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세정은 피아노를 타건하던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호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세정은 2년 전과 비교해 더 마른 낯을 가진 날카로운 남성이었고, 호연은 아직도 앳된 티가 여릿하게 남아 있는 단정한 여성이었다.
정적이 입술을 짓누른 듯 무거웠다.
호연은 느릿한 시선으로 이혼합의서의 조항을 쓸어보았다.
아, 정말 계획적인 남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혼을 두 번이나 한 경력직 남자였다. 처음 약속대로 이혼의 귀책을 모조리 제 쪽으로 돌렸다. 비밀 유지 조항까지 두렵게 써놓았다.
그건 비단 세정에게만 당연한 일이 아니다. 계약이 끝난 후에도 살아야 할 긴 인생이 있는 호연에게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 의미 없는 호의.
호연이 먼저 입술을 틀었다.
“이혼, 못 해요.”
반듯한 음성이 이혼합의서 위를 스치고 지나가 세정에게 닿았다. 세정은 의외로운 눈초리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좋아해요.”
호연은 세정에게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세정 씨를 좋아해요.”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다. 하얀 치맛자락을 말아 쥐면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면서,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고백에 서툰 어린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 어떤 남자를 데려다 놓아도 동했을 얼굴이다. 삶에서 비롯된 애처로움이 얼굴에 배어 있어 뭇 남자들의 비틀린 음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세정 또한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눈길은 투명한 테이블 아래 호연의 주먹에 잠시 머무르다, 그를 지나 여자의 얼굴에 정착했다.
“언제부터?”
“……오래됐어요.”
호연은 어쩐지 속이 홧홧해졌다. 맞비비는 시선이 뜨거웠다. 분명 시리도록 차가운 눈길인데.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들었다. 호연은 두 손을 바르작거렸다.
“백호연 씨.”
남자의 어깨 너머 창밖으로 흰 눈발이 나부꼈다. 고작 이름 한 번 불렸을 뿐인데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명령과 같은 부름에 눈발마저도 정지한 것처럼 빼곡하게 그어졌다.
“키스해봐요.”
호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좋아한다며.”
“……네.”
“2년이 짧은 시간인가.”
남자는 커프스 링크를 풀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었겠네. 기다렸겠네.”
그러곤 가늘게 웃었다.
“장난……이시죠?”
“장난이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세정의 상체가 테이블을 넘어와 호연에게로 기울어졌다. 공기의 빽빽한 밀도감을 느꼈다.
그런 남자였다. 태초부터 타고난 여유로움으로 시선 한 줌에, 손짓 한 번에 둘러싼 공기를 바꾸는 지배적인 남자.
막연한 감상에 잠긴 호연의 턱을 남자의 검지가 밀어 올렸다.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비트는 움직임은 잠시였다. 호연은 남자가 손을 댄 부분마다 데는 것 같은 열감을 느꼈다.
네,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묘한 눈길로 호연의 눈을 빤히 보았다. 꿰뚫리는 느낌. 호연이 고개를 돌려 세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고작 손가락 하나로도 저를 흔드는 남자였다. 세정이 손을 고쳐 뺨을 누르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 호연의 입술이 벌어졌다. 야트막한 신음이 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의 붉은 혀를 눈에 담던 남자가 호연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빨고 잘근거리는 세정에 호연이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손목을 걸어 잡았다.
문제는 다분히 고압적인 입맞춤인데도 도통 그렇게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혀를 겹치고 문지르는 동안에는 마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입 안쪽 여린 살에 스치는 혓몸이 미치도록 감각적이었다. 호연은 뼈마디를 타고 흐르는 전류를 느끼면서 세정에게 매달렸다. 도리어 입을 맞추어 달라 사정하는 여자처럼…….
혀가 얽히는 소리가 색정적이었다. 호연은 태어나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쾌감에 몸을 떨었다. 남자의 혀가 제 입속을 누비는 족족 허벅지 깊은 곳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늘한 세정과 달리 그가 내어주는 모든 것은 뜨겁고 녹신녹신했다. 정신이 없었다. 간간이 남자가 숨 쉴 틈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몹시 저돌적이었다.
세정 씨……. 입속말로 부수어지는 호칭을 세정이 그대로 삼켰다. 만류의 어투 따위는 전해질 리 없었다.
그러므로 호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세정의 검정 셔츠 소매를 구기면서 형편없이 흐트러지는 것뿐이었다.
더는 남은 숨이 없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촘촘한 입맞춤에 남자의 호흡이 몸 안에 쌓이고, 그로 말미암아 숨이 막힌 듯할 때 뺨을 그러쥔 손에서 악력이 빠졌다.
“하아, 하아…….”
달뜬 숨이 느껴지는, 고개를 살짝만 기울여도 콧잔등이 부딪치는 간격을 두었다. 살짝 부풀어 도톰해진 호연의 입술을 응시하던 세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시선을 좇는 호연의 눈도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보게 되었다. 미친 듯이 자맥질하는 저와는 다른 심장 박동이었다.
내내 제 입술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호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제 벅찬 심장 박동이 들릴 것만 같았다. 호연은 턱을 당겨 목에 가깝게 붙이는 것으로 최대한 세정에게서 멀어졌다.
피식.
웃는 소리.
호연이 슬그머니 뒤로 빼던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고개를 사선으로 내린 세정의 옆얼굴에 입꼬리가 솟아 있었다.
나를 비웃고 있다.
이로써 흐트러지던 마음이 다시 우뚝 올곧게 섰다. 아니, 속절없이 흔들렸다. 불안하다. 남자는 내 마음이 진심일 리 없다고 판단했고 방금 확신한 것 같았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여전히 어린 호연은 완벽하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흥분이 뇌를 뒤덮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왜 웃으세요?”
호흡도 정리하지 못해 들쭉날쭉한 음조로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세정은 손을 살짝 내저었다. 솟아 있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고, 예의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어지는 것은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어투였다. 사과 또한 같은 성질이었다.
그걸 듣는데 문득, 호연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받았던 취급, 의례적이던 사과. 어쩐지 사람이 작아지는 것 같은 분위기.
“열 살 많은 남자랑 섹스하는 건 괜찮겠어요?”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
“어린애라 이런 대화는 어렵겠네.”
남자가 와인 잔의 스템을 잡고서 빙그르르 돌리던 첫 만남이었다.
* * *
“호연아, 네 친오빠를 찾았어. 민형이. 강민형. 미국에 있어. 폐가 많이 아프더라.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아저씨가 미안하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정말 미안한데……. 이럴 수밖에 없는 아저씨의 입장도 조금만, 조금만 헤아려주면…….”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많이 어려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줌마가 너 볼 면목이 없다. 잘 키워보려고 데리고 온 건데 몹쓸 부탁만 하니, 원…….”
부모가 없던 제게 친히 다가와 부모가 되어준 이들이 아닌가.
“호연아, 아빠가 너랑 나 차별하고 그런 거 아니야. 알지? 호연이, 네가 싫으면 내가 아빠한테 말할게. 방법이 이것뿐이겠어? 아빠, 능력 있는 사람이야. 괜찮을 거야. 내가 다 부끄럽다. 나가기 싫지? 언니한테는 솔직해도 돼. 언니한테는 그래도 돼.”
이 가족의 단란하고 살뜰한 보호막 아래 수년을 자랐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융화되지는 못한 채로 일종의 부채감을 느끼며 지냈다.
어쩌면 선천적인 거였다. 호연은 도박쟁이 친부 아래서 자라 아주 어릴 때부터 받은 것을 셈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이혼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결격 사유투성이 남자와의 맞선자리에는 제가 나가는 게 맞았다.
호연은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이들의 얼굴이 전부 저와 닮지 않았다. 당연한 거였다. 입양 딸이었으니까.
그래도 호연에게는 그들이 가족이었다. 그들이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줌으로써 이루어진 특수한 형태기는 하지만, 어쨌든 가족이었다.
끝내 사랑해마지않는 친딸, 백여진이 나가는 꼴을 볼 수 없는 맞선자리에 양딸인 제게 나가달라 사정하는 순간에도.
호연에게는 그들이 가족이었다.
호연은 자꾸 퍼져가는 과한 상념을 지웠다. 제 부모님이 친딸, 양딸을 차별하는 분들은 아니라고 곱씹었다.
사실 그래도 뭐 어떤가, 싶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호연은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늘 화장을 해도 아주 옅게 해왔는데, 오늘은 숍까지 가서 화장을 받았다. 옷은 또 어떻고.
옷을 골라주는 여진의 눈에는 미안함과 설렘이 공존했다. 언젠가 너를 한번 꾸며보는 게 소원이었지, 하다가도 그런 자리에 호연을 밀어 넣은 것을 연신 미안해했다.
사실 호연은 그 정도의 미안함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제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파우더 룸을 빠져나와 대리석 바닥을 밟는 굽은, 높지 않음에도 불안하게 비틀렸다.
약속 시간보다 십여 분을 일찍 왔다. 호연이 레스토랑 입구에 서자, 서버가 빠르게 다가와 예약자명을 물었다. 기세정, 이름 하나에 서버가 바뀌었다. 오픈된 구역을 지나 룸을 안내해 주었다.
룸은 고급스러운 브라운 계열의 벨벳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겨울 느낌이 물씬 났다. 둘러보기로 아직 상대는 도착하지 않은 채였다.
호연은 의자를 내어주고 들여주는 서버의 호의가 못내 부담스러웠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시면 의견을 여쭐게요.”
“네.”
서버가 천천히 멀어졌다. 문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자 호연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은 가격이 얼마쯤 할까.
간결한 꾸밈. 돈을 쓰고도 그를 드러내지 않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호연은 어쩐지 요란하게 꾸미고 온 제가 오히려 배경 속에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여진에게도 오기 힘든 맞선자리였다는 게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
호연의 양부이자, 여진의 친부인 석훈의 엔마트는 대기업들이 꽉 잡은 유통시장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굴지의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도 옛말로, 인수 제의를 모두 물리치고 나서는 대기업 사이에서 ‘엔마트 죽이기’가 시작되었다.
대기업들이 뒤에서 손을 잡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하필 이런 순간 고르는 것마다 악수일 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자금은 자꾸 비는데 채울 방법은 없었다. 투자처를 찾기가 어려웠다. 대기업들은 다시금 인수 이야기를 꺼내는 석훈에게 엔마트의 가치를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였다.
그 시기를 맞추어 들어온 맞선자리였다.
무려 북두 그룹의 장남, 기세정 상무와의.
……약속했던 시간이다.
지루하지 않은 기다림이었다. 머뭇거리며 내어놓던 여진의 말이 귓가로 다시 재생되었다.
-변태래.
드르륵,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혼을 두 번이나 했는데 귀책이 기세정 상무한테 있대.
호연은 입꼬리를 당겨 표정을 꾸미며 일어났다.
-여자를 때린다는 말도 있더라. 그러니까.
차분히 발을 뒤로 물려 돌아섰다.
“기세정입니다.”
-완전 미친놈이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