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90화
로얄 시티즌 호텔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급 호텔이다.
최상의 룸 컨디션, 고품격 라운지 서비스, 쇼핑 지역인 유니언 스퀘어와 맞닿아 있는 위치까지, 무엇 하나 빠질 게 없을 정도였다.
나 역시 로얄 시티즌 호텔에 묵는 일이 잦았다.
물론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그저 호텔의 위치가 닉스 본사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흠…….”
편안한 소파에 몸을 누인 채 태블릿을 슥슥 조작한다.
어제와 오늘.
단 하루 새에 IT면 기사의 논조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승자와 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10월 1일. 닉스폰 3세대, 드디어 오프라인 판매 개시! 전국의 닉스 스토어와 카페 닉스 직영점에서 구매 가능.]
[드디어 밝혀진 닉스폰 3세대 출고량. 무려 3천2백만 대! 스마트폰 출시 이래 최대 판매기록을 갈아치워.]
[경쟁사인 애폴의 애폴폰7은 9백만 대, 애폴폰7C는 3백만 대로 제법 큰 격차를 보여.]
[최초로 애폴폰 판매량을 앞지른 스마트폰이 등장! 닉스폰, IT계의 새 역사를 쓰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모두가 애폴의 승리라고 떠들어 댔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격차는 두 배 이상이나 벌어졌다.
일명 닉스폰 쇼크라 불린 이번 사태로 인해 애폴 주가는 장중 19%나 급락했으며, 애폴 주식을 사라고 떠들던 분석가들은 뉴스란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대표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맞은편에서 샤오후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경호뿐만 아니라 내 일정 전반을 관리하는 비서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좋을 수밖에요. 오늘은 건방진 애폴의 콧대를 눌러버린 뜻깊은 날 아닙니까.”
“이런 날은 샴페인이라도 터뜨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샴페인요?”
“예, 마침 귀한 녀석을 구해뒀습니다.”
당장에라도 일어서려는 샤오후를 내가 손짓으로 제지한다.
“닉스폰 3세대가 판매량을 앞섰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이번 시리즈에 한해서일 뿐입니다. 전체 제품 점유율은 우리가 한참을 뒤지고 있잖습니까?”
“애폴폰은 연간 억 대가량 팔려 나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팡파르를 울리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은 전체 시장 점유율을 뒤집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샤오후는 어정쩡하게 다시 자리에 앉더니, 머쓱했는지 다른 주제의 질문을 꺼내 놓는다.
“그건 그렇고 애폴은 어떻게 움직일까요?”
“어떻게 움직이다니요?”
“어제 연락이 왔잖습니까.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아, 그랬었죠.”
내 표정을 보던 샤오후가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선 쳐다본다.
“보나 마나 무슨 의도가 있어서 접근하려는 걸 텐데, 대표님께선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십니다.”
“걱정은 아래서 위를 올려다볼 때나 필요한 법입니다. 이번만큼은 우리가 내려다보는 상황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내가 자신 있게 위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애폴이 먼저 미팅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유리한 측에선 절대 아쉬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미팅 장소를 애폴 본사가 있는 팔로알토가 아니라, 닉스 본사의 바로 옆인 로열 시티즌 호텔로 잡았다는 거다. 거만한 애폴의 평소 행보로 비춰볼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애폴이 제법 몸이 달아 있다는 소리가 되는데…….
과연 애폴은 어떤 딜을 하려고 들까?
* * *
약속 장소는 로얄 시티즌 호텔에서도 VVIP에게만 대실 기회가 주어진다는 프라이빗 라운지였다.
300피트의 높이를 자랑하는 로얄 시티즌 호텔의 상층부인 만큼, 저만치 아래에 보이는 건물과 자동차들이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덜컥.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잠시 후, 두꺼운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선다.
먼저 안으로 들어온 이는 애폴의 CEO인 톰 쿡이었다. 쿡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반갑습니다, 대니얼.”
나 역시 웃음을 돌려주며 손을 맞잡았다.
과거 애폴과의 디자인 협업 과정 중 틈틈이 안면을 튼 사이였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오, 쿡. 실제로 뵙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저도 그런 거 같습니다. 가끔은 본사에 놀러라도 오시죠.”
“언제 시간이 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시선을 그 너머로 돌린다.
쿡과 함께 들어온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갤 까닥이고 자신을 소개한다.
“반갑습니다. 애폴 이사회 소속의 바실리 브린입니다.”
이사회 소속이라는 말에 손이 움찔한다.
과거, 악연으로 끝났던 애폴의 CFO, 제프 베이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폴의 진정한 실세는 5인의 이사회라 불리는 최대주주 모임이야. 나 같은 놈이나 쿡은 그들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정황상 저 사내가 실세라 불리는 5인의 이사회의 일원일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중요한 자리에 주요 임원들을 제치고 동석할 리가 없잖는가.
난 속내를 숨기고 말했다.
“이사회 소속이라고 하신다면, 사내에 어떤 업무를 맡고 계시는지요?”
“경영을 지원하는 정도이지 딱히 맡은 업무는 없습니다.”
“흠…….”
내가 고민하는 척하자, 쿡이 물어온다.
“왜 그러십니까?”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오갈 듯한데, 업무상 필요하신 분이 아니라면 굳이 동석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 그것이…….”
쿡이 난처한 듯 그의 눈치를 살핀다.
CEO가 눈치를 볼 정도의 이사회 멤버.
이것으로 확신했다. 녀석은 제프가 말했던 그 이사회의 일원이 틀림없다.
“농담입니다. 일단 자리로 가서 이야기하실까요?”
프라이빗 라운지는 서빙하는 직원조차 출입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능숙하게 테이블 중앙에 놓인 커피포트에 잔을 가져다 댄다. 천천히 커피가 흘러나오고, 커피가 반쯤 찼을 때 잔을 다시 회수했다.
애폴에서 온 두 사람은 말없이 내 행동만 살피고 있었다.
“커피 안 드십니까?”
“아, 예.”
쿡은 마지못해 잔을 집어 든다.
그 와중에도 브린이라는 사내는 날 분해할 기세로 훑고만 있었다.
말 없는 티타임만 이어지는 가운데, 답답했는지 쿡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니얼, 제가 미팅을 요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함입니다.”
“틀어진 관계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흐름이다.
부동의 판매량 1위를 고수하던 신형 애폴폰이 타사에 따라 잡혔다는 것은, 단순히 단기적 매출에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었다.
최고의 제품이라 불리는 애폴폰의 상징성.
그 프리미엄 이미지가 흔들린다면 지금껏 고수했던 고가 정책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자,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들어 보실까.
난 일부러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이다.
“관계가 틀어졌으면 바로 잡으면 될 일입니다.”
“그렇지요.”
쿡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하나,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으스러져서 짓뭉개졌다면 본래대로 돌릴 방도가 없는 법이죠.”
“대니얼, 저는 섭섭합니다. 어째서 화해의 손길을 그런 식으로 뿌리치는 겁니까?”
“섭섭한 게 아니라 뻔뻔한 거겠지요. 아무렇지 않게 닉스를 짓밟으려 들 땐 언제고, 아쉬운 일이 생기니까 다시 와서 하는 말이, 관계를 회복하자고요? 저를 호구로 보는 겁니까?”
내가 먼저 공격성을 드러냈지만 쿡은 맞서 싸우기보다 부드럽게 설득하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신제품을 같은 날 발표한 일이나. 예약, 판매까지 겹치게 일정을 잡아서 타격을 줬으면, 닉스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도치 않게 입가에 조소가 흘러나온다.
“이것 참. 숨통을 끊고자 머리에 총을 겨눈 것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친 것을 같은 행위로 싸잡아버리시니, 뭐라 드릴 말이 없군요.”
“저 역시 그때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는 과장된 손짓을 동반하며 말을 잇는다.
“제프가 닉스에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까지 꾸밀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CEO가 그리 중대한 사항을 몰랐다니.
그걸 나더러 믿으란 소린가?
당장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그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애폴이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해주시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양사 간의 깨졌던 신뢰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예전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더더욱 좋겠지요.”
“예전과 같다는 말씀은……?”
쿡은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즉시 답을 꺼낸다.
“닉스와 디자인 계약을 다시 맺고 싶습니다.”
역시 디자인 특허 때문이었나.
디자인 특허는 굉장히 포괄적이고, 규정짓기 모호한 특허라고 할 수 있다.
걸고넘어지자면 끝이 없지만 빠져나갈 구멍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닉스의 디자인 특허는 기존의 특허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액정 형상부터 시작해서 베젤과 수화부의 간격, 심지어는 카메라와 센서의 위치, 버튼의 배열까지 꼼꼼하게 올린 디자인이 무려 2만 건에 달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스마트폰 디자이너들은 닉스의 디자인 특허를 피하고자 머리의 쥐가 나도록 연구해서 디자인을 내놓곤 했는데, 그 결과 지옥에서 꺼내온 듯한 기괴한 디자인의 스마트폰이 출시되곤 했다.
“계약이 이뤄지면 닉스챗은 다시 애폴폰에 선탑재 되게 됩니다. 특허비도 받고 선탑재도 되면 닉스로선 더할 나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매출의 10%를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내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쿡은 물론이고 그 옆의 브린이라는 사내의 표정도 썩어 있었다.
통상 디자인 로열티는 1%에서 3% 남짓으로, 10%를 제시했다는 것은 노골적인 거절 의사였다.
“감정싸움은 이만 접고 다시 예전처럼 협업하는 관계로 돌아갑시다. 그게 두 회사를 위한 길입니다.”
“쿡, 뭔가 착각하시는 듯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난 썩은 표정의 두 사내에게 한 번씩 눈길을 준 뒤, 이야길 이어 나간다.
“지금의 닉스는 과거의 닉스와 다릅니다. 이미 닉스챗은 세계 공용 메신저로 자리를 잡았기에 선탑재하지 않아도 사용자가 스스로 내려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거기다가 푼돈이나 다름없는 디자인 로열티가 고픈 상황도 아닐진대, 왜 닉스는 경쟁사인 애폴과 계약을 해야 하는 걸까요? 논리적인 이유로 저를 설득할 수 있습니까?”
“끙…….”
쿡은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바실리 브린이라는 사내가 끼어든다.
“이유는 충분하지. 닉스의 모든 서비스가 애폴OS 상에서 이뤄지는 이상, 당신은 우리의 조건을 따라야만 할 거야.”
“협박으로 들리는군요.”
“어이쿠, 협박이라니. 현실의 냉혹함을 일깨워 준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다.
난 시선을 쿡에게로 돌린다.
“이건 이사회의 독단적인 생각입니까, 아니면 최고경영자도 같은 생각인 겁니까?”
“협상이 원만하게 해결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다른 수단을 써서라도 원하는 바를 얻어내야겠지요.”
“쿡, 당신까지…… 정말 안타깝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아니겠습니까?”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런 나를 보고 브린은 벌써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간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약 조건은 일전과 같게 하되, 로열티는 0.6%로 조정하는 것으로 진행하도록 하지. 그리고 애폴은 닉스의 신형 배터리에 우선적인 협상권이…….”
난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갔다.
“갑자기 웬 헛소립니까?”
“지금 내게 헛소리라고 했나?”
“헛소리를 헛소리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애초에 저는 계약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브린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전 세계 스마트폰 중 37%가 우리 애폴OS를 쓰고 있다는 걸 알고서 하는 소리야?”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닉스가 애폴OS에서 서비스 중인 8개의 앱이 모두 사용 불가가 될 거라는 것도?”
“물론입니다.”
내가 너무 당당하게 나오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된다. 그들은 내가 납작 엎드릴 거로 생각했나 보다.
“애폴이 어찌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저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브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나도 그의 행동에 맞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브린은 내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린다.
“그 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는 당신이 하겠지요. 제가 무조건 이길 테니까요.”
“웃긴 녀석이로군.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난 그의 행동에 보답하는 의미를 담아 중지를 치켜들었다.
“난 이기는 싸움만 시작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