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200화 (199/206)

기적의 IT 재벌 200화

한기련 행사가 끝나고.

난 곧장 파주로 이동해 첨단산업단지의 협력사 대표들을 만났다.

닉스의 CEO가 갑작스럽게 교체된 만큼, 협력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파주에서 미팅을 마치고는 다시 서울로 내려갔다.

이번 목적지는 한국 정치권의 심장인 여의도였다.

약속 장소에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지만 실세라 불리는 비서실 인사들과 이야길 나눴다.

그들은 닉스의 대규모 투자 덕분에 일자리 문제가 해결됐고, 최근 도입된 닉스VR 체험관이 관광객을 끌어모았다는 좋은 소릴 늘어놨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지는 선거 이야기가 그들의 진짜 관심사였겠지만 말이다.

그들과 적당히 어울려주고 자리를 파했을 땐 이미 하늘에 어둠이 내리깔린 뒤였다.

아직 내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목적지는 같은 여의도 내에 있는 KG그룹의 사옥이었다.

KG그룹에서는 진양현 회장과 함께 부사장으로 진급한 진승모를 만나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앞으로도 닉스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약속하는, 형식적이지만 필요한 만남이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 일정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자 시곗바늘이 12시를 넘어서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에 네 탕이나 뛰는 건 역시 무리였나.”

몸이 천근만근이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 듯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특히 그 대상이 정·재계 거물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무거운 몸뚱이를 억지로 객실까지 끌고 간다.

삐걱.

육중한 문이 열린다.

일반실이었다면 문을 열자마자 침대가 나왔겠으나, 아쉽게도 스위트 룸은 긴 복도와 거실까지 거친 뒤에 침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도저히 침실까지 들어갈 자신이 없어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으아, 죽겠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시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 쿠션으로 적당히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는다.

객실이 넓은 만큼 더 쓸쓸하다.

이럴 때 누군가 옆에 있어 주면 좋을 텐데…… 갑자기 수아가 보고 싶어진다.

“현우 씨.”

쓸데없는 상상을 해서 환청이 들리나 보다.

몸을 반대로 돌아눕는다.

그때, 방금 들었던 환청이 더 생생하게 들려온다.

“거실에서 자려고요?”

음?

쿠션을 치우고 눈을 뜬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두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수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현우 씨를 기다렸죠. 오늘 일정이 타이트했을 테니 조금이라도 케어해 주려고요.”

“그랬구나. 엥? 잠깐, 내가 여기로 올 줄은 어떻게 알고?”

“현우 씨는 매번 이 방에서 묵잖아요. 어찌나 이 방을 자주 썼으면 호텔에서 방 이름을 대니얼 룸이라고 정했대요. 그래서 평소엔 예약도 안 받는다고 하던데요.”

“어쩐지 항상 방이 비어 있더라니.”

수아는 입을 가린 채 옅게 웃는다. 그리고는 소파 바로 옆으로 붙어 앉았다.

“오늘 많이 힘들었죠?”

“이 정도는 거뜬하지. 이래 봬도 나 아직 현역이야.”

“거뜬한 사람이 거실에서 쓰러져요? 억지 부리지 말고 이쪽으로 누워봐요. 뭐해요, 어서요.”

수아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려 눕는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곤 내 발목부터 시작해 종아리 부분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몸살 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돌아왔는데 가만있을 순 없잖아요.”

종아리의 뒤쪽부터 손끝의 압이 느껴진다.

그녀의 마사지는 시원하다기보다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한기련 모임 끝나고 어딜 돌아다닌 거예요?”

“파주에.”

“거긴 왜요?”

“공단에 들어온 협력사들은 내 이름 하나 보고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잖아. 오랜만에 한국에 왔으니 얼굴이라도 비춰줘야지.”

조금씩 종아리를 움켜쥐던 손아귀 힘이 세진다. 처음에 살살했던 건 준비 운동이었나 보다.

“그 뒤로는요?”

“으음…… 여의도로 갔지. 정부 측 사람들이 날 애타게 찾았었거든.”

“KG그룹 본사에 간 거 아니었어요?”

“거기도 갔어.”

“세상에나. 하루에 미팅을 네 번이나 잡았단 말이에요?”

리듬을 타듯, 규칙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뒤늦게 올라온 알콜 기운과 함께 몸이 노곤해지니, 슬슬 눈이 감겨온다.

“하암, 내일은 닉스 신사옥 건설현장에 갔다가, 닉스 에너지도 내려 가봐야 해.”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왜 그리 쫓기듯 일정을 잡은 거예요?”

“쫓기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일을 몰아서 끝내는 것뿐이야. 일을 빨리 끝나야 너랑 어디 놀러라도 가고 그러지. 안 그래?”

“정말 그게 다예요?”

“물론.”

그녀의 손이 멎었다.

이어지는 나직한 한숨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요즘 현우 씨를 보면요. 주변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거 같아요. 마치, 어딘가로 훌쩍 떠날 사람처럼요.”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살짝 그녀의 눈치를 살피려다 눈이 마주쳐 버린다.

시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얼른 몸을 돌아 뉜다.

“더는 졸려서 안 되겠다. 눈꺼풀을 들 수가 없네. 이만 잘게.”

“현우 씨.”

“잘자, 수아야.”

쿠션으로 얼굴을 덮었다.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잠시 후.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

“자는 척하려면 계속 그렇게 해요. 저 혼자 이야기할 테니까.”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그래선지 느낌이 싸하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목소리가 이어진다.

“저, 현우 씨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어요. 이번에 개발한 가상현실을 써서 미래로 떠나려는 거죠?”

가슴이 쿵! 하고 뛴다.

뭐야? 수아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아니, 그보다 자는 척해야 하나? 아니면 일어나서 시치미를 떼?

두뇌가 과부하가 걸린 듯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차가운 손이 내 목덜미를 어루만져 온다. 난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씬에게서 직접 들었어요.”

그녀는 시선을 피하는 내 양 뺨을 잡고서 눈을 마주친다.

“저 아주 상세하게 들었어요. 닉스VR은 애초에 미래를 체험하기 위한 준비 과정 중 하나였고, 지금은 모든 준비가 끝났기에 현우 씨가 곧 떠날 거라는 것도 알아요.”

“떠난다니. 그건 그저 체험일 뿐이야. 그리고…….”

“거기에 가면 다시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씬. 이 망할 깡통이.

왜 이런 이야길, 그것도 하필이면 수아에게 꺼낸 거야?

이가 갈렸지만, 지금은 수습이 먼저다.

“수아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미래라고 해봐야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예측에 불과해. 그걸 체험한다고 못 돌아온다는 게 말이나 돼? 녀석이 헛소릴 지껄인 거야.”

“뇌를 조작해서 가상현실을 보여주는 기술은 말이 되고요?”

순간 말문이 턱 막힌다.

뭐라 이야길 꺼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씬이 만들어낸 것들. 아니지, 씬이라는 인공지능 자체가 현대에 존재할 수 없는 오버테크놀로지예요.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고요.”

“수아야,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들이밀어 내 입을 틀어막는다.

“이미 현우 씨는 잘하고 있어요. 닉스는 시가 총액 1조 달러의 세계 최대 기업이 됐고, 앞으로도 닉스는 계속 최고일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래를 내다볼 필요가 없잖아요?”

조목조목 맞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 난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갤 끄덕인다.

“알겠어. 미래를 보는 건 포기할게.”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예요?”

“그래, 약속.”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엄지로 도장까지 꾹 찍는다.

“애도 아니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후후, 그래도 이러면 안심이 된단 말이에요.”

“수아야.”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본다.

난 그녀에게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일 어디로 놀러 갈까?”

* * *

돔 안쪽의 인공정원을 지나쳐, 길게 뻗은 복도를 가로지른다.

복도를 거의 절반쯤 지나쳤을 때, 익숙한 모습의 드론이 내 쪽으로 날아든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강. 서부연구소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래, 반갑다. 이 깡통 놈아!”

기습적으로 손을 뻗는다.

드론을 낚아채려 했지만,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내 손을 피해냈다.

-마스터, 강. 화가 많이 나셨군요. 잠시 휴식하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휴식? 개소리 말고 일로 와! 빨리 안 와?”

드론은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주춤주춤 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잽싸게 몸체를 낚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와직.

프로펠러 한 곳이 바닥에 쓸려 찌그러진다.

그 때문인지 드론은 제 자리서 날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드론은 단순한 입출력장치입니다. 파괴해도 얻는 건 없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입 다물어.”

-알겠습니다.

난 성큼성큼 걸어 메인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프로펠러 하나가 고장 난 드론이 간신히 따라붙는다.

“어이, 씬.”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강.

“왜 수아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야? 그녀는 이번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

-그것이 이번 프로젝트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그러자 드론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유리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가상현실로 미래에 접속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따릅니다. 뇌의 시냅스가 ‘미래라는 가상’에 적응해 버리면 그곳을 현실로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그 현상으로 인해 뇌가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습니다.

나 역시 찜찜했던 터라 이미 조사를 해둔 뒤다.

뇌신경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략 20일 정도를 반복적으로 가상환경에 노출했을 때, 현실과 가상의 혼동이 올 수 있다고 한다.

내가 미래를 보고자 하는 이유는 씬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으며, 거기에 내가 어떤 관여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것 하나를 확인하는 데 20일이면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리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답변할 준비가 됐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수아를 왜 끌어들였냐는 거다.”

드론이 순식간에 속도를 내며 내 옆까지 따라붙는다. 가만 보니 아까 빌빌거렸던 건 연기였나보다.

-현실과 가상을 확실하게 구분하려면, 현실을 강렬하게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옆에 있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무언가가 수아?”

-제 판단으론 그렇습니다.

씬은 주어진 상황에서 언제나 최적의 판단을 내린다. 그것이 인공지능이 끊임없이 학습하는 이유다.

하지만 인간은 최적이나 최선이라는 단어보다는 감정을 더 중요시하는 존재다.

세상천지에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끌어들이는 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녈 끌어들였나?”

-마스터 강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작은 변수도 배제해선 안 됩니다.

“헛소리 마.”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목적지는 연구실 내부에 마련된 임상실험실이다.

이곳엔 미래를 체험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마쳐져 있었다.

욕창을 방지하는 전동 시트, 영양을 공급하는 바이오 패치, 체내에 쌓이는 노폐물과 소변을 자동으로 분해·처리하는 드레인 시설도 갖춰져 있다.

-적응훈련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 훈련은 됐어. 오늘은 본 게임으로 들어간다.”

망설임은 없었다.

능숙하게 시트 위로 올라선다. 그러자 비치된 VR기기가 저절로 머리 위에 씌워진다.

-안정적인 체험을 위해서는 유수아 사용자와 동행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고글에 백색 빛이 깜빡거린다.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미래를 보는 건 나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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