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아주머니, 아저씨가 절 키워주신 은혜는 언젠가 꼭 갚아야 하는 거겠죠?”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알 턱이 없다. 그러나 대답만은 명확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건 당연한 건데 무슨 은혜를 갚아, 호연아.”
이따금 입양을 간 아이들이 되찾아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 있었다. 구분 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가 받기엔 과분하다, 생각하는 것일까.
교은은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은혜를 돌려받으려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없다고. 그러나 아이들은 늘 마음 한구석을 스스로 무겁게 만들었다.
입안이 썼다. 사랑받기도 모자란 소중한 애들이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슬펐다.
호연도 다르지 않았다.
은혜를 갚고 싶었다. 양부모가 부탁하는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실패한 적 없었다. 누군가는 제 인생이 시작부터 가엾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니었다.
늘 한 만큼 이뤄내고 가졌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어떡하지.
은혜를 갚지 않는다. 그 생각만으로 호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교은의 대답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속 깊은 곳이 뻘겋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세정이 저를 등질 적에 지었던 명백한 웃음이 강렬하여 뇌리에 박혔다.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절대로.”
거푸 말해주는 교은의 안온한 음성을 들으면서도 호연은 밤새워 뒤척였다.
* * *
“호연아, 백 대표님 오셨는데.”
물통에 물을 받아 마당으로 가던 호연이 우뚝, 섰다. 교은은 어딘지 모르게 덜그럭거리는 호연의 시선을 따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석훈을 보았다.
석훈의 걸음이 여느 때보다 조급하고 호연을 찾는 음성이 고조되어 있었다.
“호연아!”
교은의 뒤로 호연을 발견한 석훈이 발걸음을 더 서둘렀다.
호연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머리를 어떻게 굴려야 감이 잡히질 않아 천사보육원에 계속 머물렀다.
답을 기다리다 못한 석훈이 직접 걸음 할 줄은 몰랐던 터다. 호연은 맞선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사실대로 말을 해야겠지. 회사로 찾아갔는데도 냉담했다고. 첫 만남에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도 해야겠지.
“저…….”
간격이 좁혀지자 호연은 입을 열었다.
“빨리 와! 가야 해!”
“네?”
석훈이 호연의 손목을 걸어 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아귀에 반동이 오자 물통을 놓쳐버렸다. 물통에 채웠던 물이 울렁거리며 넘쳤다.
가깝게 붙어 있던 원피스를 흠뻑 적시고 푸릇한 잔디로 쏟아졌다. 석훈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호연을 끌어 앞으로 척척, 나아갔다.
“어머.”
친딸과 다름없이 키웠다고는 하지만, 호연에게는 늘 신체적 접촉을 조심했던 석훈이었다. 호연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당혹스러운 얼굴의 교은이 몇 걸음 다가오다가 멈췄다.
꽉 잡힌 손목에 뼈가 눌려서 아팠다. 호연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통을 호소하며 차에 태워졌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호연은 차에 타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손목을 감싸 쥐었다.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알알한 고통이 일었다.
곧 호연의 옆으로 오른 석훈이 기사를 재촉했다. 차마 닫히지 못한 하얀 울타리 문이 옆을 지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넓은 도로로 차가 빠져나가던 즈음에도 석훈은 숨을 가누고 있었다. 호연은 그런 석훈의 상태를 보다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얘, 호연이 너는……!”
그러자 석훈은 울컥한 듯이 언성을 높였다가 한숨과 함께 낮추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아니, 전화만 그래? 메시지는 왜 답장을 안 해?”
“야작 하고 강의 듣고……. 바빴어요.”
“아무리 바빴어도! 기다리는 입장 생각을 해야지.”
“죄송해요.”
다시 물음을 꺼내기가 민망하게 되었다.
호연은 차창 밖으로 어스름하게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을 보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탁한 숨소리가 막막했다.
* * *
호연은 석훈이 묻는 대로 세정과의 일을 답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저녁 식사가 있노라며 호연을 숍으로 올려보내고 저는 준비할 게 있다며 먼저 돌아갔다.
호연은 다시 돌아온 차에 타서 기사에게 무슨 일이에요? 물었지만, 글쎄요……. 하는 희미한 답변만을 돌려받았다.
어지간히 중요한 저녁 식사인가 싶었다. 석훈의 일에 자신까지 동참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런데 얼마나 예를 갖춰야 하는 사람이기에 숍에 들러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도록 만드나.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때였다.
“집……?”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찼다.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동네의 이 층짜리 집. 여름이면 더위처럼 붉은 능소화가 늘어지는……. 동네의 어떤 주택보다 눈길이 가는 집.
어딜 둘러보아도 제가 지내는 집이 맞다.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춘 채 집으로?
“저녁 식사 약속이 집에서예요?”
“네.”
호연은 등을 떠밀린 듯이 차에서 내렸다. 입기 복잡했던 원피스 자락을 잡아 올렸다. 부드러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 소리를 들었는데도 차임벨을 누르지 못했다. 높은 담이 알 수 없이 답답했다.
분명 저를 인형처럼 꾸며서 참석시킬 때의 긴장감이 있는데, 집으로 초대하는 친밀함은 무얼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 민형인가?
미국에서 치료받고 있다던 민형이었다. 오빠가 한국에 오게 되었나. 그래서 만나게 해주는 건가. 아, 그런 건가 보다.
마음대로 추측하고 확신한 심장이 아플 만큼 벅차게 뛰었다. 불시에 솟구친 폭발적인 기대감이었다.
호연은 서둘러 계단을 밟았다. 차임벨을 여러 번 반복해 눌렀다. 열어 드릴게요,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금속음을 내며 열렸다.
푸른 잔디가 펼쳐지는 첫걸음에 발을 디밀었을 때였다.
……담배 냄새.
민형은 폐가 아프다고 했다.
눈앞으로 회백색의 담배 연기가 퍼졌다.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호연에게 세정이 고개를 까딱였다. 담벼락에서 얼마간 멀어진 채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모습이었다.
담배 냄새가 났던가.
지난 두 번의 만남 동안 향이랄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남자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가 더 독특하게 느껴졌다.
세정은 호연을 건조하게 훑어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담배 연기가 다시금 퍼졌다. 호연이 선 위치와 반대로, 빨아들여 패인 볼 근육을 놔주면서 느리게.
바람이 분다. 고개를 돌려준 배려가 무색하게 담배 연기가 호연의 숨에 뒤섞였다.
손님이 남자여서 저를 이토록 꾸며놨구나. 그래서 그간의 일도 묻지 않았구나.
호연은 치렁치렁한 원피스 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오히려 무력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가 쉽게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전혀 반갑지 않다. 차라리 수치가 들었다.
이 결혼은 나를 파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시죠.”
휴대용 재떨이에 아직 기다란 담배를 넣은 세정이 앞장섰다. 잠시간 스쳐 지난 남자의 그림자가 가로등 같았다.
미끈한 몸선, 담담한 표정. 굳은 제 표정에 희미한 비소를 짓는 듯한 착각.
호연은 판판하고 넓은 세정의 등을 보며 걷다가 발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제게는 과분하게 큰 이 층짜리 집이 남자에게는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폭이 큰 남자의 발걸음을 어렵게 따라잡자, 그는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웃었다.
걸음을 늦춰주는 일은 없었다.
* * *
현관 앞에서 서성이던 석훈은 호연과 세정이 나란히 들어오자, 입이 찢어질 듯이 웃었다. 다른 게 아니고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랬다.
풍기는 분위기조차도 정적인 것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식사 바로 준비할까요?”
아차! 잠시 두 사람을 그림처럼 살펴보다가 안내를 잊었다.
“네.”
사용인에게 대답한 석훈은 빠르게 몸을 낮추었다. 그를 보는 호연의 마음이 안 좋았다.
어딜 가든 늘 대접을 받는 모습만 보아왔는데, 제 나이에 가깝게 미치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굴복하듯 헤픈 웃음을 남발하는 게 속이 상했다.
그에 반해 세정은 당연해 보였다. 그렇겠지. 저 나이에 상무직을 달고 있는 남자니, 그 아래로 딸린 직원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개중에 저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은 또 얼마나 많겠어.
호연은 부루퉁한 마음을 스스로 달랬다.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에서 석훈은 저녁 메뉴에 관하여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았다.
“초대해주실 줄 알았는데 안 해주셔서 먼저 여쭸습니다. 실례였을까요.”
남자의 얼굴은 답지 않게 진심 같았다.
“아니, 무슨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진작 눈치라도 주셨으면……! 그런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초대했을 텐데!”
샐샐 거리는 석훈의 얼굴이 얼마나 당황스럽게 빛나는지.
“얼른 앉으세요.”
석훈의 호출에 내려온 여진이 사선 방향에 앉은 세정을 할긋거렸다. 의자를 젖혀 앉는 모습에 고요히 숨을 떨어트리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생각보다 더…….
근사하잖아.
소문을 듣기로 남자가 미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훤칠하고, 생각보다 더 정제된 듯한 모습에 잠시간 여진의 넋이 나갔다.
아무리 남자의 세 번째 결혼이라도, 정략혼이라도 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상적인 대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던져졌다.
한식 파인다이닝 형태로 진행되는 식사는 연두부가 들어간 몽글몽글한 계란찜을 시작으로 등심구이를 지나 큼지막한 전복이 올라간 돌솥 밥까지 이어졌다.
“완도산 전복을 통으로 얹은 돌솥 밥이고요. 양념장이 매콤해서 원하시는 만큼 넣어 드시면 돼요. 국은 미소 된장을 푼 배추된장국인데…….”
완도산 전복이 제철은 지났지만 어디 유명 횟집에서 쓰는 전복이고, 부추전의 부추가 몸의 어디에 좋은지, 삼삼하게 간을 맞춘 배추된장국은 또 얼마나 귀한 미소 된장을 썼는지.
그따위의 설명들이 줄이었다. 호연은 그 모든 것이 과하게만 느껴졌다.
세정을 제외한 네 명의 사람은 밥을 제대로 씹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세정은 느긋하게 양념장을 부어가며 전복 돌솥 밥의 간을 맞추고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청명주를 석훈과 한 잔씩 곁들였다.
호연은 간간이 이어지는 대화를 병풍처럼 듣고 있었다. 아예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을 모양인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만 오고 갔다.
주로 세정이 듣고 석훈이 아등바등 말이 끊기지 않게 화젯거리를 건져오는 모양새였다.
“군대는 다녀오셨고?”
“면젭니다.”
“아니, 왜……? 어디 아프십니까?”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도통 입맛이 돌지도 않는다. 호연은 통통한 전복을 숟가락으로 꾹 눌렀다.
탱글탱글한 살이 숟가락 옆으로 삐져나갔다가 숟가락을 튕겨낸다. 복잡한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왜 왔을까, 굳이. 이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낭비할 남자는 아니지 않나. 정말 아저씨에게 저녁을 대접받고 싶어서? 집안의 모든 구성원이 차려입고 저의 눈치를 살살 보는 상황을 못내 즐겨서?
“하…….”
한숨을 쉬는데 옆얼굴로 시선이 덕지덕지 붙는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불쾌한 시선을 쫓았다. 옆이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