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94화
하늘을 틀어막은 웅장한 하얀 산맥들.
그를 배경 삼아 높게 솟아오른 수목과 사파이어색의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아…….”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그 가슴 떨리는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감탄이 나오는 절경에 한 번 놀라고,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란다.
한참이나 넋을 놓고 주변을 둘러본 뒤, 자연스럽게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을 떼는 동시에 온몸에서 소름이 쫙 돋아난다.
보는 것, 걷는 것, 숨 쉬는 것.
심지어는 산천초목이 내뿜는 풀 내음까지도 너무 생생했다. 현실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말이다.
“이게 가상현실이라고? 정말이지…… 믿기지 않아.”
기껏해야 기존의 고글형 VR기기의 개선판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결과물을 접해 보니, 이건 또 다른 세계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비유였다.
조심스럽게 호숫가로 다가간다.
산맥 옆으로 흐르는 호수는 손을 담그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맑고 깨끗해 보였다.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조그만 간이 의자와 근사한 낚싯대 하나가 놓여있다.
낚싯대를 집어 들자, 처음으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나타났다.
[훈련을 시작합니다.]
[물고기를 낚아보세요! 0/5]
호수에 비친 메시지들.
혼란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곳이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에 쥔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씬,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와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이 일렁거린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한 뼘 정도 크기의 작은 구체가 삐져나온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구체의 중앙에 달린 눈이 깜빡거린다.
아무래도 저 눈이 카메라 역할을 대신하는 듯한데…… 비주얼이 눈알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라 꺼림칙하다.
“네가…… 씬?”
-그렇습니다.
“꼭 그런 모양을 하고 나타나야겠냐?”
-이 모습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시커먼 눈알이 나를 향한다.
그럴수록 알맹이가 도드라지는 것이 이쯤 되면 꺼림칙한 게 아니라 혐오스러울 정도다.
“사람들은 이왕이면 예쁘고 아름다운 걸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몰라?”
-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아름다운 걸 선호하는 사람보다는 꾸미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선호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지?”
-SNS입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러나온다.
“SNS는 자신의 보여주고픈 모습만 보이는 가식적인 공간이야. 그런 곳에서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다고.”
-사용자들이 거짓을 말한 겁니까?
“무조건 거짓말이라기보단,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골랐다.
“주변을 의식해서 과도하게 자신을 꾸미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인 셈이지. 그게 아니면 진짜 가식이거나.”
눈알이 사선으로 기울어진다.
마치, 고갤 갸웃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역시 인간의 감정은 복잡하군요.
“아무튼, 이런 눈알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아주 드물다는 건 확실해.”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나을까요?
“이왕이면 사람들이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모습이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다시 허공이 일렁인다.
그곳으로 눈알이 들어가고, 잠시 후 새하얀 나비 하나가 빠져나온다.
“훨씬 낫군.”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나비는 팔락팔락 날아서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것보다 왜 하필이면 낚시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다기보단, 이왕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이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그런 컨텐츠면 좋겠다는 말이지. 낚시는 현실에서도 할 수 있잖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녀석은 내 어깨에서 내려와 빙글빙글 돌더니, 다시 내 손 위에 착지했다.
나비의 모습에 눈길을 준 찰나에, 주변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헙!”
거대한 산맥에 딸린 호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대신 나타난 것은 사각의 철장 안이었다.
“네게 걸었다. 꼭 이겨 줘!”
“K.O 시켜 버리라고!”
“화끈한 경기를 부탁해요!”
격투기장에서나 볼법한 철제 링.
구경꾼들의 외침 탓에 귀가 따가울 정도다.
그들은 잔뜩 흥분했는지 고함을 질러대는 건 예사였고 몇몇은 철장에 기어오르는 이도 있었다.
“이건 대체…….”
웅장한 자연경관이 1초도 안 돼서 격투장으로 변하자 시각과 청각, 모두가 적응이 안 된다.
그러던 차에 이번은 더 가까운 곳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어딜 보는 거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갤 돌린다.
그곳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인이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대한 가슴과 노출이 심한 붉은 옷차림, 그리고 그녀를 상징하는 무기인 부채.
“시라누이?”
“그래요. 오늘은 결판을 짓겠습니다.”
상대는 대전 격투 게임에 나오는 유명한 캐릭터다.
그 말인즉, 지금 서 있는 링은 격투장이고, 나는 눈앞의 여인과 격투를 펼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씬, 이 자식이. 낚시가 싫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격투 게임에 밀어 넣어?
항의할 새도 없었다.
바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3! 2! 1!
파이트!
“이런 미친!”
욕지기와 동시에 본능적으로 발을 뒤로 물린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철장 안.
도망칠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갑니다!”
그녀의 손에는 살상력이라곤 없어 보이는 나무 부채가 들려 있다. 그러나 난 알고 있었다. 저 부채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
피하기는 늦었기에 반사적으로 가드를 올린다.
틱.
뭔가 막히는 소리가 나며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다.
그제야 이것이 진짜 격투가 아닌, 게임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가상의 전투니까 맞아도 고통은 없지 않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는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간다.
부채로 우측을 찌른 후, 연속으로 하단을 걸고, 마지막으로는 화염을 쏘아붙인다.
기세 좋은 연속 공격이었으나 단 한 번도 방어를 뚫어내지 못했다.
“칫, 잘 막으셨군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오락실에 들락거리던 나다. 기초적인 연속 공격은 뻔히 꿰뚫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단 할 만하잖아?
방어는 얼추 되는 듯하니, 빈틈을 찔러서 공격 타이밍만 잡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법이네요. 그렇다면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날다람쥐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아름답게 뻗은 다리 사이로 스크린상으로는 볼 수 없었던 새하얀 무언가가 시선을 강탈한다.
“호오.”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요?”
그녀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아래로 쇄도한다.
틱.
이번 공격 역시 간단하게 막아 흘린다.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라졌다?”
“반응이 느리군요.”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급히 몸을 틀었으나 가드를 올릴 새도 없었다.
공중에서 시작된 공격은 정수리에 한방, 어깻죽지에 한 방, 가슴팍에 부채를 찔러 넣는 것까지 이어진다.
탁, 탁, 푹!
타격감 한 번 찰지다.
다행이라면 실컷 두들겨 맞았음에도 통증은 미미했다는 거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연속 타격기에 맞았다면 뼈가 분질러지는 건 예사고, 생사가 오갔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없다면 할 만해. 흐름만 잘 잡는다면…….
문제는 시야가 적응이 안 된다는 거다.
기존의 모니터로 보던 격투 게임의 시야와 실제로 상대를 코앞에 둔 시야는 천지 차이였다.
“히얍!”
공격은 계속 이어진다.
앞뒤는 물론이고 공중에서까지 두들겨 대니 눈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큭.”
여유가 없어진 탓인지 시야가 더 좁아진다.
위협적인 부채나 찔러오는 주먹은 물론이고, 시종일관 시선을 빼앗던 커다란 가슴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서 있는 게 용할 정도군요.”
상대는 공격을 이어 나가면서도 여유가 넘친다.
그녀의 연속 공격 패턴은 눈에 익었다.
당연하지. 어릴 적부터 오락실에서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서 봤을 테니까. 문제는 알아도 내 몸이 거기에 대응을 못 한다는 거다.
“샌드백을 치는 것보다 시시하네요. 하품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대로 한 번도 못 때리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건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초보와 고수 간의 대결이라도 퍼펙트게임은 자존심 상하는 법.
난 가드를 올리고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지금!”
야심 차게 뻗은 스트레이트가 허공을 가른다.
그녀의 신형은 흐릿해지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딜 보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
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나 이번은 아까와 달랐다.
스트레이트는 피할 걸 예상하고 내지른 페이크.
진짜는 그 후에 이어지는 훅이다.
빡!
호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턱이 돌아간다.
“어떠냐!”
단 한 방을 성공시켰음에도 비틀거리는 걸 보니, 제대로 들어갔나 보다.
“감 잡았어. 이제부터가 반격이…… 어, 어?”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알고 보니 비틀거리는 건 상대가 아니라 나였다.
때린 건 난데, 왜 이러지?
억지로 자세를 유지하려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뒷골이 찌르르하고 아려온다.
시야가 땅과 가까워진다.
“이, 이런.”
쿵.
눈앞이 핑 돌며 흐려지는 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 *
[뉴런 시냅스 어긋남 수치 초과.]
[체험자의 안정을 위해 체험을 종료합니다.]
시야가 반전된다.
눈앞에 있던 철제 링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기존의 연구소의 풍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웁, 우웁!”
억지로 헬멧을 집어 빼고 몸을 일으킨다.
거의 동시에 입에서 토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켁, 켁. 망할.”
이어지는 건 숙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레벨의 두통이었다. 동시에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바닥이 일렁이고 위가 뒤집힐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위액까지 싹 비워낸 후에야 조금은 진정된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내게, 드론이 슬그머니 날아온다.
-체험은 어떠셨습니까?
“네가 보기엔 어땠을 거 같냐? 응?”
다가오던 드론이 멈칫한다.
-VR시스템과 인체의 시냅스 일치화가 불완전합니다. 그 때문에 움직임이 많으면 어지럼증이나 멀미와 같은 부작용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낚시같이 정적인 체험을 시켰구나.”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격투 게임을 시키는 게 어디 있어? 하다못해 연습이라도 하고 밀어 넣든가.”
-격투 게임을 선정한 이유는 마스터 강에게 가장 익숙한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연습도 없이 바로 실전을 시켜?”
-연습을 먼저 진행했다면, 연습만 하다가 체험이 종료됐을 겁니다.
쳇, 틀린 말이 없어서 반박할 수가 없다.
난 녀석을 한 번 노려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중에 손이 찌르르하고 저린 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펀치를 적중시켰던, 그 오른손이었다.
“시각적인 느낌은 현실과 구분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완벽했어. 통각은 억제하긴 했다만, 펀치가 꽂혔을 때의 그 감각…… 너무 생생해서 잊히지 않을 정도야.”
손을 쥐락펴락하는 내게 씬이 말했다.
-VR시스템의 모든 감각은 허상입니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이 전부 가짜란 말이야?”
-뉴런 스냅스에 신호가 들어갔을 뿐, 실제로 인체가 충격을 가하거나 받은 것은 없습니다.
어디서 본 것도 같다.
불이 붙었다고 상상했더니, 실제로 피부에 화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말이다.
난 드론의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부작용 개선은 가능한 거지?”
-어지럼증이나 기타 문제에 관해서는 인체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VR게임 테스터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게임 테스터라…….”
고부가가치 사업 중 게임만큼 인식이 안 좋은 분야도 드물다. 만약 VR게임 테스트 중 누군가 부작용으로 발작이라도 일으킨다면?
언론에서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용화는 고사하고 테스트하는 것조차 힘들어지리라.
이 기적의 가상현실에 대한 접근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VR게임 테스터는 취소다. 공고 싹 내려.”
-개발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내가 미쳤어? 이런 금싸라기 사업을 포기하게?”
-여론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내부에서 테스터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테스트는 필요 없어. 바로 상용화할 방법이 있으니까.”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짜 세상.
이 기술이 상용화에 접어들면, 닉스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독보적인 기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