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98화
2010년도부터 치러진 스마트폰 전쟁에서는 선도자 격인 애폴과 그에 맞서는 구글. 그리고 빠르게 추격에 성공한 닉스가 최종 승자로 남게 됐다.
모바일OS 3사는 세계 스마트폰 분야의 이익 92%를 독점했으며, 8%를 나머지 스마트폰 업체가 나눠 먹고자 아등바등하는 형국이었다.
시장이 승자 독식 구도로 굳어지자, 기존 스마트폰 사업에 들어왔거나, 혹은 들어오려던 IT·전자업체들은 발 빠르게 다른 먹거리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홀로그램, 클라우드, 증강현실 등등.
이와 같은 첨단 분야에 어마어마한 투자가 몰렸고, 필연적으로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 1위인 오성전자로선 이번 반도체 활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오성그룹의 임원 회의실.
적막한 회의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회의실에 왔으면 회의를 해야지,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습니까? 뭐라도 대응책을 내보세요!”
회의실에 앉아 있는 임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아주 필사적으로 말이다.
이에 울화가 치민 정용재는 손에 쥔 펜을 반으로 쪼개 버리곤 중얼거렸다.
“이 밥버러지 놈들. 내가 이러려고 비싼 월급 주면서 데리고 있는 줄 알아? 대체 앉아서 하는 일이 뭐야?”
회의실이 조용했기에 그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그것이 회사라는 밀림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연구팀.”
연구팀이라는 호명에 한 사내가 잽싸게 고갤 든다.
“예, 연구팀 권희석 전무입니다.”
“반도체 쪽은 어떻게 돼 가는 중인가?”
“현재 D램 부문은 14나노 공정으로 양산하고 있으며, 이번 분기 생산량은…….”
그때 정용재가 말을 잘라먹고 끼어들었다.
“그건 나도 보고 받아서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가 어떻게 되냐는 거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마른침을 꿀떡 삼킨 권 전무가 다시 입을 연다.
“현재 저희가 가진 기술로는 14나노 공정으로 양산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10나노 공정의 연구가 곧 완료되니 그때쯤이면 조금은 숨통이 틜 거 같습니다.”
“하이넥스는 7나노 공정으로 제품을 양산 중이라고 들었는데. 우린 이제 10나노 연구에 들어간다고?”
“불과 1년 전만 해도 저희 연구진이 세계 최상위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닉스가 이 판에 끼어든 후부터,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하이넥스는 20나노 공정에서 단숨에 7나노 공정으로…….”
그때 정용재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더는 듣기 싫다는 그만의 제스처였다.
“우리가 하이넥스보다 연구비용을 얼마나 더 쓰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
“4배 조금 넘게 쓰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평균이 4배고 올해만 떼놓고 보면 8배야. 자그마치 8배! 그렇게 많은 돈을 때려 박았는데 아직도 10나노 언저리에서 골골거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해?”
눈길을 받은 권 전무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닉스는 반도체 연구를 인공지능에 접목해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이고 나발이고. 연구로 못 이기겠으면 하이넥스 기술이라도 빼 올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맞아 아니야?”
“그렇습니다.”
“어휴, 이 답답한 놈들.”
상을 찌푸린 정용재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그곳에는 오성그룹의 컨트롤 타워라고 할 수 있는 전략실의 나숭기 실장이 앉아 있었다.
“나 실장님 이야기 들으셨죠? 이거 어떻게 안 됩니까?”
“닉스 서부연구소의 보안은 업계에서도 유명합니다. 그 때문에 기술을 빼 오겠다는 에이전시가 없을 정도입니다.”
“보안이 아무리 뛰어나도 돈을 퍼주면 하겠다는 사람 하나가 없겠습니까?”
“시설의 보안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닌 듯합니다.”
“어느 정도길래 그럽니까?”
나숭기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닉스 연구소에 침입했던 산업 스파이 중, 멀쩡하게 돌아온 스파이는 극소수라고 합니다.”
“멀쩡하게? 그럼 총이라도 맞는다는 소립니까?”
“총을 맞으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생체 인식 도중에 손가락이나 안구가 녹아버리는 건 흔한 케이스고, 보안구역에 들어갔다가 발목이 잘려나가거나, 심한 경우 감전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례도 있더군요.”
이야길 듣던 정용재는 끔찍한 모습들을 상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기 뭐가 있기에 그렇게까지 한단 말입니까?”
“전 세계 기업들이 닉스의 기술을 노리고 있습니다. 닉스도 그걸 아니까 이런 보안 수준을 유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용재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다른 질문을 내놓는다.
“혹시, 하이넥스 쪽에서 반도체 가격 조정한다는 이야기는 없습니까?”
“내년 초에 조정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정용재의 얼굴이 회의실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밝아졌다.
“이미 중견 반도체 업체들이 쓸려 나갔으니 이제 이 미친 짓을 그만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나 보군요.”
“저, 부회장님. 하이넥스는 가격을 올리는 게 아니라 한 차례 더 인하한다고 합니다.”
정용재의 눈이 부릅떠진다.
“미친놈들! 여기서 더 내린다고요? 확실합니까?”
“하이넥스 내부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망할…….”
최근 오성전자의 반도체 파트는 한계 직전까지 내몰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이엔드 시장은 기술력으로 하이넥스를 이길 수 없었고, 저가 시장은 중국 업체들이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물량을 풀어댔기 때문이다.
중간에 낀 오성전자와 마이크론은 할 수 없이 가격을 원가 이하로 내려, 밑지는 장사로 버티고 있었는데. 여기서 가격을 한 차례 더 내린다는 것은…….
‘닉스는 우리가 끝장날 때까지 치킨게임을 끌고 갈 생각인가.’
사실 하이넥스 측에선 치킨게임도 아니었다.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발열과 집적도면에서 유리했으니, 가격 책정에도 오성이나 마이크론보다 여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당장은 쌓아둔 돈이 있으니 버티겠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땐 정말 위험해진다.’
정용재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눈앞에서 도산이라는 글자가 아른거렸다.
지금까지 오성에서 반도체에 투자한 돈이 얼마던가? 총력을 기울였던 반도체 사업이 무너진다면 제아무리 오성이라 한들 회사가 뿌리째 흔들리고 말리라.
‘이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난데없이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필요하다면 녀석에게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라. 그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란 말이다! IT산업의 유행은 빠르다. 그리고 우리 오성은 그 어떤 기업보다 기술을 따라잡는 데 능하다는 걸 잊지 말거라.
정용재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없었다.
피로가 부른 환청이었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목소리 덕분에 정용재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무언가에 답을 낼 수 있었다.
* * *
-반갑습니다. 닉스의 전 CEO이자, 현 명예회장인 강현우입니다. 축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신 SG그룹의 신성호 회장님께 감사 인사를…….
간단한 축사를 마치고 마이크를 내려놓는다.
알맹이가 없는, 형식적인 축사였으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박수갈채는 물론이고 회장에 참석한 모두가 눈빛만으로 날 뚫어버릴 기세였다.
자리로 돌아가자 신성호 회장까지 손뼉을 치며 날 맞이한다.
“정말 좋은 축사였네.”
“평범한 축사에 이런 박수를 받으니 좀 머쓱합니다.”
“축사는 내용이 중한 게 아니라 누가 축사를 하느냐가 중한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난 최고의 축사를 받은 셈이네. 이 늙은이의 면을 세워주러 여기까지 와주다니, 정말 고마우이.”
“별말씀을요. 사위라면 응당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네, 좋아.”
껄껄거리는 신성호 회장의 표정에서 만족스러움이 느껴진다.
신성호 회장과 대화가 끊어지자, 잽싸게 신용화가 치고 들어온다.
“이야, 강 서방. 인기가 슈퍼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돈데?”
“여기서 슈퍼스타가 왜 나옵니까?”
“주변을 한 번 보고 이야기해.”
그의 말대로 고갤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장중의 모든 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더라니.”
“이제야 인기가 실감 되냐?”
신용화는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쿡쿡대며 말을 계속했다.
“다들 눈치 게임 중일 거다. 너와 어떻게든 말 한 번 섞어보려고 안달이 났을 텐데 아버지가 같이 앉아 있으니 어쩌진 못하겠고. 흐흐, 아마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벌떼처럼 널 잡으러 갈걸?”
“저랑 만나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저는 이제 CEO도 아닌데요.”
“네가 CEO든 아니든 상관없어. 지금 분위기만 보면, 너랑 같이 찍은 사진 한 장만 나와도 어지간한 기업은 그날부로 상한가 확정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때였다.
뒤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십니까, 신 회장님.”
뒤를 돌아보자, 거구의 노인이 테이블에 다가와 있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언제 봤더라…… 아, 진한그룹의 한국훈 회장?
진한그룹은 육상, 항공, 해운의 물류 수송사업과 더불어 관광사업으로 세를 불린 기업이다.
한국훈 회장의 얼굴은 경제면보다는 주로 사회면에서 봤던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
“오랜만이요, 한 회장. 이게 얼마 만이지?”
“신 회장님을 작년 이맘때쯤 뵀던 거 같은데…….”
“재작년이겠지. 그간 모임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만 오늘은 참석했구려?”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한국훈 회장은 얼굴의 미소를 꽉 부여잡고 말을 받는다.
“그땐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불참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흠, 그러든가 말든가.”
같은 재벌 회장이라 해도 엄연히 급 차이가 있다.
SG그룹은 자산총액 200조 원이 넘는 재계 3위 재벌가지만, 진한그룹은 재계 25위에 자산총액 10조 원을 간신히 턱걸이 중이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의 연배는 비슷해 보였으나 한국훈 회장 쪽이 바짝 숙이고 있었다.
한국훈 회장은 자리에 앉자, 그제야 한 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냉수를 들이켠다.
난 가만히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국훈 회장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한 회장님은 합석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유지해 온 그의 미소 가면이 벗겨진다. 분노와 당황이 반쯤 섞인 표정으로 날 쏘아본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합석이 안 될 거 같다고 했습니다.”
“허, 이것 참. 어이가 없어서. 이보세요, 강현우 씨, 우리 진한그룹이 SG그룹보다는 못 할지라도 엄연히 국내 20위권의 재벌갑니다. 닉스가 요즘 잘나간다고 이리 안하무인 격으로 나오나 본데…….”
난 그의 말을 도중에 잘라 먹고 말했다.
“아, 잠시만요.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오해? 무슨 오해란 말이요?”
“제가 합석이 안 된다고 했던 이유는 한 회장님 뒤에 기다리는 분이 더 급해 보여서 그랬습니다.”
“누가 있기에…….”
한국훈 회장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궁둥이를 뗀다.
그곳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의 사내가 서 있었다.
재계 순위 1위이자, 한국을 사실상 움켜쥔 오성그룹의 황태자 정용재였다.
“계속 앉아 계시려면, 마음대로 하시죠.”
“아, 아닙니다. 제가 일어나야지요. 하하, 어서 앉으시죠.”
그는 잽싸게 일어서더니,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 회장이 떠난 뒤. 정용재는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앉은 곳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장내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어찌나 조용하던지, 옆에서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다. 그런 가운데 천천히 정용재의 입이 열린다.
“강현우 회장님, 합석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