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84화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정보 습득 창구가 라디오나 TV, 혹은 종이신문 같은 언론매체가 전부였다.
그 때문에 다룰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신문사와 방송사는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됐고, 아울러 정치인과 기업가와의 견고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기 이른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넘어,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기점으로 언론 생태계는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누구나 1인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주체가 될 수 있게 됐고, 대중들은 SNS나 커뮤니티 각지에 모여 언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교류할 수 있게 됐다.
즉, 더는 대중들이 기존의 기득권이 떠먹여 주던 정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존의 정보 기득권에 기대었던 세력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됐다.
여의도 인근의 허름한 한정식집.
외관은 없어 보여도 이곳은 모두에게 개방된, 그런 평범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오직 예약제로 운영될뿐더러 출입 여부의 비밀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터라. 주로 정·재계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애용됐다.
“형님, 먼저 한 잔 받으시지요.”
술을 권하는 중년인은 야당의 실세이자 차기 당 대표로 낙점된 박문수였다.
그는 두 손을 받쳐서 술을 끝까지 따라 넣는다.
“어허. 반절만 달라니까.”
“반절만 담으면 정이 없다잖습니까. 자, 쭉 들이켜고 마저 이야기하시죠.”
술을 받은 노인은 현 여당의 대표인 김지원이다. 그는 한 번 거절하긴 했다만, 재차 권하자 못 이긴 척 잔을 깨끗하게 비워낸다.
“크읏. 쓰다. 써.”
그는 인상을 팍 구기더니.
“술이 왜 이렇게 쓴 거야?”
“술이 쓴 이유는 안주가 없어서지 않겠습니까?”
박문수의 말과는 달리, 술상에는 샥스핀이나 송이처럼 희귀한 요리가 넘칠 정도로 마련돼 있었다.
김지원은 상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갤 끄덕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술이 쓴 이유는 안주가 없어서지.”
“그래서 제가 좋은 놈을 준비해 왔다는 거 아닙니까.”
“쓸데없는 소리면 바로 일어난다?”
잔을 내려놓자, 박문수는 얼른 다시 잔을 채워 넣는다.
“어이쿠, 형님. 뭐가 그리 급하세요. 좀 진득하니 들어봅시다. 예?”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죽을 날 얼마 안 남으면 다 이런 법이야.”
“아직 정정하시면서 무슨 엄살입니까? 앞으로 7선까지는 가셔야지요.”
김지원은 너스레를 떨어대는 박문수를 빤히 쳐다본다.
“헛소리 말고 본론만 말해. 나 오늘 바쁘다.”
“흐흐, 알겠습니다.”
살짝 문을 연 박문수가 밖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뭐야?”
김지원은 그들을 대번 알아봤는지 자리서 일어서려 한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박문수가 급히 막아섰다.
“형님, 좀 앉아 보십시오.”
“이거 안 놔? 이 새끼가 누구 물먹는 거 보고 싶어서 이러나.”
김지원이 자리서 빠지려는 이유는 당연했다.
방에 들어온 이들은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고려일보의 방문호 부사장과 한라일보의 유지환 전무, 그리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던 대현의 최승룡 이사였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김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는다.
물론 이것이 의도된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형님,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시죠.”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런 분위기를 잡는 거야? 응?”
먼저 입을 연 것은 고려일보의 방문호 부사장이었다.
“김 장관님, 먼저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고갤 숙이려는 그를 김지원이 제지한다.
“용건만 듣고 나갈 테니, 빨리 말해보시오.”
“알겠습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 한데 모인 이유는,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해섭니다.”
“공동의 적이 누구요?”
“닉스입니다.”
김지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술잔을 마저 깨끗하게 비워내고 답한다.
“당신네도 벌통을 쑤실 생각이요?”
“벌통은 가만두면 계속 커져서 처지가 곤란해집니다. 저희는 그러기 전에 태워서 쫓아내려는 거고요.”
“쯧, 닉스가 귀퉁이에 붙어 있는 중소기업인 줄 착각 하나 본데, 이미 국내에선 오성을 제외하면 비빌 만한 기업이 없을 정도로 커졌단 말이요. 그런 곳을 어찌하겠단 말인지 모르겠구려.”
“물론, 닉스를 완전히 끌어내리는 건 힘듭니다. 한국 촌놈이 미국에 가서 어마어마한 기반을 쌓아뒀으니까요.”
“그럼?”
이번은 대답을 다른 이가 받는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대현의 최승룡 이사였다.
“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 환멸을 느끼게 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이요?”
“이번 국정조사부터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때마침 국정조사 시즌이 다가오긴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닉스 대표를 불러내려면 뭔가 걸고넘어질 것이 필요했다.
“건수는 있소?”
“건수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겠습니까? 닉스가 대선부터 보여줬던 수상쩍은 캠페인부터 시작해서, 국내 통신이나 보안법까지 걸어서 집요하게 물어뜯는 겁니다. 언론은 물론이고 환경단체까지 이미 섭외가 끝났으니, 여기에 국회까지 도와주시면 금상첨화겠지요.”
“흠…….”
김지원이 잠시 말을 고르고 있자, 그새를 못 참고 최승룡이 말을 덧붙인다.
“지금이야 정부에서 시행령으로 닉스를 지원하고 있다만, 제대로 된 법안은 국회의 문턱조차 못 넘고 있었잖습니까? 만약, 여야가 합심해서 틀어막는다면 지금 공사에 들어간 첨단산업단지는 삽도 뜨지 못할 겁니다.”
최승룡 이사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면서도 발음 하나 꼬이지 않았다. 김지원은 그가 어릴 적 보던 약장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교활한 놈이 약을 파네.’
언론과 재벌, 여기에 여야가 합동해서 때려댄다면 제아무리 정부의 비호를 받는 닉스라도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닉스가 한국을 이탈하면 그 피해는 오롯이 국가와 국민이 짊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끌끌, 대현에서는 아주 급한가 보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배터리 공장을 막았더니 그보다 더한 전기차 공장이 들어오게 됐으니까. 그러니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니겠소?”
방금까지 신나서 떠들던 최승룡의 입이 다물어진다.
분위기가 완전히 식어 파투나기 직전에 다다르자, 박문수가 얼른 진화에 나섰다.
“형님, 이건 대현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
“예, 모두요. 닉스가 개입한 이후부터 여론 변화를 보셨잖습니까.”
“그래, 봤지. 누구네들이 암만 떠들어도 지지율은 거꾸로 올라가더구먼. 이제 종이쪼가리로는 여론을 움직이기 힘들다는 방증 아니겠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신문사 임원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든 말든, 김지원은 제 할 말을 이어 한다.
“정치는 생물이야, 생물. 그러니 지금 경거망동하다가 나자빠지지 말고, 기회를 보면서 기다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야.”
“형님!”
김지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그때 재빨리 박문수가 따라 일어서서 그를 막아선다.
“닉스에서 요구한 법안들을 지금까지 막고 있던 사람이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그래서? 닉스가 날 낙선이라도 시킬 거란 소리야? 고놈들이 뭐라고. 나 김지원이야. 정치 10단의 김지원이! 닉슨지 나발인지 어떻게 해도 지역구에서는 날 밀어주게 돼 있다고.”
“아뇨. 닉스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단지, 현 청와대의 실세들이 형님을 끌어내리겠지요. 그들은 이미 닉스와 한배를 탔으니까요.”
김지원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놈들이 날 어쩐다고…….”
“이미 한 번 당해보셨잖습니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말입니다.”
그 말에 김지원이 눈알을 부라린다.
과거에 한 번 엮여서 징역을 선고받은 그로선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법이 정치자금법이었다.
정치한다는 놈 중에 기업서 뒷돈 안 받은 놈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냥 묻고 넘어가냐, 아니면 파고들어 찍어내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의 표정을 살피던 박문수가 슬쩍 방석을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가만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 머리를 맞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네 말도 맞다.”
김지원이 다시 자리에 앉자, 실내에 모여 있던 모두의 표정이 환해진다.
“우선은 국정조사 때 그를 강제로 나오게 만들 방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 *
서울유진호텔의 스위트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허세를 위해서 묵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숙식과 업무를 동시에 쳐내기 위해 1개월씩 예약해서 쓰고 있었다.
승강기에 오르자 반사적으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우, 진이 다 빠지네.”
가벼운 마음으로 닉스 스튜디오에 들렀던 것이 문제였다.
오랜만에 만난 배기태는 지금까지의 게임 개발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중간에 말을 끊으려고도 했건만,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해서 브리핑해대는지 미안해서라도 끝까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브리핑은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배기태의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 않자 강제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띵.
승강기가 멈춘다.
별생각 없이 밖으로 나서려는데, 누군가 승강기 출구 바로 앞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나를 보고선 반갑게 인사를 해오는 녀석.
KG전자의 진승모였다.
“어라? 승모 씨가 왜 여기 있습니까?”
“그저께 전기차 관련해서 미팅하자고, 선배님이 문자 주셨지 않습니까.”
아차, 그게 오늘이었나.
워낙 일에 치이며 살다 보니,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엊그저께 같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최근에는 정신이 없네요.”
“미안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선배님이 바쁜 거야 전 세계가 아는 일이니까요.”
능숙하게 아부를 넣는 실력이 발군이다.
그와 걸으면서 휴대폰을 확인한다.
현 시각은 1시 25분.
약속된 시간이 2시였으니 진승모는 35분이나 일찍 온 셈이다.
이 정도 안면을 텄으면 풀어질 만도 하건만, 녀석은 여전히 기합 든 신입사원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긴 복도를 걷는다.
그리곤 모퉁이를 딱 도는데, 내 객실 앞에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의 수행원을 끼고 등장한 사내는, 오성전자의 실질적인 오너, 정용재 부회장이었다.
그는 내가 진승모와 같이 있는 걸 보더니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론 그것은 찰나의 변화일 뿐, 다시 본디의 평온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강 대표님.”
“오, 정용재 씨.”
그는 악수하면서도 허리를 지나치게 굽혀온다.
본디 내게 적대적이었던 정용재는, CES2012가 끝난 기점으로 바짝 숙여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기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의한 심경변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예, 그런데 저보다 더 빨리 온 사람이 있었군요.”
“승강기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슬쩍 진승모에게 눈길을 줬다가 회수한다.
“아, 그렇습니까? 이상하네요. 제가 왔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죠.”
내가 짐작건대, 진승모는 정용재가 먼저 왔다는 걸 알고 약삭빠르게 승강기 입구서 기다린 모양이다.
이게 뭐라고 서로 경쟁할 것까지야.
난 객실의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세 개의 의자가 있는 원형 테이블.
그 위에 갓 내린 커피가 한 잔씩 놓인다.
향긋한 아로마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민다.
진승모는 커피 맛에 대한 과장된 예찬을, 정용재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평가를 해왔다.
“자,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뵙자고 한 이유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공급될 전기차 부품 수급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두 사람 모두 커피잔을 내려둔다. 그러고는 날 뚫어질 듯 쳐다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두 업체가 절반씩 납품한 부품을 볼보에서 전량 소화했습니다만, 앞으로는 닉스 배터리를 쓰는 모든 전기차에 광범위하게 쓰일 예정입니다. 그건 두 분 다 알고 계시지요?”
두 사람은 고갤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이참에 부품 공급 관련 비율을 조정할까 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 표정에 긴장감이 감돈다.
지금까지의 전기차 부품 공급이 연습게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본 게임에 들어간다.
기존 전기차의 강자인 볼보와 테슬라는 물론이고 폭스바겐 그룹, 도요타, GM, 혼다. 거기에다 닉스에서도 자체적으로 전기차를 만들어낸다지 않던가?
이런 중요한 때에 50 대 50이었던 비율이 한쪽에 쏠린다면?
먼저 입을 뗀 것은 오성의 정용재였다.
“어떤 식으로…… 조정되는 겁니까?”
평소 닉스는 KG전자와 우호적이었기에, 비율이 조정되면 오성전자 쪽이 깎여 나가리란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려댔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느 한쪽 업체를 편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정용재 얼굴에서 긴장이 살짝 풀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다만, 앞으로는 철저히 품질 위주로 발주 비율을 조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