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205화 (204/206)

기적의 IT 재벌 205화

텅 빈 회장에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빛나는 샹들리에와 품격 있는 실내장식, 중앙에 놓인 커다란 원탁도 원석으로 만들어진 고급품이다.

또르륵.

넓디넓은 원탁에 우두커니 앉은 사내가 찻잔을 채운다.

이미 식어버린 홍차는 향조차 비어버린 듯 무미건조했다.

“흥. 재미없게.”

홍차를 한 입 머금고 뱉어버리는 거구의 사내.

그는 이번 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였다.

이 원탁엔 방금까지만 해도 공화당 측 정치인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었다.

미팅의 목적은 공화당에서 트럼프 자신에게 힘을 실어달라는 것.

하지만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들은 상한가를 치고 있는 트럼프의 인기를 ‘일시적인 유행’쯤으로 여겼으며, 결정적으로 트럼프가 대통령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공화당 후보가 되는 걸 반대했다.

당연히 즉석에서 격렬한 설전이 오갔고, 상황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망할, 너구리 놈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주류 정치인이 아닌 철저한 아웃사이더다.

기성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위협하는 트럼프가 곱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잔뜩 인상을 쓴 그에게 한 사내가 다가온다. 그는 트럼프의 비서이자 브레인이기도 한 빈스 카슨이었다.

“후보님.”

“후보라는 말 집어치워. 이젠 듣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

“짜증이 나셔도 이후 일정은 진행하셔야 합니다.”

트럼프는 그를 한 번 흘긋 쳐다보더니, 냉수로 입을 헹궈낸다.

“휴, 이후 일정은 뭔가?”

“우선은 반 시간 정도의 짧은 개인 미팅 일정이 있습니다. 미팅이 끝나면 곧장 애리조나로 이동하여 크루즈 선의 티파티에 참석하여…….”

“잠깐. 개인 미팅?”

트럼프가 되묻자, 빈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답한다.

“그렇습니다.”

“누군데 이런 시기에 개인 미팅이야? 어지간하면 그냥 캔슬 해.”

“닉스에서 요청한 미팅입니다.”

닉스라는 말에 트럼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핫한 기업을 꼽으라면 누구든 닉스를 꼽을 것이다.

기술혁신 부분 성장력 1위.

2040세대 브랜드 가치 1위.

기업의 미래성장 가능성 1위.

그리고 시가총액 최초 1조 달러 달성까지.

그런 닉스에서 대통령 후보도 아닌, 아직 경선도 통과하지 못한 후보와 미팅 요청을 해왔다?

당연히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응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닉스는 대표적인 친 민주당, 친 오바마 측 기업이라는 거였다.

오바마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인기를 몰았던 트럼프로선, 그런 닉스와 만나는 것 자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CEO가 직접 자리로 오는 건가?”

“누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CEO인 박준오는 일본에 있다고 합니다.”

“흐음…….”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사업 이야기는 아닐 터.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일정 핑계로 빠지면 그만이지.’

생각을 정리한 트럼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소는?”

“2층에 따로 미팅룸을 마련했습니다. 외부에서는 절대 안 보이는 곳입니다.”

“좋아. 후딱 해치워 버리자고.”

트럼프가 2층 미팅룸에 갔을 땐, 이미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반갑습니다, 트럼프 씨.”

20대 정도로 보이는 동양 여인이 시선을 마주해 온다.

“오홋.”

그녀의 미모가 어찌나 절색인지 평소에 미녀를 끼고 살던 트럼프 입에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미모가 너무 빼어나셔서 잠시 넋이 나가 버렸군요.”

“과찬이십니다.”

딱딱하면서도 사무적인 반응이다.

트럼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 의자를 빼 앉는다.

“일단 앉으실까요?”

“알겠습니다.”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한다.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았건만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 트럼프의 체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녀를 배려하듯 살짝 허리를 굽힌 채로 말했다.

“혹시 닉스 측에서 오신 분입니까?”

“맞습니다. 닉스에서 나온 유수아입니다.”

“레이디, 혹시 직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직함은 따로 없습니다.”

순간 트럼프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녀는 그런 트럼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느긋하게 말을 이어간다.

“저는 대니얼 강 회장을 대리해서, 앞으로 닉스의 모든 정치적인 결정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대니얼 강? 박준오 CEO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호오, 이거…….”

닉스의 창립자인 대니얼 강이 CEO를 사임한 것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그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대니얼 강 사망설, 건강 이상설, 외계인 납치설 등등. 별별 루머가 다 나오고 있었다.

‘그런 대니얼 강이 직접 보냈다고? 거짓이 아니라면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나는군.’

트럼프는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남은 시간이 20분 정도밖에 없군요.”

“그거라면 상관없습니다.”

트럼프는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후 일정이 크루즈 선에서 열리는 공화당 티파티 참석이었지요?”

“그렇습니다만.”

“그 크루즈 선은 예정보다 1시간 늦게 정박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정박을 1시간 늦춰 달라고 했습니다.”

당돌한 그녀의 발언에 트럼프는 헛웃음이 나왔다.

“휘유, 요즘 크루즈선은 정박을 늦춰달라면 늦춰주는가 봅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거절하겠지만, 선주의 요청이라면 할 수밖에 없겠지요.”

선주.

즉, 이 여인은 크루즈선을 사버렸다는 말을 하고 있다.

“돈 자랑을 하러 오신 겁니까?”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지요.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 씨에게 크루즈선 하나를 산 것으로 자랑거리나 될까요?”

“그럼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이건 닉스가 트럼프 씨의 1시간을 사기 위해서 크루즈선 하나쯤은 기꺼이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허허…….”

세상에 자신과의 1시간을 위해 10억 달러짜리 크루즈선을 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트럼프는 기가 막혔지만,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미있는 일을 벌이셨습니다.”

“재미가 아닙니다. 이건 철저히 계산대로 한 행동이지요.”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트럼프의 시선을 맞댄다.

“닉스는 트럼프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까보다 곱절은 당돌한 발언이다. 그 흔한 미사여구조차 없었다.

스트레이트라 꽂혀 오는 터라 트럼프는 그녀가 자신을 떠본다고 생각했다.

“저는 오바마와 사이가 나쁩니다.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라 원수지간이죠. 그런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트럼프 씨가 오바마 대통령과 사이가 좋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흐음.”

트럼프는 턱을 쓱쓱 쓰다듬더니.

“제가 모든 무슬림을 추방하고 멕시코 국경에 벽을 세울 거라고 했던 걸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동성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도?”

“어차피 지지자들이 듣기 좋은 소릴 한 것뿐이잖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닉스의 기업 이미지에는 영향이 있을 거 같습니다만…….”

사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 발언을 던진 것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트럼프 씨. 저희는 당신이 난민을 반대하든, 중동을 공격해서 석유를 빼앗든, 전혀 상관치 않습니다.”

“으음…….”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을 토해낸다.

“어흠,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닉스는 제 정치적 행동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저 지금처럼 자신의 소신대로 하고픈 일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닉스가 얻는 건 뭡니까?”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를 원합니다.”

비즈니스 관계.

정치인 트럼프가 아닌, 사업가 트럼프에겐 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 멘트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이토록 직설적으로 요구를 해온 사람이 있던가?

그가 거의 반백 년 동안 사업을 해오며, 협상을 수백 번도 넘게 해왔다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지독히도 매력적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트럼프는 당황함을 속으로 밀어 넣고, 지금껏 참아왔던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닉스가 돕는다면 승리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포장해서 테이블에 올려두겠습니다.”

트럼프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그녀가 책상을 툭 치며 말했다.

“당신은 손을 뻗어 쥐기만 하세요.”

* * *

두꺼운 점퍼 사이로 겨울바람이 비집고 들어온다.

매번 병실에만 박혀 있었더니 이런 찬바람도 이젠 반갑게 느껴진다.

-마스터 강, 아직은 걸으시면 안 됩니다.

소리가 들린 곳엔 구체형 드론이 떠 있다. 난 날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잠시 바람만 쐴 거야. 그러니까 잔소리하지 마.”

-잔소리가 아니라 그 정도로 신체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알았다. 닫아.”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창이 닫히고, 공조기서는 따뜻한 바람이 밀려와 냉기를 밀어냈다.

다시 삭막한 병실 풍경이 재현된다.

“답답하네.”

자리에 벌렁 드러눕자, 드론이 빼꼼히 고갤 내민다.

“뭐야. 할 말 있어?”

드론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미래는 잘 체험하셨습니까?

“그걸 열흘이 지난, 인제 와서 묻는 이유가 뭐냐?”

-물을 타이밍이 없었습니다.

난 눈동자만 돌려 녀석을 쳐다본다.

“어이, 씬.”

-말씀하시죠.

“너,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지?”

-무엇을 말입니까?

드론 전면부 액정에 물음표가 뜬다.

내가 못 본 사이에 씬의 행동이 능글맞아 진듯하다. 아무래도 수아와 같이 지낸 영향이겠지.

“뭐긴 뭐야. 내가 미래로 가서 누굴 만나고, 뭘 보고 올지, 전부 알고 보낸 거 아니냔 말이다.”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저의 목적은 마스터 강을 만나서 돕는 것. 그 외에 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전적으로 마스터 강의 의지였습니다.

“웃기시네. 너 같은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 그게 안 궁금하면 사람이냐? 내 말이 틀렸…… 윽.”

소릴 빽빽 질렀더니 목 근육이 아려온다. 몸이 제법 망가지긴 했나 보다.

목을 부여잡고 있는데 드론이 옆으로 다가온다.

-방문하신 목적은 달성하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지겹도록 보고 왔다. 토가 나올 정도로.”

씬은 미래의 인류가 만든 유리병 편지다.

돌이킬 수 없게 된 미래를 알리고자, 과거라는 바다에 띄운 유리병 편지 말이다.

물론 그 유리병엔 편지 대신 인공지능 조각이 담겨 있었다.

그 유리병이 어떻게 내 게까지 흘러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덕분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이젠 두려워 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게 됐다. 그저 흔들림 없이 전진하면 될 뿐이다.

“씬, 사용자 인공지능 시스템 상황은?”

-자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통틀어 말하는 거야.”

-자이는 세계 스마트폰 OS의 72%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협력 전자회사에서 생산하는 가전 41%, 통신장비 65%, PC 19%, 반도체 44%가 자이의 제어권 내에 있습니다.

난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

“좋아, 그놈들을 우리가 몽땅 접속해서 제어할 방법은 있어?”

-자이는 태생부터 외부 접속을 불가능하게 개발했습니다. 즉, 지금 와서 설정을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안 되면 되게 만들어.”

이번은 씬의 액정에 물음표 3개가 떠오른다.

“자이를 싹 밀어내고 다시 새로운 놈으로 깔아 버려. 이름은 적당히 자이 2세대 정도로 만들어 붙이면 될 거다.”

-사용자 인공지능으로 기업을 해킹할 생각입니까?

“내가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해?”

난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눈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는 픽 웃으며 말했다.

“문만 열어주면 들어가서 터는 건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줄 거다.”

-해커들을 이용할 셈이군요.

“빙고.”

계획대로 된다면 기업들이 꼭꼭 숨겨둔 구린 것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올 거다.

“후후, 그땐 아주 볼만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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