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호연의 볼이 실룩이더니 발긋해졌다. 수줍은 빛깔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요?”
“거기는 직원분들 다니시는 길이라 조금 옆쪽으로…….”
“아, 네네!”
짧은 대화를 끝으로 호연이 출입구의 회전문 옆 통창 앞에 섰다. 고위 임직원들이나 타는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는 자리였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근육이 땅겼다. 오랜 시간 서 있어 다리가 퉁퉁 부은 것 같았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자, 무지근했다. 부피감이 느껴졌다. 여섯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탓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책임질 게 많은 남자니까. 그는 제 의지가 아니라, 회사의 의지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남자였다. 가장 고되고 가장 바쁘게, 분을 쪼개어 살아가는 남자.
그런 남자를 곤란하게 했다. 약속도 잡지 않고 당일에 오다니.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여섯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 생각이 호연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아저씨가 있을 텐데. 그러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우르르 나온 직원들이 호연을 숱하게 훑고 지나갔다. 개중에는 낮에 호연을 본 이들도 있었다. 여태 이곳에 서 있던 것인가. 경악스러운 표정이 지어졌다.
한차례 퇴근 행렬이 쓸고 간 로비는 차가우리만큼 조용해졌다. 호연은 심심해진 풍경을 둘러보았다.
저 엘리베이터만 탈 수 있으면 곧장 남자에게 갈 수 있을 텐데. 고작 출입구 통제기 하나가 가로막았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력감이 드는 동시에 차라리 기다리는 순간이 나았다.
“열 살 많은 남자랑 섹스하는 건 괜찮겠어요?”
남자의 상스러운 어투가 들리는 듯했다. 표정만큼은 우아해서 이질감이 들었었지.
맞선자리에서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는 지독한 탈력감이 몰아쳤었다. 다시는 남자를 마주치고 싶지 않아졌었다.
비록 제 발로 다시 찾아왔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말을 듣고도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처지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없어 보일까. 그때와 달리 준비되지 않은 차림새도 마음에 걸렸다.
불어나는 우려에 가슴이 눌린 듯 답답해질 때였다. 가만 웃음이 새는 것이다. 남자의 눈에 들어 보겠다고 지금 무슨 후회까지 하고 있나. 허탈했다. 좁은 어깨 탓에 자꾸 흘러내리는 화구통을 다시 고쳐 들었다.
띵―
스트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갈라졌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넣은 세정이 호연을 보았다. 놀란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피식, 입꼬리를 실그러트리며 웃었다.
호연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던 출입구 통제기까지 세정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정은 거침없이 호연에게로 걸어왔다.
호연도 여자치고는 작은 키가 아니었으나 세정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머리부터 뒤덮어지는 그림자가 시커멨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호연은 왜인지 벌써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세정은 다시 한번 엷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지난 맞선자리에서의 날 선 모습은 자취를 감춘 채였다.
“안녕하세요.”
호연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세정은,
“뭘 이렇게까지.”
하며 호연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가벼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숨이 덜컥, 정지했다.
“잘 지냈어요?”
호흡이 안으로 말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다행스럽게도 세정은 여상한 어투로 호연의 안부를 물어왔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나 덕분에?”
금세 성질이 드러났다. 예의상 한 말도 그저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비꼬아주는 남자였다.
세정은 조용해진 호연의 얼굴을 쓱, 훑어보더니 물었다.
“왜 왔어요?”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이어진 말에 호연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다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나 싶었다. 서둘러 표정을 지우고서 답했다.
“부탁 하나 드리고 싶어서요.”
“부탁.”
남자가 길게 발음한 단어가 호연의 목적이었다.
“회장님.”
세정이 미약하게 표정을 구겼다.
“만나 뵙고 싶습니다.”
맞선을 끝내고 돌아오던 밤부터 골몰했다. 힌트는 남자가 했던 말에 있었다.
“찾으신다고 들었어요. 기소라 씨 초상화를 그렸던 여자애. ……저예요.”
“그 애를 찾는 건 우리 아버지시고. 소개해 드릴까.”
기소라. 북두 그룹 기한규 회장이 가장 사랑했으나 요절한 딸.
대외적으로 기소라의 사망 원인은 사고사였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코너 길이 잦은 도로였다. 감속하지 못한 소라의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아래로 추락했다.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소라는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동시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호연은 소라를 그린 적 있었다.
호연이 북두 그룹에서 주최한 후원 캠페인에 어린 화가 자격으로 참가했던 날이었다. 한규가 제 아이들을 그려보라며 모델 삼아 대동했다. 그날, 소라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게 호연이 그린 초상화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 북두 그룹 측에서 교은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 소라를 그렸던 여자애가 천사보육원 출신인 것 같은데, 지금까지 연락이 되느냐고. 혹시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느냐고.
교은은 그들에게 제 정보를 알려주어도 되냐고 물었었다. 호연은 싫다고 했다. 중학생이던 시절이었고, 돈의 무서움도 완벽히 알게 되던 시점이었다.
하여 그런 높은 분이 자신을 찾는다는 게 퍽 겁이 나고 어른들에게 반항심도 생기던 시절. 그래서 단호히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죄책감이 들었다. 어찌 됐든 죽은 사람을 이용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니. 호연은 그날 받지 않은 그림값이라고 애써 마음을 고쳐먹었다.
“만나 뵙게 해주면 백호연 씨는 나한테 뭘 해주지?”
아니, 우물쭈물 입술을 열어 대답하려는 호연의 입을 막듯 세정이 손을 올렸다. 익숙한 명령처럼 호연의 입술이 다물렸다.
“들을 시간이 없겠네.”
고생해요, 하고 세정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장장 여섯 시간이 넘는 기다림이었다. 호연은 해가 들이치는 통창 앞에 서서 어둠이 뒤로 깔리는 시간까지 계속 기다렸다. 회장님을 뵙게 해달라는 한 문장을 말하려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아예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지. 수백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수는 없었다. 여섯 시간이 넘는 기다림과 짧은 대화와 완전한 무시는…….
단호하게 뒤를 도는 경우의 수는 대비한 바였다. 호연이 멀어지는 세정에게로 뛰어가 허겁지겁 팔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 주머니에서 살짝 딸려 나왔다가 멈추었다. 호연은 반쯤 몸을 돌려 저를 쳐다보는 세정에게 절박하게 물었다.
“그날 제가…… 이런 벌을 받을 정도로 잘못했나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가 그 정도로 잘못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부정이었다. 더불어 억울한 마음도 없잖았다.
그래, 남자가 말하는 주제를 제가 넘었다 치자. 그런다고 그에게 무례한 발언을 할 자격이 주어지나. 을의 처지는 늘 이렇게 진부하도록 속이 갑갑한 것인가.
호연의 얇은 손가락을 보던 세정은 팔을 들어 올렸다. 끊어내듯 툭, 밀쳐냈다.
호연은 그게 붙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다. 제가 꺼낼 수 있는 패는 이제 없다.
호연은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 반해 세정은 평소의 느긋한 미소를 띤 채로 구겨진 소매를 판판하게 폈다.
“글쎄요.”
이어지는 음성이 사람의 속을 뒤집는 것치고는 다정하다.
“벌이라…….”
세정은 말끝을 끌며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애도 아니고.”
호연은 세정의 소매조차 구길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속을 북받치게 했다.
“또 봅시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는 행위에 호연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세정은 그게 웃긴 양 눈을 접었다. 이 공간에서 웃고 있는 건 남자뿐이었다. 그건 폭군의 전형이었다.
세정이 멀어진다.
호연은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다리에 힘을 빼다 이내 주저앉았다. 무심하게 차에 오르는 남자가 야속하기도, 얄밉기도,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기도 했다.
* * *
북두 그룹이 소유한 호텔, 파라스 서울의 레스토랑 ‘딜로’에서의 저녁 약속이었다.
파라스 서울은 북두 그룹 본사에서 차를 타고 이십여 분, 호텔 건물 앞으로 거대한 분수대를 조경하여 화려한 감상이 드는 5성급 호텔이었다.
호텔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소 흐린 간접 등들과 로비의 거대한 나무였다. 기념일마다 테마를 잡고 꾸미는 것이 관례 행사였는데, 곧 화이트데이가 다가오다 보니 초콜릿 등의 오브제를 걸어두었다.
그 앞으로는 기념사진을 찍는 고객들이 있었다. 와인을, 샴페인을 마시고 잠시 후에 시작될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저 멀리, 중앙 계단에 보고를 받고 내려온 총지배인이 보였다. 세정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됐습니다, 하는 뜻에 한 걸음 내디뎠던 걸음이 그대로 굳었다.
쭉, 로비를 둘러본 세정이 발의 방향을 틀었다. 걸음이 멈추는 곳에 딜로가 있었다. 호텔의 최상층이었다.
SQ 텔레콤의 넷째 딸, 지연우는 그보다 조금 늦게 왔다.
딜로의 헤드 셰프가 유출됐다고 들었다. 새로 기용된 헤드 셰프의 평이 좋지 않았는데, 신속하게 교체되고는 세정도 첫 방문이었다.
“다 맛있네요.”
스피니치 파스타를 한입 먹은 연우가 입을 오물거렸다. 세정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유출되었던 헤드 셰프보다 더 괜찮았다.
꽤 만족스러운 코스요리가 끝이 나고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앞에 두었다.
어쩌면 결혼은 웬만한 사업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서로의 손익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타인의 앞에서는 굳이 티를 내지 말아야 하니까.
또 한 번 사람들에게 내보여야 하는 작위가 벌써 권태롭다.
세정은 부지런히 열리는 연우의 입술을 보았다. 문득, 붉은 입술이 하얘지도록 꾹, 깨무는 일이 잦던 여자가 떠올랐다.
가슴 아래까지 탐스럽게 물결쳐 내려오는 다갈색 머리칼과 노란빛이 도는 옅은 동공. 몸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얇은 원피스 위를 가르던 투박한 화구통과 매달려 있던 단순한 인장.
덧그려진다.
“그날 제가……. 이런 벌을 받을 정도로 잘못했나요?”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로 저를 보던 여자가 떠올라 세정은 피식, 웃었다.
연우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제가 말을 끊었는데도 세정은 반응이 없었다. 제 말을 듣지 않았다는 방증인데,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웃는 그 얼굴에 할 말을 잊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