은 여자의 눈을 맞닥트리며,

떠올랐다.

피아노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는데, 그 눈을 보면 머릿속이 시끄럽다. 잊었던 음률이 날뛰는 것 같다.

아주 불편하고 좆같은 기분이었다.

세정은 왼손을 들어 펴보았다. 다시는 꼿꼿해질 리 없는 손가락의 발악을 보자, 헛웃음이 터졌다.

머저리 같은 새끼.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음으로 인지되지 않은 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건반의 감촉 같은 것도 잊은 지가 오래인데. 건반을 타건할 때의 압력도 더는 모르겠는데.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차라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본 시간 끝에 다시 백호연의 얼굴이 있다.

몸이 안 좋다면서.

대문 앞에는 기사가 차를 대기시켜놓은 채였다. 세정을 발견하자마자 내리려던 기사는 그가 손을 올려 저지하자 천천히 도로 앉았다.

세정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동그랗게 저를 올려다보던 두 눈은 계단을 내려와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알게 된 후부터 여자의 천연한 눈빛은 꽤 짜증이 일었다.

“왜.”

세정은 눈썹 사이를 모은 채로 시선을 떨구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매나 폴라 티로 가려진 고운 목선이나, 어렴풋한 빛으로 조명되는 붉은 생채기.

생채기.

최대한 가린 것 같은데 왜 부러 드러낸 것만 같을까.

“……그냥 저랑 결혼하시면 안 되나요.”

다분히 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간 흠칫, 뒤로 반걸음 물러나는 호연에게 세정은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호연은 너무나도 태연한 남자의 모습에 제가 물음을 내뱉지 않고 그만 속으로만 생각해 버렸나, 싶었다.

“기세정 씨.”

다시 소리 내어 제대로 발음한 것을 확인했다.

“네.”

세정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호연의 목선 윗부분으로 세정의 손가락이 스쳤다.

“왜요?”

“물감이 아니네.”

“네?”

그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이따금 물감이 살갗에 묻는 일도 있는 것 같기에.

엄지로 문지르는 감촉에 호연이 살짝 몸을 움츠렸다. 겨우 딱지가 앉은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면서 자그마한 핏방울들이 다시 맺혔다.

지문을 따라 번진 피를 비벼 보던 세정은 호연이 받쳐 입은 폴라 티의 네크라인을 걸어 잡고 조금 내렸다.

“좋은 분이라면서.”

세정이 낮게 혀를 찼다.

보이지 않던 부분은 더 엉망이었다. 작정하고 긁은 것도 같고, 조른 것도 같고. 가만 보니.

“얼굴도 부었네.”

세정은 호연의 뺨에 손등을 대어보았다. 찬바람을 오래 맞고 서 있었을 텐데 진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때려요?”

여자의 허접한 술수라는 것은 진작 알아차렸다. 다만, 당황하는 꼴이 제법 가련하고 그게 또 웃겨서. 불쾌한 감정 위로 어이없음이 더해졌다.

너는 좋은 분이라고 했지. 나는 불쌍하기라도 하라고 했고.

“네…….”

“안됐네.”

어디까지 거짓말을 할 속셈인지 궁금하다.

“길 좀 그만 막지.”

그러나 그뿐.

세정은 호연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애썼어요, 그리 말하는 것 같다. 호연은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는 세정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어차피 엔마트가 필요해서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차갑다. 잔뜩 내려간 온도가 얼마나 오랜 시간 얇은 원피스를 입은 채 서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려줬다.

세정은 붙잡힌 손목을 돌려보다가 고개를 내려 흐리게 웃었다. 호연은 눈을 홉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차피 엔마트가 필요한 거면 백호연 씨가 어쩔 건데.”

“…….”

“놓죠, 손.”

예상치 못한 행위에 흥미를 느꼈던 것도 아주 잠시였다.

세정은 호연이 힘주어 잡은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빠져나가는 손을 여자가 다시 붙잡았다.

세정은 똑똑하고 형형하게 시선을 박아 넣었다. 하……. 그러다가 도로 눈을 풀었다.

어떻게든 시선을 버티려는 두 눈이 울먹이는 것 같다. 곧이라도 울 것처럼 눈 아래가 젖어 그렁그렁하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애한테 성질을 바짝 세우는 저도 멀었다 싶었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말을 정리해서 알려줘야 하는지 나열했다. 너를 볼 때마다 내 굽은 손가락이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걸러낸다. 최대한 친절하게 내뱉었다.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사업적 파트너를 찾는 겁니다. 정신 해맑게 철없이 오기로만 똘똘 뭉쳐서 호승심에 날뛰는 애 말고.”

나름 곱게 자랐다고 했지. 제 말에 자존심이 다친 듯한 표정을 지었지. 이 정도면 답이 되었을까. 조금 더 친절하게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러면 진짜 어린 거고.

세정이 호연의 얼굴을 쑥, 훑어봤다. 말간 얼굴이 곧 젖을 것만 같았다. 본인 몸에 상처를 내고도 울지 않았을 거 같은 애가 울긴 왜 울어.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뜨끈하던 이마 위로 찬바람이 흐른다. 조금의 아량이 생긴다.

“알아들어요? 적어도 윈윈의 관계를 맺을 여자가 필요하단 겁니다. 오로지 내가 여자를 사는 것 같은, 기분 더러운 관계 말고.”

그러니까 내가 너랑 결혼하면,

“내가 당신을 이용하는 만큼.”

내 기분이,

“당신도 나를 이용하는 관계.”

더럽겠지.

호연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지금은 백 대표가 날 필요로 하는 거지, 백호연 씨가 날 필요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

“그러니까. 이딴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굴지 맙시다. 알겠어요?”

사이드 미러로 동향을 파악하는 기사가 보였다. 별 돼먹지 않은 말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세정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곧 간다는 말을 대신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손목을 눈짓했다. 놔라, 이제.

“……구질구질하게 잡으니까 잡히셨잖아요.”

긴 시간의 침묵 끝에 나온 말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잡힌 척해준 거고.”

“그러면…… 계속 잡힌 척 좀 해주세요.”

“눈치가 없어요?”

빈정거리는 말에 호연이 입 안에 고인 침을 몰아 삼켰다.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게끔 뜨거운 눈빛이었다. 그래도 눈은 피하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는 한계선과도 같았다.

“네, 저 없어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도대체 내가 뭘 도와주지?”

“쥐 죽은 듯이 살게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을게요.”

“하……. 나는 지금 뭘 요구하라고 말하잖아. 아무런 요구도 안 하는 건 필요가 없다고.”

“이 집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말을 하는 호연의 두 눈이 결연해서 세정은 말을 멈추었다. 공기의 흐름도 정지한 것 같았다. 세정은 무심코 호연의 집을 돌아봤다.

평범한 집이었다. 평범한 가족이었고. 화목한 편이었지, 아마.

그러나 그건 잠시 들여다보는 사람의 이야기고.

묘하게 균열이 나 있던 분위기를 되짚었다. 제 자식을 팔아 이득을 취하려는 부모의 전형. 계단을 내려올 적에 맞닥뜨린 불안한 기색. 죄인인 것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앉아 있던 여자.

그래서 그게 뭐.

“난 백호연 씨가 매력 없는데.”

왜인지 호연은 가슴이 찔린 듯 아팠다.

“여자로서도, 파트너로서도.”

“…….”

“백여진 씨는 나중에 엔마트를 이어받겠죠. 경영학을 전공했고 심리학을 배우고 있으니까. 곧 경영 수업도 받을 예정이잖아.”

“…….”

“그림을 그리는 백호연 씨와 다르죠.”

“…….”

“나는 백여진 씨와 주고받을 게 확실해요.”

“…….”

“그런데 백호연 씨는 뭘까.”

마주친 눈빛에 짜증이 묻어났다.

“왜 이렇게 까불지?”

물음이었으나 감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눈을 내리깔게 만드는 두려움이었다. 입술이 어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호연은 몇 번이고 숨을 참았다.

언 입술을 떼어내고 겨우 물었다.

“만약…… 사랑하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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