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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8화 (8/98)

제8화

계단을 내려오자 분주하게 거실을 서성거리는 석훈이 있었다. 온 신경이 계단에 쏠려 있었는지 금세 다가와 호연의 손목을 낚아채고 소파에 끌어 앉혔다. 맞은편에는 이미 연실이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손목을 많이 붙잡힌다. 가해진 악력에 절로 호연의 미간이 모였다.

언젠가는 제 손을 다이아며 금이고 세상 가장 귀한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그런 건 사고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급한가.

“기 상무는 만난 거야? 아까 여진이 방 구경한다고 같이 올라갔는데…….”

묻는 음성은 더 빠르다. 석훈은 불안한 듯 연신 계단을 흘끗거렸다. 연실이 과일을 깎아 올라가야겠다며 성화인 것을 석훈이 엄하게 눌러 앉혔다.

여진은 안 된다. 여진은 안 돼.

투명하게 보이는 감정을 읽으며 호연은 대답을 고민했다. 제 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석훈의 표정을 상상했다. 불유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감추었다.

“그랬나요. 못 뵀어요.”

“……못 봤어?”

“못 봤니?”

석훈과 연실의 표정이 동시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면 방에서 뭘 하는 거야…….”

“내가 올라가 본다니까요.”

“좀!”

“왜 화를 내요. 나도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이 상황이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늘 화목했던 가정이었다. 가부장적이지만 자식에게만큼은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석훈과 순종적이면서 집안의 일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연실,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태도로 부모를 존경하는 여진까지.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거리가 먼 것에 불과한가? 상극에 가깝다.

“얘, 호연아.”

거푸 말싸움으로 이어질 뻔한 대화는 한 번도 석훈에게 이겨본 적 없는 연실이 말을 돌림으로 어정쩡하게 맺어졌다.

“어떻게…… 좀 안 되니? 자꾸 이런 말 하는 것도 미안한데…….”

이번에는 석훈이 연실을 말리지 않았다. 무언으로 연실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다른 곳을 내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사보육원도…… 느이 오빠도…….”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좀 도와야지 않겠니.

호연은 사그라든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잊지 않았어요. 잘 알고 있어요.”

분명히 연실의 위치에서 제 목의 상처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물음은 하나도 없었다. 서글픈가? 서글펐다.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연실과 석훈이 저를 어떤 위치로 몰아넣었든 정말, 정말 제게는 은인이었다. 어찌 되었든 천사보육원을 십 년이 넘는 시간 후원하고 민형을 찾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해 주었으니까.

물론 부담스러워 이 가족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벅차도록 감사한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 미친 양가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제가 남자의 아내가 되는 일뿐이었다.

“알고 있어야지, 그래…….”

맥없이 허물어지는 연실의 어투를 들으며 호연은 가늠했다.

남자는 여진을 아내로 삼기 위해 무슨 짓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오로지 사업을 위한 결혼이다. 또한 엔마트가 아니더라도 제 딸을 팔아 그에게 도움을 줄 기업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르는데 무리한 시도는 하지 않겠지. 신체 접촉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방 안에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곧 내려오실 거예요.”

석훈은 호연이 웃으며 위로하는 것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땀이 흥건하게 밴 손을 맞잡아 비비며 간헐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연실도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과일 얘기를 웅얼거리다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두 사람 다 그다지 호연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한참을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이었다.

거푸 마른 낯짝을 쓸어내리던 석훈이 맥주라도 가지고 올 요량으로 몸을 세웠을 때였다.

“어이고!”

석훈이 돌연 감탄사를 내질렀다.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세정과 여진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네.”

호연은 세정의 어깨 너머 여진을 보았다. 볼의 붉음이 더 짙어진 것도 같고 어색하여 애써 웃는 것도 같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더욱더. 읽기를 포기한다.

“딸기라도 가지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싱싱한 걸 받아놔서.”

“괜찮습니다.”

예의상 이어지는 질문과 예의 바른 답변 속에 날카롭게 벼려졌던 분위기가 안정되어 갔다. 끝이 보였다.

호연은 세정을 기다리며 계획했던 대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간 대화할 방법을 궁리했다. 남자를 붙잡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그건 집 밖이 유일했다. 그래서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을 작정이었다.

존재감 없이 흐리게. 연하게 웃는 모습으로.

서서히 페이드아웃.

* * *

시간 낭비를 했다. 여진은 계약 결혼 상대로 심각한 하자, 즉 저를 향한 호감이 있다.

배웅을 나서겠다는 석훈을 물리고,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여진은 귀찮고.

세정이 담배를 피웠던 능소화 담벼락을 지나 대문을 넘었을 때였다.

“저…….”

백호연은 오늘도 번울한 얼굴이다.

사연 많은 얼굴.

그리하여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얼굴.

세정은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돌아보았다.

* * *

“근본이 있어야지 않겠니.”

세정의 부친이자 북두 그룹의 총괄 회장인 한규는 그를 불러다 아침 식사를 들며 말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두고도 입맛이 뚝 떨어지게 하는 재능을 가졌다. 훌륭하시지.

근본이라…….

근본도 없는 사생아들한테 한 자리씩 턱턱 내어주는 분치고 꽤 순혈주의자인 척 구시네.

세정은 맞은편에 앉은 은선을 쳐다보았다. 대화를 엿듣기 위해 동공을 이리저리 굴려 상황 파악을 하던 은선이 딱,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생의 흔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한규와 반대로 그는 여전히 이 집에 들어올 적 그대로인 것 같다. 어쩌면 고생은 그가 더했을진대.

“일단 많이 들어. ……당신도.”

한규의 말에 은선이 억지로 빙긋, 웃었다.

늙다 보면 저리 부끄럼도 없이 살아지나. 여전히 내연녀 상태인 은선을 제 앞에 두고 담담히 밥이 들어가시나.

하기야, 신정 물산의 양소희 아래에서 저와 기소라를 보고, 부하 직원이자 내연녀인 오은선 아래에서 기휘영, 기사윤을 보아서 한집에 살게 하려 하지 않았나.

이후 같은 나라에서 유학을 한 세 사람은 친해졌을는지 몰라도 세정은 아니었다.

모친이 죽자마자 아이들을 몰고 들어오는 은선의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세정은 맑은 소고깃국을 삼키고 피식, 웃었다.

“지연우는 어땠니.”

한규는 세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받아보았다. 그 사실을 세정도 알았으나 별 불편함 없이 살았다.

한규는 언젠가 적수가 될 세정을 경계하는 마음이었고 세정은 언젠가 한규가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벼락 같은 마음이었다.

“아니다. 겹사돈은 예가 아니니, 삼가도록 해라.”

겹사돈은 무슨.

소라가 청재와 약혼 관계에서 돌연 사고사한 지 무려 구 년이 흘렀다. 결혼으로 이어진 적 없으니 생판 남이다. 그런데 무슨 겹사돈.

세정은 빼앗은 청재를 돌려달라던 연우의 말을 떠올렸다. 청재가 자발적으로 걸어온 것도 그리 해석하는 집안인데 그의 부친, 영민이 들으면 길길이 날뛸 발언인 것은 확실했다.

“북두 그룹 알기를 우습게 알아. 친딸도 아니고……. 뭐?”

화제가 넘어갔다. 다음은 엔마트의 백호연이다.

“본을 세우려면 입양아는 아니지.”

백호연의 언니 이름이 뭐라더라.

연신 근본을 운운하는 한규의 말을 흘려들었다. 치매가 들었나. 평생을 걸고 내연녀가 된 은선의 앞에서 할 소리도 아니고, 그 모습을 꼬박 다 지켜본 세정의 앞에서 할 소리도 아니었다.

“고원 건설 둘째도 괜찮겠더구나. 오늘로 날짜 맞춰놨다.”

누구 맘대로.

“세정이 네가, 고깃국을 참 좋아하지.”

침묵은 긍정인 법이다. 한규는 웃었다.

늘 그렇듯 제 기대를 반한 적 없는 기특한 아들놈. 언젠가는 기꺼이 치라고 제 목을 내밀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자식 놈. 이 반반한 얼굴과 늘씬한 몸뚱어리도 저를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놈.

한규는 사용인에게 국을 더 퍼주라고 말했다.

세정은 넘칠 듯이 가득 담긴 국에 가라앉은 고깃덩이들을 보았다.

심사가 뒤틀리는 기이한 아침이었다.

* * *

부친의 말을 어기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기분일까. 어떤 기분이었나.

고원 건설의 둘째 딸이 한식 파인 다이닝, ‘기연’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일방적인 맞선 결렬을 통보했으나 일 때문이라면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해왔으니 오지 않을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규의 말을 어긴 셈이 된다.

이제 어떤 기분이지.

상념에 잠긴 세정이 습관적으로 손가락 관절을 꾹꾹 눌렀다. 정오 즈음에 비가 온 탓에 손가락이 올곧게 펴지지 않았다.

완전히 으스러졌던 뼈는 감각을 되찾기까지도 오래 걸렸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따금 종이에 베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러나 이런 사려 깊은 말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괜찮습니다.”

세정은 주먹을 쥐었다. 바람 한 점 제대로 쥘 수 없는 손이 동그랗게 비었다.

기분 되게 더럽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아주 골초 같은 건 아니고 이따금 생각이 나면 피우는 정도인데, 참을 수가 없는 게 문제지. 남의 집 마당에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참을성을 상실한 자신이 웃겼다.

능소화인가.

지금은 꽃이 없는 잔 줄기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러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볼이 움푹 파이도록 깊이 빨았다. 복잡하던 생각이 입 밖으로 뿌옇게 토해진다.

멍해진다. 한시도 쉬지 않던 머릿속이 멍청하게 멈춘다. 그를 극렬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지되어 몽롱한 상태가 좋았다.

한 모금을 더 빨았다. 쿵쿵, 대문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귓가로 넘어왔다. 잔디를 밟는 것 같지도 않은 가벼운 발걸음이 눈 끝으로 진입했다. 호연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대놓고 저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어깨를 다 드러내는 옅은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이내 세정에게 고개를 숙였다. 세정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여전히 나비 같은 자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얇은 허리.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은 매끈한 목선. 그 위로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볼을 보면 흐린 웃음만 나온다.

후, 세정은 담배 연기를 뱉었다.

한규가 추천하는 고원 건설의 둘째를 바람맞히고 이곳에 와 있다. 제겐 한규의 사람이 될 고원 건설이 아니라 북두 전자로의 계단이 될 엔마트가 필요해서. 그것만으로 한규의 명령은 충분히 어겼다.

고원 건설은 한규의 사람이라 싫고. 지연우는 겹사돈이라, 백호연은 양딸이라 안 되면……. 백여진.

백여진이면 된다는 생각 하나로.

“…….”

“…….”

인사를 했으면 갈 것이지. 호연은 가지도 않고 빤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들어가라. 부러 담배를 한 번 더 보란 듯이 빨았다. 담배 연기를 후, 뱉어내는 동안에도 여자는 발이 붙은 듯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총총거리며 따라오다가 이내 뛰어오면서도 걸음을 늦춰 달라 부탁하지 않는 호연이 웃겼다. 알면서도 걷는 속도를 유지했다.

유치한 짓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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