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5화 (5/98)

제5화

잘못이라…….

솔직히 여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초연해 보이는 여자에게 자극을 줄 때마다 드러나는 표정이나 행동이 특이해서.

보육원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무시를 당해본 적 없다는 듯이 제 호승심을 자극할 때나 똑바른 눈빛이 닿을 때의 기묘한 비틀림이 신경 줄을 살살 긁어서.

“세정 씨.”

“…….”

“…….”

“네.”

여자의 생각에서 쉬이 빠져나올 수 있다.

말의 작은 진동으로 커피 잔 안에는 큰 파동이 일었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세정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연우는 아름다운 얼굴에 잠시간 숨을 마셨다.

북두 그룹의 차기 주인으로 가장 유력한 자. 그의 배다른 동생 휘영이 차근차근 밟아온 길을 단숨에 껑충 뛰어오른 남자.

지금은 계열사 중에 크지 않은 돈을 굴리는 북두 리테일에 있지만, 이는 기씨 집안의 조부 때부터 내려온 이력이었다.

몇 년 있지 않아, 유력한 계열사로 넘어가겠지. 가장 정석대로, 가장 단기간에 북두 그룹을 지배하는 자.

남자의 세 번째 결혼 상대를 구하는 맞선이었다. 연우는 그의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이혼 이후에도 전 부인들과 척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저 떠들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호설임을 추측했다.

예상대로 남자는 아주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고 지극히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하물며 이목구비와 몸매조차 비율을 정확히 나눈 것 같았지.

천박한 상상이 드는 얼굴을 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맞춤 슈트로 가린 것도 자극적이기만 했다.

어쩌면…… 회사의 발전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얼굴만 봤어도 결혼했겠다.

연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는 오늘 말씀드리면 될까요.”

첫 만남에 뜻이 맞는 것을 확인했고 오늘 혼전 계약서의 초안을 작성해 주고받았으며 이제는 양쪽 담당 변호사들의 검토만이 남았다.

“네.”

제아무리 사업과 관련한 계약 결혼임을 알아도, 상대가 설령 북두 그룹의 기세정이라도, 남자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은 아버지, 지영민도 달가워하지 않을 터.

그러지 않아도 넉넉할 만큼 지원을 해줄 테니, 사업이 아니라 취미나 즐기며 살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아닌가. 그를 뿌리치고 세정과 결혼할 때는 다른 무엇이 더 필요했다.

근 몇 년간 냉담했던 북두 그룹과 SQ 텔레콤 관계의 원인인 지청재라면 어떨까.

“빼앗아 가신 저희 청재 좀 돌려주세요.”

연우는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구태여 과장된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남자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연우는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아시잖아요. 청재가 줄줄이 딸만 넷이던 집에 겨우 얻은 막냇동생인 거.”

동시에 북두 그룹의 장녀, 기소라와 SQ 텔레콤의 막내아들 지청재는 오랜 약혼 관계였다.

문제는 소라의 죽음으로 북두 그룹과 SQ 텔레콤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데 있었다. 청재가 제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 없는 영민을 뒤로 하고 북두 그룹의 한규를 선택했다는 게 더 경악스러운 일이고.

“아버지도 내심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세요.”

고작 두 번의 만남이지만, 늘 이런 얼굴. 실은 남자가 웃는 것도 아까 본 것이 처음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느라 상긋, 웃었을까. 연우는 궁금했다.

“돌려달라…….”

세정은 다만 소리 내어 연우의 끝말을 곱씹어 볼 뿐이었다.

“우리가 뺏은 건가?”

말꼬리가 올라갔으나 물음같이 들리지는 않았다. 혼자 되짚어 생각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때쯤 연우는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북두 그룹은 청재를 빼앗은 적 없다. 도리어 청재가 선택하고 그를 받아준 게 북두 그룹일 뿐이지. 그 멍청한 애를 누가 품어다가 회사의 구성원 하나로 부려주나.

“평상시에 지연우 씨는, SQ 텔레콤은, 북두 그룹이 지청재 씨를 훔쳐다가 가지 말라고 통 사정을 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으나.”

차분히 말의 오류를 짚어준 세정이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잔을 손으로 쥐고 있던 연우는 얼굴로 열이 번져 벌겋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분명 이제 김도 나지 않는 커피인데.

세정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연우는 자유롭게 달싹거리던 입술을 잠근 채로 가만히 눈치를 보았다.

“분명 혼전 계약서에도 지청재 씨와 관련된 항목이 없죠.”

진동음이 들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세정이 ‘진행하시면 될 듯합니다.’ 하고 회신이 온 메일을 확인했다.

진행은 무슨.

“도둑놈 집안이랑 결혼을 할 수가 있나.”

허심탄회한 문장이 이어졌다. 냅킨으로 입술을 톡톡, 닦아낸 세정이 몸을 일으켰다. 연우의 동공이 그를 따라 올라가며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느 순간부터 직감한 것이 있었다. 이 남자는 한 번 선을 지나치면 다시는 돌아봐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감상. 잘 벼린 칼 같다는 느낌.

그 칼끝으로 끊어내는 게 지금은 저인 것 같고.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해요, 연우가 다급하게 사과했다. 태어나 몇 번 해본 적 없는 사과가 어색하게 튀어나왔다.

“아니요. 죄송한 거 없습니다.”

세정은 사과받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별 감흥 없는 눈길로 연우를 보았다. 피곤하다는 듯 눈썹 끝을 매만졌다.

“결혼은 다시 생각해 보세요.”

연우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진다.

“나라면 안 할 것 같아서.”

우아한 어투 끝으로 모든 책임이 제게 지어졌다.

결혼으로 가는 평탄한 길을 네가 망쳤노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말실수 한 번에…….

이 한 번에…….

“……세정 씨.”

당신은 평생 실수를 하지 않을까?

* * *

“백 대표랑 저녁 식사 약속 잡아보죠.”

지하에서 지상으로, 가로등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내린다. 차 조수석에 앉은 신원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되묻는 신원의 어투에 제법 당황스러운 기운이 얹어졌다.

“엔마트 백 대표 말씀이십니까?”

“네, 그 백 대표.”

그에 반해 세정의 어투는 담담하기 그지없어, 신원은 호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답지 않게 치사하고 어리게 굴던 제 상사와 정말 어리고 여리게 생긴 여자. 제 상사의 뒤통수는 어느 때보다 더 엄격해 보였고 여자는 몹시 침착해 보였다.

맞선을 본 사이가 이럴 수 있나.

그러다가 제 상사가 홱 돌아섰을 때 그가 옅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은 여자의 표정이 몹시 조마조마한 것도.

엔마트 인수에 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임원들의 의견을 전달했을 때도 심드렁해 보였던 세정이었다. 그런데 호연과 대화 몇 번에 웃었다.

게다가 결혼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연우와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백 대표와의 저녁 식사 약속을 잡으라니.

그러나 부하 직원에게는 상사가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물을 권리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연락 취해 보겠습니다.”

신원이 세정의 스케줄 중 빈 시간을 가늠할 때였다.

“아,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백 대표 집에서 식사할 수 있는지도 물어봐요.”

그러자 신원은 불현듯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기, 상무님. 결혼 상대는 지연우 씨인가요, 백호연 씨인가요.

* * *

석훈에게서 전화가 왔으나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왔었는데, 호연은 읽지 않고 [야작 중이에요.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핸드폰을 끄고 난 뒤에도 몇 번의 전화가, 또 몇 번의 메시지가 왔을 것이다.

호연은 차마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 천사보육원으로 왔다. 오전에 다녀간 호연이 다시 나타나자, 아이들은 반가워하면서도 얼떨떨해하고 자고 간다는 말에 좋아했다.

호연은 교은을 도와 아이들을 씻기고 이부자리에 눕히는 고된 일을 마치고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왜 다시 왔어?”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싼 교은이 호연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호연은 햇살의 향이 남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오랜만에 원장님이랑 같이 자고 싶어서요.”

“얘는 아직도 애처럼…….”

그리 말하고서 흘겨보는 교은의 눈으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교은은 십수 년간 보육원을 운영해 오면서 모두를 공평하게 아끼려고 했다. 마음이 더 가는 아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유독 눈길이 한 줌 더 머무르고, 마음을 한 움큼 떼어주고 그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은 애가 있었다. 그게 호연이었다.

호연은 제 발로 보육원에 찾아와 오빠가 여기로 가랬어요, 또박또박 발음했다. 오빠는 언제 오는데? 물었을 때 기다릴 거예요, 하고 대답하던 핏발선 눈이 생생했다.

교은은 호연의 냉혈한 기질을 문지르려고 노력을 참 많이 했다. 제가 이곳까지 흘러온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는데 학대의 흔적이 있으니 어떤 훈육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공동체 생활에 적응할 생각이 없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지금 어쩌지 못하면 어긋날 것이라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었다.

그러므로 가장 어려운 아이였다. 버려진 아이들은 모두 깨진 마음 조각을 안고 살아간다지만, 호연은 유독 그 파편이 잘고 많아 손으로 그러모으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식사를 거부하는 호연의 손목을 잡고 속상한 마음에 울기도 했고, 애정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끌어안고 자기도 했다.

그랬던 호연이,

“제가 기회를 뺏는 것 같아요……. 전, 저는요. 입양 안 갈래요.”

말했을 때 교은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죄스러움의 눈물이었다. 제가 호연을 공동체에 잘 녹여냈다고 생각했는데, 희생하는 법만 배운 것 같아서.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호연은 잘 지내는 것으로 보여도, 교은의 눈에는 어딘가 삐끗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애가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절뚝거리는 것같이…….

시간이 더 지나면 괜찮아질까.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인가.

이런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씌웠다. 교은은 오늘도 자책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호연을 관찰했다.

교은이 자리에 털썩 앉자, 호연은 등 뒤로 바싹 붙어 수건을 풀어냈다. 물기 어린 머리칼을 정성스레 수건으로 슥슥, 닦으며 말했다.

“시훈이가 미술에 소질이 있어요.”

“시훈이가?”

거울로 어깨 너머의 호연을 보던 교은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마에 엷은 주름이 또 하나 늘었다. 호연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네. 그 나이 때 저보다 잘 그려요.”

“그 정도라고?”

“……아뇨. 사실 그때 저보다는 못 그려요.”

교은이 여리게 웃었다. 그를 엿본 호연도 따라서 웃었다. 한동안 머리칼과 수건이 비벼지는 소리와 힘없는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무슨 일 있니.”

먼저 표정을 달리 한 것은 교은이었다.

부담되었나. 얼마 전 제가 이야기했던 보육원 사정이 문제인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알고 있어야 할 듯해 말을 했는데, 복잡해 보이던 동공이 지금도 저 아래 깔린 것 같았다.

“무슨 일은요.”

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드라이기를 들었다. 교은의 물음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빼곡한 바람이 간격을 메꾸었다.

교은은 제 머리칼 말리기에 집중한 호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파고들면 흩어지는 안개 같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운 호연을 따라 교은이 불을 끄고 누웠다. 잔상이 남은 전등이 노랗다.

그 주변으로 무상한 생각들이 흘러갔다. 종영의 망해가는 회사나 자라나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간단했다.

문득 호연이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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