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기소라 얘기를 꺼낼 줄이야.
태블릿으로 업무 보고를 받아보던 세정이 그 위로 덧그려지는 얼굴에 피식, 웃었다. 기사가 백미러로 세정을 응시했다.
세정은 피로가 쌓인 목뒤를 손으로 주무르며 편히 기댔다. 익숙한 피로감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눈앞으로 그 여자의 맹랑하던 표정이 떠다녔다.
여자가 백여진이 아닌 건 첫눈에 알아차렸다. 다만 누군지는 알 수 없어서 그냥,
보았다.
애초에 스물여섯의 얼굴이 아니었다. 청초한 얼굴에 어린 티가 비처럼 흘렀다.
백여진의 인적 사항 서류에 적힌 동생, 백호연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 상관없는 사람이 대리하여 나오진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비고란에 입양이라고 적혀 있던 백호연뿐이지.
스물두 살이었던가.
참…… 노력하네.
참, 뒤로 삼킨 말이 있었다.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그 수가 얕았다. 가진 패를 한 번에 다 드러내다니. 서서히 졸아붙던 여자의 낯빛이 떠올랐다. 쯧, 낮게 혀를 쳤다.
서양화를 배운다고.
세정은 여자의 하느작거리던 손가락이 붓을 쥐는 상상을 했다. 황목의 수채화지 위를 가볍게 유영하는 붓끝. 그를 요령껏 쥐고 있을 가느다란 손가락. 어떤 색감을 주로 하여 어떤 그림을 그리려나.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끝이 살아 있는 눈을 보았다. 만나본 화백들의 눈빛과 붓끝은 비슷한 성질을 가지므로 여자의 그림은 부분 부분이 짙겠다.
……유화도 어울리겠네.
그뿐.
“찾으신다고 들었어요. 기소라 씨 초상화를 그렸던 여자애. ……저예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 애를 찾는 건 우리 아버지시고. 소개해 드릴까.”
노골적인 무시에 한 손으로도 다 잡힐 것만 같던 가는 목까지 붉어졌다.
애초에 세정도 이토록 무안을 줄 생각은 없었다.
여태까지 수준에 맞지 않는 기업들이 이따금 순번을 치고 와 자리할 때가 있었는데 모두 정중하게 끝맺었다. 세정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오늘도 그리할 예정이었다.
어떻게든 연을 맺어 제 기업을 살려보려는 백 대표의 발악이 이해도 되었다가, 친딸 대신 양딸을 내놓는 꼴이 괘씸하기도 하면서. 반복되는 제안과 걷어냄이 있었다.
말은 쏟아부은 듯 담대하게, 행동은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그 모든 걸 저지하는 여자의 어투가 슬슬 짜증이 났다.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여자에게 시간을 뺏기는 것도 아깝고 무용한 대거리를 하는 것도 지겨웠다.
“노력할게요.”
이 한마디에 인내가 무너졌다. 태생부터 부친 외의 무엇이든 참아본 적 없었다.
“뭘요. 뭘 노력할 건데.”
“원하시는 조건, 원하시는 아내감이 될 수 있도록…….”
“백호연 씨는 내 말이 어렵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자식새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이딴 것들 알아보면서, 전처들 정보는 안 찾아봤나? 봤으면 알았을 텐데.”
“…….”
“애새끼는 취향 아닌 거.”
입을 다문 호연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 온몸이 싸해지는 낯선 쾌감을 느꼈다.
“집안이 꿀리면 본인 능력이라도 있든가. 팔려 오는 주제에 불쌍하기라도 하든가.”
“…….”
“그래야 내가 열 살 어린 여자랑 결혼하는 도둑놈이라는 소리도 감수하지. 지금은 너무 당당하잖아.”
“…….”
“열 살 많은 남자랑 섹스하는 건 괜찮겠어요?”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
“어린애라 이런 대화는 어렵겠네.”
와인 잔의 스템을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 빙그르르, 돌렸다. 연한 개나리색의 와인. 그 안에 담긴 여자의 좁은 어깨가 수치감으로 떨렸다.
그게 문득 나비 같기도 했지. 뻗은 쇄골과 차분히 오르내리던 가슴 따위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엔마트도 결국 헐값에 몸을 나눠주게 되겠지.
일주일 뒤에 잡힌 맞선의 상대는 누구더라. SQ 텔레콤의 넷째 딸이었나. 그녀의 동생인 지청재가 제 가족을 버리고 북두 그룹에 온 이후로 냉랭하던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윈윈이 되는 관계. 세정이 원하는 바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 살의 나이 차까지.
누구를 발정이 난 변태 새끼로 보나.
잔뜩 겁먹은 채면서 변태, 폭력범, 미친놈을 줄 세우던 건 웃겼다. 헛웃음이 샜다. 그러나 채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애의 다리를 벌리는 상상만으로 금세 기분은 저조해졌다.
짙게 선팅 된 차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퇴근 시간과 맞물린 도시의 도로는 좀체 뚫릴 줄을 몰랐다.
급격한 피로감에 숙면이 간절했다. 두통이 일었다. 세정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기운이 깔린 길 위에,
……백호연이 있었다.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끝과 끝에서.
바람이 부나.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원피스 자락이 휘청인다.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뿐. 신호를 받은 차가 부드럽게 주행하자, 세정은 그쯤 시선을 돌렸다.
* *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류를 넘겨보던 세정이 고개를 들었다. 네, 짧게 대답했다.
미래사업추진팀에서 내놓은 기획안은 베트남과 미국에 북두 마트를 진출시키자는 거였다.
먼저 진출한 엔마트 또한 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낙관적인 시선인 거고. 베트남으로 지점을 내기 시작한 회사들이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른 계열사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지원금을 넉넉히 받는 회사들의 입지는 좀 다르겠지만, 엔마트는 아니었다.
고민이 되었다. 해외 진출은 더더욱. 안 그래도 진작 중국으로 발 뻗어나갔던 호텔 사업은 철수로 막을 내리지 않았나.
이로 말미암아 짐을 싸고 나간 권 전무를 떠올렸다. 한국 불매운동을 거칠게 하던 시기였으니 상황이 잘 맞물리지 않은 점도 패착이었다.
차라리 북두 리테일 사업부 아래에 있는 북두 홈푸드의 프리미엄 라인, 잇미를 결합해서 진출하는 건 어떨까.
유명 맛집, 명장들의 솜씨를 그대로 담는 잇미는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오랜 시간 줄을 서지 않아도 그 맛을 최대한 흡사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하여 순식간에 한국 시장과 해외 시장을 장악한 바 있었다.
문제는 북두 홈푸드 해외사업팀장을 맡은 이복동생, 기휘영이 순순히 허락해줘야 말이지. 제가 하는 일에는 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나서는 휘영을 생각하자 없던 두통이 이는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세정의 비서, 신원은 생각에 잠긴 듯한 남자를 기다렸다. 눈을 지르감았다가 뜨는 세정의 시선이 제게로 곧았다.
“말씀하세요.”
단조로운 음성에 목적을 꺼내놓았다.
“백호연 씨가 1층 로비에 계신답니다.”
“……누구?”
그게 누구야.
세정은 정말이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지난주에 맞선 보셨던 엔마트 백 대표님의 따님입니다.”
“아.”
별 감흥 없는 깨달음이 묻은 말이었다.
열흘 정도가 지났다. 세정은 그새 SQ 텔레콤의 넷째 딸, 지연우와 맞선을 봤고 두 번째 만남을 앞두었다. 그녀는 똑똑했다. 세정이 원하는 조건을 맞출 줄 알았다. 마음에 들었다. 순조롭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솔직히 말해 호연은 그날 이후로 잊고 지냈다. 딱히 기억을 할 만남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여자의 얼굴이 울렁이며 떠오른다. 깨끗하고 처연하던 어린 얼굴. 다시 생각해보니, 유화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그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상무님.”
신원이 불렀다.
“네.”
대답하고 다시 상념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하러 왔을까. 결혼을 사정하러 왔을까. 한 번의 만남이나 구걸하러 왔을까.
그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긴 했다. 또 어떤 말들을 준비해 왔는지, 얼마나 성실히 공부해 왔는지.
섹스 얘기에 귓불을 달구던 서툰 모습들은 조금이나마 정돈이 되었는지.
* * *
―기 상무가 SQ 텔레콤 넷째랑 맞선을 봤다는데 호연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럴 줄 알았다.
한동안 투자금 명목으로 출국하여 베트남에 체류하던 석훈이 귀국했나 보다.
차마 당사자에게 물을 수 없어 제 아내인 연실에게 묻고, 연실은 여진에게 묻고. 여진은 긴 새벽에 호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빌려준 옷을 받으러 왔다고 쭈뼛대면서 침대 귀서리에 앉아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어?”
호연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악명 높은 평판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실제로 느낀 감상도 그와 비슷했다.
“그게 끝이야? 더 말해줄 건…… 없어?”
여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분이 결정하실 문제니까…….”
호연은 말끝을 흐렸다. 아마, 그게 석훈의 궁금증에 더 크게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호연은 여진의 마음도 이해했다. 기대하는 제 아버지에게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겠지. 하여 최대한 긍정적으로 전했을 것이고 석훈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모든 일의 도화선은 저였다. ‘의례적인 거겠지, 호연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찾아가 볼래?’ 하고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시키는 석훈에게 그러지 못하겠노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여러 일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다.
천사보육원이 지난한 것은 오랜 일이었다. 근대제강의 하청 회사를 꾸리는 교은의 남편, 김종영의 사업이 아주 잘 풀렸을 시기에는 다른 실정이었지만 호연이 온 이후로는 한 번도 넉넉한 일이 없었다.
그랬던 천사보육원에 석훈은 꾸준한 후원을 약속했다. 하고픈 미술 공부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심지어 민형을 찾기 위해 애써준다고 했다.
호연은 아껴 쓰지 않아도 되는 물감이나 도화지 따위가 기쁜 것이 아니었다.
언니, 언니야! 누나아! 하고 부르던 애들이 맛있는 걸 먹고 통통한 배를 두드리는 게 좋았고 어째서 자신은 옷을 물려 입어야만 하냐고 새 옷을 입고 싶다고 눈물 훔치던 철없는 애들의 소박한 웃음소리가 좋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석훈의 사업이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영이 수억 원대의 빚을 지게 되어 더는 보육원 운영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제가 공기마저도 사랑스러워했던 공간에서 그를 이루던 모든 것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어렵게 찾은 민형이 아프다니…….
석훈의 사정을 모르는 교은이 제게 도와달라고 했다. 석훈도 제게 도와달라고 했다.
절망스러웠다.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정을 찾아왔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북두 그룹 본사의 분위기가 어쩐지 남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열흘이 지나는 동안 잠시도 잊히지 않았던 그 사늘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꾸만 고개가 짓눌려 내려가는 압박감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기다렸다.
인포메이션 데스크 직원과 상무실 비서를 거쳐 전달되었을 제 이름에 대한 세정의 답변을.
이내 아, 네네. 공손한 대답을 끝으로 수화기를 내린 직원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