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호연이 고개를 돌려 세정을 쳐다보았다. 그보다 늦되게 시선이 떨어졌다. 왜, 라고 묻듯 무심하게 눈짓하는 남자는 이제야 제게 관심을 주는 듯 보였다.
술잔을 들어 입에 맞추고 느리게 삼키는 모든 순간에도 세정의 시선은 호연에게로 향했다.
왜 쳐다봐.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슬쩍 내리깔렸다가 올라오는 검은자위가 저를 술잔 속에 담그는 듯해서…….
손끝과 발끝이 간지러웠다. 그러고도 여전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에요, 살짝 고개를 저은 호연이 턱을 당겨 넣고 동공을 굴렸다.
통창으로 이루어진 다이닝룸의 정면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 허리가 반쯤 꺾인 소나무는 양쪽으로 가지를 늘어트린 채 때로는 태양을 받치고, 달을 받치는 모양새이며, 능소화가 흐드러진 여름에는 초록과 붉음으로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겨울의 초입에서는 통창으로 사람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는데,
……여진이었다. 제가 아니라 남자에게로 흐르는 저릿한 기류의 눈초리가 있었다.
제게로 닿는 시선을 단박에 느꼈다면 여진의 노골적인 시선도 모를 리는 없을 터.
남자에게서 피식, 웃고 마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보는 여진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싸한 예감이 스쳤다.
이래도 되는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쇄였다. 갑자기 목이 버석하게 말랐다. 테이블을 더듬거려 물컵을 쥐었다. 입에 가져다 대고 마시려는데…….
“흘려.”
물이 턱을 따라 주룩 흘렀다. 그 아래를 큰 손이 받치자, 물이 고였다. 내 입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혀를, 입술을 스친 더러운 물이…….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지는 착각이 든다. 아니, 착각도 아닐 것이다. 다이닝룸을 구성하는 인원 모두, 남자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 작은 움직임 하나도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으니까.
쯧, 혀를 찬 세정이 사용인을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석훈이 사용인에게서 냅킨을 건네받아 테이블을 다 덮을 정도로 상체를 굽혔다.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대꾸한 세정은 제 손이 아니라 호연의 입술께를 먼저 더듬었다.
얇은 천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는 담배 냄새가 없다. 이 또한 특별한 감정이 실린 행위가 아님을 깨닫는다.
호연은 여진을 보았다. 놀란 기색으로 세정의 다정한 모습을 훔쳐보는 눈초리에 섞인 감정이 뻔했다.
아, 이럴 작정이었구나.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백여진이구나.
여진의 시선을 선명하게 느끼면서도 모른 척한 것은, 내 행동에만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여진을 위함. 그렇구나.
호연은 제가 실수한 일조차 세정이 계획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꼭 짜 맞춰진 극본 속에서 정해진 지문대로 행동하는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젖었네.”
제 손을 문질러 닦은 세정이 호연의 다리 사이를 눈짓했다.
일어나라는 뜻이겠지.
“괜찮습니다.”
사양했다.
당황한 기색도 없는 남자주인공은 조연을, 석훈을 바라봤다.
“호연아, 갈아입고 와.”
오랜 조연 생활에 익숙한 석훈은 지문을 까먹은 듯 움직이지 않는 신인 배우를 타이르고 결국은 따르게 한다.
“어서.”
호연은 점점이 번진 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제가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그 꼴을 보던 세정이 웃었다. 호연은 두 주먹을 말아 쥐고 석훈을 향해 말했다.
“옷 좀 골라주세요.”
애도 아니고.
남자의 말이 들린 것 같았다.
* * *
제가 없는 자리에서 세정과 여진이 결혼 얘기를 나누게 되겠지. 그럴 바에야 석훈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일체 차단하는 것이 나았다.
순식간에 내린 선택이었다.
기실 제가 아니라 여진에게로 넘어가면 더 좋을 결혼이었다. 여진은 남자에게 호감도 있어 보이고, 남자 또한 여진이라면 괜찮은 듯 보였으니까.
석훈만, 여진은 안 된다고 하던 석훈만 끝내 고집을 굽히면 될 일인데……. 애초에 석훈이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남자의 제안을 고심하고 몇 번이고 되짚어볼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 왜 싫지.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불쾌함은 무엇인지.
호연은 옷장에서 옷들을 꺼내어 침대 위로 내던졌다.
머릿속으로는 연신 이러지 않아도 될 일이다, 자위해도 계속 짜증이 일었다. 남자가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 다음부터 언제고 불붙을 감정을 지닌 듯했다.
찰랑거리는 감정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침대 귀서리에 앉은 호연이 구겨진 채 놓인 원피스들을 매만졌다. 사실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마를 물 자국인데. 지금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갈아입으라고 했으니까, 갈아입기는 해야겠지.
호연은 무늬가 적어 단정해 보이는 원피스들을 주로 추렸다. 다시 옷장으로 원피스들을 집어넣는 동안 갑자기 또 북받치는 분노를 참아야만 했다.
시간이 돈인 남자가 짬을 내어 찾아온 이유는 우스운 장난질 때문이 아닐 거다. 엔마트가 남자에게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렇겠지.
옷장 문을 닫았다.
화장대로 걸어가 원피스에 맞추어 스타일링 했던 목걸이와 귀걸이를 빼내었다. 밋밋한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심호흡을 했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추고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파헤쳤다.
사실은 이 부담스럽게 과분한 가족에게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한다.
거울을 등지고 방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다소 취기가 오른 석훈이 있었다.
“아저씨.”
“…….”
“저 좀 때려주세요.”
그런 말을 했었지.
“팔려 오는 주제에 불쌍하기라도 하든가.”
“호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때려달라니…….”
석훈은 술이 다 깬 듯한 얼굴로,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분이 저랑 결혼하기 싫으시대요.”
“……아니, 오늘 저녁 식사도 기 상무가, 호연아.”
황당한 빛이 어렸다.
“엔마트가 필요하시긴 한가 봐요. 근데 제가 아니라, 여진 언니를 원하세요.”
석훈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세정의 뒷배를 미친 듯이 원하면서도 여진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이 뒤엉킨 거였다.
호연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꺼낸 말이다. 깊은 마음속에서는 진실로 여진과 호연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또렷하게 내보이면서 행한 일이다.
리스크가 있었다면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여진? 이건 아니지.
“그게 무슨.”
호연은 용납할 수 없다는 석훈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어그러지는 듯했다. 강요에 가까운 맞선자리를 제게 들이밀 때도 이렇게나 처참한 눈을 했었나? 미안해하는 기색에 어쩔 수 없음을 진하게 강조하기만 했잖아.
애써 시선을 멀거니 두었다.
“……저는 보육원 출신의 양딸에 그분에 비하면 한참 어린 애니까.”
“…….”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그분께는 득 되는 다른 혼사들도 많겠죠. 널렸을 거예요.”
“…….”
“기세정 씨가 저더러 불쌍하기라도 하래요. 그러면…… 이런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아랫입술에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세게 씹는다.
“그러니까.”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때려주세요.”
* * *
망설이는 석훈의 앞에서 호연은 스스로 목을 그었다. 짧은 손톱에 긁힌 하얀 목선으로 불그죽죽한 길이 나고 군데군데 뜯어진 살에서 피가 붉게 솟아 올라왔다.
호연은 몇 번이나 더 목을 긁었다. 뺨을 후려치고 머리를 잡아당겼다. 두피가 모두 일어나는 고통이 선득했다. 드러난 살결이 얼얼하고 손톱이 들린 듯하여 통증이 일었다.
시시각각 질려가는 석훈의 얼굴을 보면서 호연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늘 저를 예술인으로 대해오던 석훈이었다.
그 앞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일이, 그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석훈을 보는 일이, 차라리 통쾌했다.
손톱 사이로 보이는 살덩이가 새빨갰다. 호연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살덩이가, 피가 단숨에 씻겨나갔다.
잔뜩 예민한 손바닥의 감각을 온수가 데워 간지럽게 만들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살가죽 아래 흐르는 피가 탄산 기포처럼 엉겨 붙는 듯 근지러웠다.
“아…….”
그러면서도 얼얼해서 잠시간 관절 하나 꼼짝할 수 없이 정지했다. 쏴―머리를 비우는 소나기 같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다보이는 거울 속의 사람이 낯설었다.
말갛던 호연의 살갗이 온통 자극적으로 붉었다. 갈아입은 원피스 아래 받쳐 입은 폴라 티로 어느 정도 가린 것으로 보이지만, 감출 수는 없었다.
구태여 숨기려고 들지도 않으므로 살짝만 움직여도 훤히 보였다. 호연은 젖은 손끝으로 그 붉음을 더듬었다.
따끔했다.
이에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박쟁이 부친 아래서 민형과 사정없이 두들겨 맞던 그 날이 떠올랐다.
자신을 상처 내면서 쾌감을 느끼다니……. 결국은 이런 순간에 그 망할 폭행범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언제쯤 잊을 수 있나. 그 괴물 같은 인간은.
호연은 수전을 올려 물을 잠그고서도 한참이나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부친을 생각하면 늘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어 꼼짝할 수도 없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헤어나기까지는 또 한참이 걸리는 일이므로 최대한 잠식되지 않으려고 했다.
정신 차리자. 제발.
호연은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하는 정신을 붙들어 다시 끌고 왔다. 거울을 보며 정신 차리자고, 그 인간을 다시 볼 일은 없다고 무섭게 타일렀다.
한발 한발, 뒤로 걸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었다. 붉은 자국이 시야에 커다랗게 보이지 않자, 그나마 그럴듯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차분히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
“…….”
다 오르지 않은 계단. 봄의 정취를 정반대의 색감으로 담아낸 그림과 그림 사이 여백.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등을 대고 선 남자.
분명 석훈과 비슷하게 마셨을 텐데도 전혀 취기가 오르지 않은 마른 얼굴. 단정한 옷. 흐트러짐 없이 빼곡하게 자아내는 짙은 분위기.
지루하다는 듯 멀거니 바닥을 응시하던 시선이 올라오는 동안 호연은 표정을 가꾸었다.
“……왜 거기 계세요?”
분명 상처 낸 곳은 목의 겉가죽인데 속가죽이 긁힌 것처럼 발음할 때마다 따가웠다.
호연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씹는 것으로 고통을 상쇄시켰다.
그를 빤히 보던 세정이 대답하려 할 때였다. 맞물린 문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연신 귀 뒤로 꽂는 여진이 있었다.
상황만으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세정은 호연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여진도 호연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폈다.
멋쩍음과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혼재된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문틀을 잡은 여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세정은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올라왔다. 보통의 속도로 오르는 것일진대 어쩐지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방 안으로 들여보내면 끝장이 날 것만 같은 예감.
“저…….”
주춤거리며 작게 부르는 호연의 말씨를 들었을 텐데도 세정은 피식,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로써 세정의 걸음을 저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환하게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여진이 있었다. 두 사람이 서서히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막이 내려온 연극 무대 위 덩그러니 홀로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