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99화 (198/206)

기적의 IT 재벌 199화

“강현우 회장님, 테이블에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회장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 건 둘째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오성의 정용재 입에서 나오니 굉장히 이질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자리에서 내뺀 한국훈 회장이 신성호 회장에게만 양해를 구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편하게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정용재는 어색하게 허릴 굽힌다.

조금은 놀랐다. 평소에 고개조차 까딱거리지 않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탓이다.

정용재.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구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늦었지만 축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축하 인사요?”

“닉스가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 기업이 된 일, 그것을 축하드리는 겁니다.”

딱딱한 말투와 어색한 표정 관리. 억양도 축하보다는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내 장담컨대 인공지능이 축하 인사를 해줘도 이것보단 잘할 것이다.

하긴, 매번 위에서 내려만 보던 녀석이 알랑방귀를 뀌려 하니 마음대로 안 되는 거겠지.

입가로 비집고 나오려는 비웃음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닉스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성 같은 파트너사가 같이 힘써준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릴 둘러싼 분위기가 묘하다.

신성호 회장이나 다른 SG그룹 사람들은 물론이고 장내 모든 이의 시선이 이곳에 박혀 있다.

마치, 우린 무대 위 배우고 다른 이들은 관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정용재에게 다행인 것은 이 테이블과 다른 테이블의 거리가 먼 터라,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는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까마득히 높아 보이던 애폴을 닉스가 제쳐 버릴 줄이야.”

“시기가 맞아떨어졌고, 거기에 운이 조금 더해졌을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그 후에도 비슷한 패턴의 대화가 이어진다.

정용재가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면 내가 적당히 받아주는, 딱 그런 연극 대본과 같은 흐름이었다.

계속 말을 돌리며 눈치를 보던 정용재의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인다. 드디어 뭔가를 꺼내놓으려나 보다.

“그보다 강현우 회장님, 제가 전해 듣기론 내년에 반도체 가격을 하향 조정하신다고…….”

“글쎄요. 반도체 쪽은 제게 물을 게 아니라 하이넥스 쪽에 직접 묻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침 이 자리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군요.”

난 시선을 바로 옆자리에 앉은 수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답을 내놓는다.

“내년 가격 조정 건은 아직 확정된 바 없습니다. 설령 확정됐다 한들, 경쟁사인 오성 쪽에 이야기할 의무가 없고요.”

찬바람이 쌩쌩 불어와 옷을 저미게 하는 말투다.

이게 수아의 진짜 매력이지.

정용재는 이런 매몰찬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를 몰아 붙여간다.

“좀 이상하네요. 오성 측에서 우리의 가격 조정 안건을 어떻게 알아가신 거죠?”

“업계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네요. 그 소문이라는 게 발이라도 달렸나? 어떻게 오성으로 딱 흘러갔을까요? 그것도 가격 조정을 안건 삼은 회의는, 불과 열흘이 채 안 됐는데 말이죠.”

“아니. 그게 그러니까…….”

“혹시 우리 쪽에 사람이라도 심어 두신 건 아니죠?”

“그, 그건 오해입니다.”

“마지막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저를 제하면 총 7명. 그들의 행적과 통화 내역을 추적해 보면 오해가 확실히 풀리겠네요.”

정용재의 뺨을 타고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제 딴엔 나와 담판을 지으러 왔을 텐데, 정작 다른 곳에서 쩔쩔매고 있으니 속으로는 죽을 맛일 거다.

“수아야, 그 이야기는 됐다.”

“하지만 현우 씨!”

“오늘은 그런 이야길 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그치?”

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용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용재 씨. 하던 말, 계속해 보시죠. 반도체 가격 조정이 뭐 어떻단 말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는 목이 타는지 냉수를 급하게 들이켜고 말을 잇는다.

“아시다시피 현재 반도체 가격은 지나치게 낮습니다. 그 때문에 중견 반도체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을 정도지요.”

“흐음, 그래서요?”

“가격을 소폭이라도 상향해서 조정해주신다면 어떨까 싶어서…….”

“듣자 하니 정용재 씨는 반도체 가격을 담합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담합이라는 말이 나오자 정용재는 급히 고갤 내젓는다.

“담합이라니요. 이건 담합이 아니라 가격의 정상화라고 해야 합니다. 현재 반도체 가격은 원가보다도 낮은 수준 아닙니까?”

“낮다는 건 상대적인 겁니다. 오성에게는 낮을지 모르지만, 하이넥스에는 지금이 적정가일 수도 있는 법이죠.”

“그건…….”

“실제로 하이넥스는 3분기 영업이익만 4조 원을 넘겼습니다. 이쯤이면 매우 적정한 가격에 판 것 아닐까요?”

현재 하이넥스에서 생산된 7나노 공정 반도체는 지극히 적정한 마진을 붙여서 팔고 있다.

문제는 그 적정가에 대응하기 위해 경쟁사들은 제 살을 깎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정용재는 입술을 실룩거린다. 그 역시 맨입으론 안 되리란 걸 알고 있었을 거다.

“반도체 가격 정상화를 조건으로 딜을 할까 합니다.”

“흠, 부디 제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면 좋겠군요.”

“충분히 만족하실 만한 조건입니다.”

그의 확신의 찬 눈빛을 보니, 없던 기대가 생겨난다. 이건 뭔가를 얻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자, 오성 황태자의 통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 보실까나.

“흠흠, 오성전자가 쥐고 있던 오성디스플레이 지분 30% 중, 절반을 강현우 회장님께 매각하겠습니다.”

“호오, 디스플레이라.”

내가 반응을 보이자, 정용재는 이거다 싶어서 잽싸게 말을 덧붙인다.

“오성디스플레이에서 제조하는 소형 OLED 기술은 세계 톱티어급입니다. 초경량에 저전력, 색 재현율, 밝기,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지요. 이게 닉스폰 4세대에 탑재된다면…….”

“닉스폰에 필요한 디스플레이 오더를 KG에서 빼먹을 수도 있으니 오성으로선 일석이조라는 거군요.”

“그, 그게.”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제 딴엔 제법 머리를 굴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너무 뻔한 노림수인지라 모른 척하는 게 힘들 정도였다.

“어쨌든 이번 거래로 인해 양사는 서로 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성디스플레이는 오성전자 주식을 5% 가지고 있으니 저희로서도 위험부담을 안고 하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이왕 위험부담을 안으려면 조금 더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예를 들면 오성디스플레이 대신에 오성물산 같은 걸 건다든지요.”

“오성물산!”

지금껏 간신히 유지되던 정용재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진다.

오성물산은 오성그룹 지배구조의 시작이자 끝인 기업이다.

오성물산을 손에 넣게 되면 그 아래에 고구마 줄기처럼 엮인 오성생명, 오성화재, 오성전기, 최종적으로 오성전자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즉, 오성물산을 내놓으라는 소리는 오성그룹 전체를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물산은 좀…….”

말을 하면서도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하다.

난 일부러 과장되게 책상을 탁, 치고서 말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뭐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십니까?”

녀석의 썩어버린 표정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이미 멘탈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나 보다.

“정용재 씨, 닉스가 아마존을 인수했다는 건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 후 닉스 서비스와 아마존의 연계로 세계 유통시장을 장악했잖습니까.”

“그럼 ARM을 290억 달러에, 브로드컴을 360억 달러에 인수했다는 것은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대체 무슨 이야길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당신에게 지금의 현실을 확실히 일깨워드리기 위함입니다.”

녀석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본다. 난 입가에 진한 미소를 걸어두고 말을 계속한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왕관을 썼다고 모든 걸 다 가진 거 같습니까?”

“아,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난 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닉스와 오성의 체급 차이는 어른과 아이 이상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아이가 용을 쓰고 발버둥 쳐도 어른이 손목을 비틀거나 분질러 버리는 건 아주아주 쉬운 일이지요.”

“…….”

“저와 동등하게 거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비를 구걸하든, 차라리 떼를 쓰세요. 그편이 지금의 제겐 더 와 닿을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까, 정용재 씨?”

표정이 굳은 건 정용재뿐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SG그룹의 신성호 회장은 물론이고 신석호나 신용화도 마찬가지였다.

행사장 전체가 고요해진다.

주변의 모두가 정용재의 이어질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두 번 정도 들렸을 때쯤, 정용재가 자리서 벌떡 일어선다.

드륵.

그러고는 다짜고짜 고갤 숙여왔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정용재의 돌발 행동에 행사장 모두가 얼어붙었다.

싫어도 미소 지어 보이기.

자존심을 버리고 고갤 숙이기.

이를 악물고 자비를 구걸하기.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딱 한 번, 그때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다음부터는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된다.

물론. 정용재, 네가 그런 일을 하리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만.

“정확히 뭘 부탁한다는 겁니까?”

“D램 가격을 현재보다 20% 인상해주십시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정용재의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당장 눈이 돌아 주먹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 대신 오성에 7나노 공정 기술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예?”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그에 맞는 충분한 로열티를 받을 것이며, 생산량도 하이넥스가 결정할 것입니다.”

생각도 못 했던 제안이 들어오자, 정용재는 한 박자 늦게 고갤 숙여온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행여나 내가 변심이라도 할까 봐 얼른 가방을 챙겨 들고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정용재가 떠난 뒤.

테이블엔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그러던 중, 더는 못 참겠는지 신용화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강 서방. 방금 정용재 녀석에게 약속했던, 그러니까 반도체 기술 말인데.”

“7나노 공정 기술요?”

“그래, 그거. 그런 중요 기술을 턱턱 내줘도 되는 거야? 그리고 넌 예전부터 오성을 아주 싫어하던 거로 아는데…… 내 착각이었나?”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오성이라는 이름 자체를 혐오한다.

세상 그 누구라도 자신의 등판에 총알을 박아 넣은 곳에는 그렇게 대하리라.

“그렇다면 왜 반도체 기술을 내준 거야? 그게 없으면 오성의 반도체 사업은 천천히 말라 죽었을 거 아냐.”

“당장은 오성이 쓸모 있으니까요.”

신용화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는가 싶더니, 대번에 해답을 찾아낸다.

“혹시 마이크론부터 망하게 하려고?”

“맞습니다. D램 분야는 마이크론만 도산하면 나머진 하이넥스와 오성전자만 남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반도체 가격을 제 입맛에 맞게 조정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이미 7나노 공정 이후 연구가 끝나기도 했고요.”

“아하, 오성은 그때 내치려는 거구나?”

그의 앞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성처럼 쓸 만한 장기 말을 왜 내칩니까? 숨만 쉴 정도로 살려두면 돈은 돈대로 빨아먹고, 독과점 법망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잖습니까.”

신용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크흐,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다. 이 악마 같은 놈.”

“그 정도면 최상급 칭찬이네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사실, 이번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당장 오성전자를 무너뜨린다 해도 오성 일가는 여전히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예전만은 못하겠지만, 두 어깨에 힘을 주고 떵떵거리며.

하지만 오성이 무너질 듯 말 듯 하며 아슬아슬하게 버틴다면 어떨까?

언젠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거라는 일념 하나로 남은 인생을 회사에 갈아 넣을 것이다.

무덤에 파묻히는 바로 그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치지 못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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