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안녕하세요.”
호연은 앞섶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잘 관리되어 반질반질한 구두가 시야 끝에 잡혔다. 그 구둣발이 가볍게 바닥을 스치어 시야로 깊이 들어왔다가 멀어졌다.
호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앉으세요.”
그때 시선이 비벼졌다.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베는 듯한 느낌에 긴장으로 턱이 당겨졌다.
남자가 옅게 웃으면서 먼저 의자를 빼내 앉았다. 긴장을 풀라는 듯한 미소였는데, 어쩐지 어깨가 굳었다.
“네.”
호연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세정이 잘 잠가두었던 정장 재킷 단추를 풀자 서버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대답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서버가 세정과 호연의 앞으로 각각 한 부씩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세정의 정장 재킷을 받아 챙겼다.
호연은 무엇을 골라야 할까……. 골몰했다.
“도을은 해산물을 잘합니다.”
서버가 세정의 재킷을 보관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호연은 예상치 못한 추천에 힘을 주어 웃었다.
“……아, 추천해주신 거 먹을게요.”
다시 한번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세요.”
건조한 눈빛이었다. 그리하여 드는 버석한 감상. 자연스럽게 피하기 위해 느릿하게 시선을 끌어내렸다.
재킷을 벗어 드러난 어깨가 곧고 넓었다. 서서 볼 때의 눈높이 차이가 확연했으므로 키도 상당히 큰 것 같았다.
여러모로 위압감이 드는 눈빛과 몸을 가졌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선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삼백안이 묘했다.
서버가 다시 들어와 주문을 받았다. 도 코스로 두 개. 메인 요리와 페어링 된 화이트 와인으로 두 잔.
호연이 남자를 짧게 본 결과, 여진이 말했던 것처럼 막돼먹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그런 낭설이 돌게 됐을까. 아저씨도 그 낭설을 믿었던 걸까? 실제로 봤더라면 언니가 나가고 싶어 했을까?
서버가 식전 빵을 시작으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호연은 이런 게 맞선인가, 싶었다. 태어나 과팅, 소개팅 따위는 해본 적 없는 스물두 살의 머리로는 한계였다.
조사하고, 공부한 것도, 하고픈 말도 잔뜩 준비되어 있는데 세정이 말문을 열지 않고 우아하게 음식만 집어 먹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음식이 맛있는지, 분위기는 좋은지. 호연은 무엇도 맘 편히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정은 화이트 와인으로 목을 축여가며 앞에 호연은 없다는 양 식사를 계속했다.
“맛이 괜찮았어요?”
디저트까지 코스가 모두 끝나고서야 세정은 호연에게 말을 붙였다.
“……네.”
사실 모르겠다. 배가 부른 것도 같은데 눈칫밥을 먹어서 배가 부른 건지, 체기로 더부룩한 건지.
“다행이네요. 그만 일어나죠.”
냅킨으로 입술을 톡톡, 닦아낸 남자가 문가를 턱짓했다.
“……끝인가요?”
남자는 금세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호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떤 게?”
남자는 진실로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맞선이요.”
호연의 대답에 남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술을 닦던 냅킨을 접어 내려놓았다. 무언가 곰곰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백여진 씨가 아니잖아요.”
언니를 대신하여 나온 자리였다. 맞선자리마저 어렵게 구해낸 것인데 친딸이 아니라 양딸이 나온다고 하면 어떨까. 단박에 취소되었겠지.
석훈은 최대한 나중에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되도록 상견례 날까지도 몰랐으면 한다고. 말도 안 되는 것을 신신당부하는 석훈의 눈이 간절함으로 번들번들했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몇 날 며칠 저를 붙잡고 강조한 것인데, 남자는 단숨에 알아차린 것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백호연 씨가 어딜 봐서 스물여섯 얼굴이야.”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이름을 가르쳐준 적 없다.
그 가벼운 충격에 호연은 정신이 들었다.
그래, 사실은 이게 맞는 거다. 석훈의 발상은 말도 안 됐다.
호연의 얼굴이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고 하지만, 그건 또래와 함께 있을 때였다.
홀로 남자의 앞에 놓였을 때는 서툰 행동, 젖살이 다 내리지 않은 볼, 불안한 듯 내내 떨리는 다갈색 동공 따위가 본래 나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백 대표님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잘 들어가시고.”
호연은 뒤늦은 깨달음에 볼이 달아올랐다. 세정은 더 같이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다리를 풀었다.
“……언니랑 저랑 다를 것도 없어요.”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도 당당한 어투에 세정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곤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되물었다.
“뭐가 다르지도 않을까.”
“…….”
“설마 친딸이랑 양딸을 동등하게 키웠다,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닐 거고.”
벌어지던 호연의 입술이 다물렸다.
“맞아요?”
참. 남자가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순식간에 남자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제법 올곧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무법자처럼 날티가 나고 서늘했다.
이내 아,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 목 근육을 푼 남자가 호연에게 툭, 침을 뱉듯 말을 뱉었다.
“귀엽네.”
순간 속도 없이 호연의 심장이 뛰었다. 그 박동에 호연이 더 놀랐다. 전과 다른 의미로 볼이 밝혀지려던 때였다.
“주제도 모르고.”
가슴으로 싸한 한기가 번지는 듯했다.
“좋은 분들이세요.”
“좋은 분들이시겠죠.”
그저 앵무처럼 말을 따라 하여 긍정했을 뿐인데 조롱처럼 들렸다.
“끝까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백호연 씨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요.”
“잘 생각해봐.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면 이 자리에 백호연 씨를 내보냈겠어요?”
“…….”
“아무리 북두 그룹이라도 이혼이 두 번이야. 내 평판이 그렇게나 엿 같다던데. 들었어요, 내 평판?”
“…….”
“뭐라던가요. 궁금하네.”
“…….”
“편하게 말해봐요.”
“변태에, 폭력범에…… 미친놈.”
호연이 흩어진 단어를 거듬거듬 모아 늘어놓았다.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연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꾹 씹었다.
“그런데도 나왔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했고?”
남자가 찌르는 곳마다 내내 외면하고 싶던 맹점이었다.
호연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것, 가장 예쁜 것을 드레스 룸에서 골라내어 입혀주던 여진의 순한 눈매가 떠올랐다.
괜찮다. 괜찮아. 다시 곱씹었다.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괜찮다. 괜찮아. 차라리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나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주먹에서 천천히 힘을 빼냈다. 그 힘을 눈에 가득 실었다.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남자에게 박아 넣었다. 남자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엔마트가 북두 그룹과 협력하게 될 경우의 실리를 계산해 봤습니다.”
“실리.”
예상치도 못했던 이야기는 아닌 듯 세정이 호연의 말을 되짚었다.
“북두 리테일의 북두 마트가 베트남에 진출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호연도 처음에는 이 맞선의 급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석훈에게 받을 수 있는 자료는 다 받아 살폈다. 더해서 포털 사이트에 있는 북두 그룹의 첫 기사부터 훑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맞선 상대로 앉혀 왔겠나.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었겠나.
남자가 선택하여 결혼했던 여자들의 정보도 훑었다. 회화과를 재학 중인 저와 달리, 경영 일선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한 여자들이었다.
실제로 이혼 후에 날개가 돋친 듯 업계를 휩쓸기도 했고.
호연은 제가 보았던 기사와 받아본 자료를 최대한 접목했다. 제 말에 오류가 있는지, 석훈을 붙잡아 계속 질문했다.
호연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엔마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와 여진이 다를 게 없다고 한 것은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이 중요하다는 말이라고.
“엔마트는 베트남의 라이브 그룹과 조인트벤처 방식으로 베트남에 진출해서 227개의 점포를 안정적으로 운영 중입니다. 라이브 그룹만큼 베트남 유통을 잡은 기업도 없을 테고요. 베트남 진출을 하고자 하는 북두 그룹에 도움이 될 겁니다. 또 H&B 스토어인 에브리브는 철수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업계 점유율 1위 왓이너스와의 격차가 현격하니까요.”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에 세정이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 말하세요.”
“왓이너스를 가진 UA 그룹은 편의점 사업도 점유율 1위를 목표로 두고 매물로 나온 ‘올두’ 인수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올두는 북두 그룹에서도 탐을 많이 냈다고 들었습니다.”
“편의점은 법적 제약이 있으니까.”
“UA 그룹이 엔마트를 탐냈던 이유도 같습니다. 엔마트가 운영하는 편의점이 전국에 1,170개입니다. 이는 북두 그룹이 편의점 사업 점유율 1위를 유지하기에는 충분한 점포 수예요. 실제로도 북두 그룹이 엔마트 인수 오퍼를 넣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혀로 볼의 여린 살을 밀어가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세정이 툭, 던졌다.
“그래서 백호연 씨랑 결혼하면 인수를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석훈은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었다.
당장 남자도 크게 매료되지 않는 것을 선심 쓴다는 식으로 내놓는 모습만 봐도 그런데, 그마저도 아깝다고, 아깝지 않냐며 몇 번을 물었다.
“……말씀 주신 건 엔마트 지분 투자 및 편의점 사업 부문 인수입니다.”
“길어봐야 이 년짜리 결혼에 회사는 다 못 넘기겠고, 자본금은 채워야겠고, 돈 안 되는 편의점 사업부는 팔아치워야겠고.”
“…….”
“그거네?”
아무리 이야기를 꾸며도 소용이 없겠다. 애초에 알량한 짓으로 속여 넘겨보려고 했던 게 바보 같았다.
“됐습니다.”
“……또 있어요.”
또다시 일어나려는 세정을 호연이 말로써 만류했다. 후, 짧은 한숨을 내쉰 세정이 말해보라는 듯 손을 낮게 들어 올렸다.
“파라스 호텔 20주년 기념 전시회를 계획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참…….”
세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차인영 작가의 작품을 꼭 필요로 하신다고 들었어요.”
“자꾸 어떻게 알고 들어요?”
“…….”
“신기해서.”
계속해요. 세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조금 당겨왔다.
“……차인영 작가가 저희 과 교수님이세요.”
그 말에 남자가 눈썹 사이를 그러모았다. 그러고는 손을 붓 삼아 허공에 무의미한 선들을 그린다. 의외라는 눈초리로 묻는다.
“그림?”
“네, 서양화 전공입니다.”
아아, 서양화.
“북두 그룹의 제안을 거절한 교수를 학부생이 설득한다.”
“자신 있어요.”
“있겠지.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없으면 어떡하겠어.”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있는 거였다. 호연은 저를 애제자로 꼽는 인영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작품 하나 걸겠다고 결혼하나?”
됐습니다, 한 마디에 자신이 있건 없건 쓸모가 없어졌다.
“또 있어요?”
세정의 물음에 호연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세정에게는 그게 대답이 되었다. 다시 한번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대로 일어나려던 때였다.
“죽은 여동생이 있으시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