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97화 (196/206)

기적의 IT 재벌 197화

쪼르륵.

선홍색 와인이 잔을 가득 메운다.

게걸스러운 와인은 잔을 채우는 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잔을 비집고 나와 테이블보를 적시기 시작했다.

“매형, 넘칩니다.”

“응? 뭐가? 어, 어? 어이쿠.”

황급히 병을 세워보지만, 그땐 이미 와인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아고, 이 아까운 것을.”

매형은 황망한 얼굴로 병을 쳐다보며 말했다.

“현우, 네가 쓸데없는 농담 하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

“농담이 아닙니다.”

“뭐?”

“매형이 닉스를 맡아주세요.”

와인을 쏟았을 때 표정이 예술 점수 6점쯤 된다면, 지금은 10점 만점을 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어이, 강현우. 벌써 취하기라도 했어?”

“제가 술이 약한 편이긴 하지만 반 잔으로 취할 정도는 아닙니다.”

“취한 것도 아닌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길 꺼낸 거야? 그것도 이리 갑작스럽게…….”

매형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하다가 말고 한숨을 푹 내쉰다.

“너, 진심이구나.”

“농담인 줄 아셨어요?”

“아니, 네가 그렇게 고약한 농담을 할 애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 다만…… 좀 당혹스럽다고 할까.”

“생각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적절한 타이밍이 안 나와서 미루고 있던 것뿐이죠. 그리고 매형이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할 필요성도 있고요.”

“도망이라니.”

“은퇴 계획 짜고 계신다면서요?”

매형은 혼자서 꿀을 훔쳐먹다가 걸린 마냥 얼굴이 굳어버린다.

“그걸 어디서 들었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최측근에게 들었습니다.”

“현경 씨가 말한 모양이구나.”

난 음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매형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터져 나온다.

“어휴, 내가 이럴까 봐 비밀로 하라고 했었는데…….”

“제가 매형 혼자 도망가게 내버려 둘 거 같습니까?”

“현우야, 좀 봐주라. 넌 아직 쌩쌩한 현역이지만 난 이제 은퇴할 나이라고.”

“아직 오십 줄에도 못 들었으면서 은퇴할 나이라뇨?”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

“흐음?”

눈치를 살피던 매형은 갑자기 헛기침해대며 이야길 계속한다.

“쿨럭, 눈도 침침하고…… 아, 그래. 요즘은 자꾸 깜빡깜빡하는 게 이러다 큰일을 내겠더라.”

“상관없습니다. 그냥 자리만 지켜주시면 돼요.”

“그러다가 내가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CEO라고 할 일이 많은 건 아닙니다. 투자나 금융 쪽은 엘런이, 모바일은 브릭과 스칼릿, 전기차와 배터리는 손만호 사장이. 그 외에 개별 파트도 부서의 팀장들이 전담해서 처리하는 시스템이 닉스에 정착돼 있습니다.”

매형은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냐?’라는 표정으로 날 째려보고 있다.

“아무튼, 지금 닉스의 CEO 자리는 사실상 얼굴마담이나 다름없습니다.”

“얼굴마담이면 네가 계속해도 상관없잖아?”

“저도 그러고 싶지만 최근 들어 얼굴마담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그들을 전부 만나주려고 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실제로 닉스VR 공개 이후, 닉스로 정·재계 인사들의 미팅 요청이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기업가들이야 내가 편할 때 만나주면 그만이지만, 그들 중엔 각국의 주요 인사는 물론이고 정상들까지 포함돼 있었기에 만나는 순번까지 급을 따져야 해서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 귀찮은 일들을 전부 내게 떠넘기시겠다?”

“귀찮은 일이이라뇨. 이건 아주 미묘하면서도 정치적인 일입니다. 이 분야는 매형이 전문 아닙니까?”

“말은 잘해요.”

“말이라도 잘해야죠.”

다시 술잔이 돈다.

한 잔을 받으면 한 잔을 따라주고, 한 잔을 넘기면 다시 한 잔을 받는다.

거슬리기만 했던 와인의 향이 익숙해질 때쯤, 매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교통정리까지는 해주마.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그 후에는 뜯어말려도 은퇴할 테니 네가 다시 받든, 아니면 다른 적임자를 찾든 해. 알겠어?”

난 대답을 하는 대신 술병을 들었다.

“잔이 비셨네요. 다시 한 잔 받으시죠.”

“또 적당히 넘어가려 하지 마. 이젠 안 통한다.”

매형은 말을 그렇게 했다만, 착실히 잔을 들어 술을 받는다. 그 후에도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답답했는지 다시 말을 꺼냈다.

“닉스의 상징인 네가 빠지면 직원들이 동요할 거다. 그리고 주가에 타격이 있을 거란 것도 알고 있지? 여차하면 시가총액 1조 달러가 다시 무너질지도 몰라.”

“주가에 별다른 영향은 없을 겁니다. 명예 회장이라는 그럴싸한 직책을 준비해 뒀으니까요.”

“월가의 너구리들이 그걸로 넘어가 줄까? 당장 버핏 회장부터 멱살을 쥐러 올 텐데.”

닉스 주식을 전량 매각했던 버크셔 헤서웨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닉스 주식을 매입했다. 그렇게 끌어모은 주식이 얼마나 많던지 지금은 2대 주주 자리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게 부족하다면 인터뷰 한 방 내주면 됩니다. ‘닉스의 대니얼 강은 CEO 자리에서 사임 후, 인공지능과 첨단기술 연구에 집중하려 한다’라고 말이죠.”

“햐, 이 여우 같은 놈.”

“칭찬 감사합니다.”

그러던 중, 따르던 와인이 잔을 다 채우지 못하고 딱 끊어진다.

“아, 이런.”

단 한마디지만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아까 쏟은 게 아까우시겠습니다.”

“시끄러워. 다 너 때문이잖아.”

매형은 잽싸게 병을 빼앗아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잔에 쏟아 낸다. 오래된 와인이라 바닥에 침전물이 많을 텐데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그것보다 사임을 생각한 진짜 이유가 뭐야?”

“조용히 연구나 해볼 생각입니다.”

“인공지능?”

“그런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연구입니다.”

* * *

지난 12월 1일. 혜성처럼 나타나 닉스를 설립하고, 세계 최고기업 반열에 올려둔 CEO 대니얼 강이 사임 의사를 표했다.

닉스의 후임 CEO로는 창립 멤버이자 현 닉스의 인수·합병을 담당하던 최고법률책임자인 박준오 부사장이 선임됐다.

이에 증권가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으며, 닉스의 주가가 장중 12%나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니얼 강이 닉스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 아닌, 명예 회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태블릿을 조작해 뉴스란에서 증권란으로 페이지로 넘긴다.

CEO 변경 소식 발표 때부터 급격하게 내리꽂혔던 주가는 어제부터 슬금슬금 고갤 쳐들다가, 지금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고 있었다.

“나쁘지 않네.”

이번은 월가에서 매주 날아오는 소식지를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증권가 찌라시와 같은 정보 창구였다.

[대니얼 강 회장은 CEO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닉스 의결권 60% 이상의 쥔, 사실상 최대 결정권자다. 그 때문에 CEO가 교체됐음에도 닉스 내부에는 별다른 위기의식이 감지되지 않았다.]

[닉스의 신임 CEO인 준오 박은 법률가 출신으로 모토로라의 CEO를 역임. 그는 이미 검증된 인사로써 대니얼 강이 디자인과 기술에 집중하고, 그가 경영 전반을 이끈다면 지금의 닉스보다 더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닉스 CEO 교체에 대해, 월가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이다. 특히 매형이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 덕분인지, 닉스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분석까지 있었다.

소식지를 훑다 보니, 어느새 차가 멈춰섰다.

목적지는 한국기업인연합의 모임이 벌어지는 서울 유진호텔의 대회의실이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말쑥한 사내 하나가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는 SG그룹의 실세인 신용화였다.

“오, 강 대표! 아니지, 이젠 강 회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직 회장이라는 말이 귀에 안 익는다. 이것도 차차 적응해 나가겠지.

“신용화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SG그룹 후계자 자리 꿰찼다면서요?”

“발표만 안 했다뿐이지, 원래 이 자린 내 거였어.”

그는 내 앞에 서더니 성큼성큼 걸으며 말을 계속한다.

“그보다, 오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좀 늦었네.”

“일부러 천천히 왔습니다. 오늘 행사는 딱히 제가 시작부터 참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사를 주최한 곳은 한국기업인연합, 줄여서 한기련이라 불리는 곳이다. 말이 기업인 연합이지 실제로는 한국 재벌가의 모임이다.

닉스는 한국 기업도 아니고, 지금의 난 기업인도 아니니 표면상으론 연결 고리가 없는 셈이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강 서방이 안 오니까 아버지 얼굴이 점점 시커멓게 삭아가더라.”

“제가 늦게 참석하는 것과 신성호 회장님 얼굴색의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신용화는 자신의 목덜미를 주물러대며 말을 잇는다.

“아버지는 이번 행사에 네가 참석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어. 우리 사위가, 우리 사위가, 하면서 말이다. 아버지 어깨에 그리 힘이 들어간 건 내가 머리에 털 나고서 처음 봤을 정도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된다고…….”

“자랑거리가 되고 말고, 너랑 만나는 게 대통령 만나는 거보다 힘들다는 말도 있다니까.”

“에이, 너무 오버입니다.”

“과장이 아니라, 업계에선 진짜 그런 말이 돈다니까. 아버지가 괜히 전경련과 같은 날 행사 일정을 잡은 게 아니야.”

전국경영인연합, 줄여서 전경련은 재벌 모임의 원조 격인 단체다. 재계 1위, 2위인 오성그룹과 대현그룹을 주축으로 굴러가는 모임이기에 SG그룹이 중심인 한기련보다 더 많은 단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전경련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는데…… 네가 안 오니 얼굴이 삭아가실 수밖에.”

“제가 도착하면 신 회장님의 얼굴이 다시 펴지는 겁니까?”

“펴지기만 하겠어? 너를 얼싸안고 행사장을 한 바퀴 도실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회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살짝 다물어진 입술과 전체적으로 차가운 분위기. 아름답지만 먼저 다가가기 힘든 인상의 여인이다.

“어, 수아야?”

나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그녀.

얼어 있던 꽃이 단숨에 녹아내린 듯하다.

“현우 씨, 오셨어요?”

“넌 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요. 완전 MT 첫날 같더라니까요.”

“그 정도였어?”

“오늘 현우 씨가 온다고 해서 전경련 쪽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주인공이 안 오니까…… 어떤지 아시겠죠?”

어째, 안을 안 봤는데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때 잽싸게 신용화가 끼어든다.

“잡담할 시간 없어. 빨리 들어가자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해 있었다.

주변을 쓱 둘러본다. 빈자리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찬 행사장이 인상적이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구석 자리에는 임시 테이블까지 설치돼 있었다.

“사위, 왔는가!”

SG그룹의 신성호 회장이다.

그는 버선발로 뛰어와 우릴 맞이한다.

“안녕하십니까, 신성호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회장님이야. 자네,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기로 했잖는가?”

신성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장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그는 성량이 우렁차기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목소릴 더 키운 듯했다.

“마침 전반 행사가 딱 끝나고 식사 시간이었네. 일단 밥부터 먹게나.”

다른 테이블 위엔 빈 접시들만 가득하다.

아무래도 내가 없어서 행사를 이어가지 못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이쯤 되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늦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좋은 날 무슨 사과인가? 앉아서 식사부터 하게나.”

옆에서 이야길 듣고 있던 신용화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조금 진정하심이…….”

“이놈아, 오늘 같은 날은 흥분도 하고 그러는 거야. 우리 SG그룹이 한기련을 설립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참석한 적이 있더냐? 크하하하!”

“…….”

호탕하게 웃던 신성호 회장이 갑자기 목소릴 낮춘다.

“진짜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우측 제일 앞 좌석을 보아라, 누가 왔는지.”

“우측이라면…….”

그곳엔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는 오성전자의 부회장인 정용재였다.

“아니, 오성이 왜 전경련 쪽에 안 가고 여기로 왔단 말입니까?”

“크흐흐, 왜긴 왜겠느냐?”

신성호 회장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날 쳐다본다. 그는 장난을 준비해둔 악동과 같은 미소를 짓는다.

“오성도 그만큼 똥줄이 탔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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