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95화
이곳은 미국 ABU 방송국.
부채꼴의 무대 위로 조명이 쏘아지고 그 뒤로는 광활한 스크린이 자리 잡고 있다.
현란하게 번쩍이던 스크린이 절반으로 쩍 갈라지고, 그 사이로 익살스러운 표정의 사내와 휠체어를 탄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이 팰런의 데일리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스튜디오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쇼의 호스트인 팰런은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진행을 이어간다.
“먼저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하도록 하죠. 우주 비행사이자,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영웅. 에드워드 밀러 씨입니다.”
백발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밀러가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밀러 씨.”
“반갑습니다, 제이 팰런.”
밀러는 휠체어에 앉은 채였기에 팰런이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와우. 와우.”
“왜 그러시죠?”
“우주 영웅과 함께 제이 팰런 쇼를 진행하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습니다.”
밀러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영웅이라니, 제겐 너무 과분한 칭호군요.”
“과분하다니요. 저는 어릴 적 꿈이 우주 비행사였습니다. 제 방을 밀러 씨 포스터를 도배해 둘 정도였답니다.”
“어떤 포스터였나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배경으로 밀러 씨가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었죠. 아직도 기억나네요.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문구. 캬! 그런 말을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밀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생각해낸 게 아니라 준비를 해서 간 거죠. 자그마치 한 달을 고민했을 정도니까요. 참 웃긴 일이지요?”
“웃기다니요. 저라도 고민했을 겁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여정 아니었습니까.”
“다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은퇴해서 일기나 끄적이는 늙은이일 뿐이니까요.”
“그게 보통 일기가 아닌, 우주 일기 아닙니까? 아차, 내 정신 좀 봐.”
팰런은 테이블에 올려둔 책을 집어 든다.
그 책은 에드워드 밀러의 자서전인 ‘우주를 만나다.’였다.
“여기에 사인 한번 해주시죠.”
“너무 티 나게 홍보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요즘 시청자들은 예리해서 어설프게 하는 거보다 대놓고 하는 게 더 낫답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팰런의 넉살 좋은 입담에 객석에서 웃음이 빵 터진다.
픽 웃은 밀러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제이 팰런의 데일리쇼에 초대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음…… 밀러 씨. 죄송하지만 초대한 건 제가 아닙니다.”
“예?”
“사실, 저도 오늘은 호스트가 아니라 게스트거든요.”
밀러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럼 누가 저를 초대했단 말입니까?”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핫한 사나이, 대니얼 강이 오늘의 호스트입니다.”
“대니얼 강? 제가 아는 그, 닉스의 CEO?”
“예, 그 대니얼이 맞습니다.”
밀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는 닉스의 CEO와 일면식이 없습니다.”
“그럼 초대장이 잘못 온 걸까요? 혹시 아는 분 중에 성이 밀러고 달에 다녀온 분이 또 있습니까?”
“저희 형이 NASA에 근무하긴 했다만 달에는 못 가봤군요.”
밀러의 너스레에 스튜디오에는 다시 한번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 초대장은 제대로 도착한 것 같으니 이어서 선물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선물은 대니얼이 보내온 건데…… 커다란 상자네요.”
“갑자기 웬 선물입니까? 거기다 대니얼은 어디 있습니까? 그가 호스트라면서요?”
“안타깝지만 오늘은 저도 게스트라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허?”
“선물을 공개하겠습니다. 밀러 씨, 준비되셨습니까?”
밀러도 이제 뭔가를 알아보려는 걸 포기했는지, 순순히 고갤 끄덕인다.
잽싸게 상자를 개봉한 팰런이 떠든다.
“오호, 바이크 헬멧 같은 게 들었네요. 이름은 닉스VR.”
“VR이면 눈앞에 영상을 쏴서 가상현실을 보여주는 기술을 말하는 겁니까?”
“오호, 잘 알고 계시군요.”
“NASA에서 우주 적응 훈련을 할 때 쓰곤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착실히 포장을 벗겨냈다. 말이 포장이지 충격을 방지하는 완충재가 전부였다.
팰런이 상자에 동봉된 쪽지를 발견하고 말했다.
“여기 설명서가 있군요. 사용법은…… 몸을 편하게 기대고 머리에 쓴다. 와우, 엄청 간단하네요. 준비되셨습니까, 밀러 씨?”
“이걸 써야 하는 겁니까?”
“제 생각엔 화상통화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닐까요?”
“이 헬멧으로요?”
“아마도요.”
두 사람 모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방송은 방송이었기에 팰런이 먼저 헬멧을 집어 들었다.
“대니얼이 보내준 선물인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써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쓰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동시에 하나, 둘, 셋.”
기기를 쓰고 10초 정도가 지나자 두 사람의 몸이 축 늘어졌다.
* * *
“어? 어? 이게 뭐죠? 제가 어디로 온 걸까요? 여러분? PD님? 보고 계신가요?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죠?”
팰런은 당황했는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난 그의 뒤로 다가가 슬그머니 어깨에 손을 올려본다.
“으악!”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는 팰런.
“대니얼?”
“반갑습니다, 제이. 2년 만이던가요?”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왔습니까? 아니지, 그보다 여긴 어디죠? 못 보던 기계장치들이 많은 것이 병원은 아닌 거 같고, 제가 그 헬멧을…….”
“헬멧이 아니라 닉스VR입니다.”
“예, 좋아요. 헬멧이든 닉스VR이든, 아무튼 그걸 썼어요. 그러고는 이곳으로 실려 왔군요. 제가 기절이라도 했었나요?”
“제이, 당신은 기절한 게 아니라 접속한 겁니다. 닉스의 새로운 가상현실 서비스인 유토피아로요.”
“유토피아?”
“예, 유토피아.”
팰런은 눈을 반복해서 껌뻑거린다. 이곳이 가상현실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은, 저보다 이분이 더 잘 알고 계실 거 같군요.”
난 시선을 뒤편의 노인에게로 돌렸다. 그는 아까부터 벽면에 달린 기계장치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밀러 씨.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를 초대한 닉스의 CEO시군요.”
“편하게 대니얼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보다 이곳이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여긴…… NASA의 신형 우주왕복선 내부군요. 우리를 여기까지 어떻게 데리고 온 겁니까?”
밀러 역시 이곳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 그것을 단번에 납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창가 쪽으로 손짓했다.
“저길 한번 보시면 의문이 풀릴지도 모르겠군요.”
“저기에 뭐가 있단 말입…… 헙!”
말문이 막힌 밀러가 날 쳐다본다. 뒤늦게 다가온 팰런도 창가를 보고서 비명을 질러댄다.
“오, 이런 맙소사. 저긴 지구잖아요? 그렇다면 여긴 우주? 우리, 진짜 우주에 와 있는 겁니까?”
두 사람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한다.
“이곳이 가상현실이 아니라면 제가 방송국에서 여러분을 기절시키고 우주로 끌고 온 거겠군요. 어느 쪽이 더 현실성이 있을까요?”
전자도 비현실적이지만 후자는 아예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일은 시일도 시일이지만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멍하니 지구를 바라보던 밀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아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대니얼,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밀러가 내 손을 꽉 움켜쥔다.
그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직 놀라시긴 이릅니다. 이왕 우주로 나왔으니, 착륙도 해봐야겠죠?”
“설마. 달에 착륙도 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니까요.”
벽면에 있는 터치스크린을 조작한다. 그러자 우주선의 속도가 빨라지며 궤도가 점차 달과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밖을 부엉이처럼 커진 눈으로 살핀다. 지금 이 순간을 눈에 새겨 넣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쿵.
우주왕복선이 안정적으로 달 표면에 내리 앉았다.
모든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두 사람. 먼저 팰런이 입을 열린다.
“저기…… 밀러 씨. VR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현실과 구분이 힘든 기술입니까?”
“제가 NASA에서 체험한 VR기술은 눈앞에 영상을 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질적이고 여러모로 불완전한 기술이었죠.”
“그렇다는 것은…….”
“이건 그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형태의 기술로 보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대니얼이 마법을 부린 거겠지요.”
두 사람이 날 돌아본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백 년 전만 해도 그 누가 달에 직접 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과학이든 뭐든, 중요한 건 제가 어릴 적부터 바랐던 꿈이 드디어 이뤄지게 됐다는 겁니다. 대니얼, 정말 고맙습니다. 당장 키스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예요.”
“음…… 제이. 미안하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여자를 좋아해요.”
“농담입니다.”
잔뜩 흥분한 팰런과는 반대로 밀러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밀러 씨.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혹시 멀미라도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단지, 제가 내릴 수 없으니 아쉬워서 그럽니다. 내 두 다리만 멀쩡했어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난 밀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힘차게 그를 휠체어에서 잡아당긴다.
“어, 어, 어?”
주춤거리던 밀러는 반사적으로 발을 바닥에 내디뎠는데, 반동으로 몇 걸음을 앞으로 걸어가게 됐다.
“이, 이럴 수가. 오, 오, 신이시여!”
그는 이리저리 걸어도 보고, 달려도 보더니, 아이처럼 제자리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내 다리가 움직이다니. 믿을 수 없어, 이런, 이런 일이!”
“밀러 씨, 달에 내릴 수 있겠습니까?”
“뜯어말려도 내릴 겁니다. 지금 이 컨디션이라면 달까지 헤엄쳐서도 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내릴 준비를 하겠습니다.”
다시 터치스크린을 조작한다.
그러자 사람은 물론이고 실내의 모든 물체가 살짝씩 떠올랐다.
“오, 오우. 뜬다, 떠! 중력이 느껴집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하군요. 이젠 정말 우주라는 실감이 납니다.”
팰런은 양팔을 파닥대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그와는 반대로 밀러는 경험자답게 중력에 빠르게 적응한 모습이다.
이어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왕복선의 출입구가 열린다.
가장 먼저 출구로 다가간 것은 팰런이었다.
“제이, 잠시만 기다리세요.”
“왜 그러시죠?”
“이번은 밀러 씨에게 양보하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아하!”
팰런은 제 머리를 콩 쥐어박는다.
“하하, 제가 경솔했군요. 밀러 씨, 먼저 내려가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밀러는 눈빛으로 내게도 동의를 구한다.
내가 고갤 끄덕이고 물러서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출입구 앞에 섰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선다.
한 걸음.
그가 내딛음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의 쭈글쭈글하던 주름이 펴지고 검버섯이 사라졌다. 동시에 굽어 있던 어깨가 쭉 뻗어진다.
다시 한 걸음.
이번은 피부가 맑아지고 혈색이 좋아진다.
희끗희끗했던 흰 머리카락도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달과의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겼을 땐.
그가 현역 우주 비행사 시절이던, 30대의 에드워드 밀러로 완전하게 돌아온 뒤였다.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팰런은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비명을 내질렀으리라.
젊은 에드워드 밀러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달에 착지한 감촉을 음미하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서 엄숙하지만,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 될 것이다.”
80대 노인인 에드워드 밀러가 30대의 모습으로 달에 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도착한 것과 비견 될 정도의 위대한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발걸음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