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83화 (182/206)

기적의 IT 재벌 183화

인공지능 시스템의 여론개입 효과는 엄청났다.

정부의 지지율은 데드라인인 25%를 넘어서 23%까지 떨어졌었지만, 씬의 여론개입으로 다시 40%를 유지하는 안정적인 추세가 이어졌다.

난 그것을 마지막으로 씬의 여론개입을 중지시켰다.

솔직히 두려웠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그 끝이 어찌 될지에 대한, 그런 미지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에서 여론의 힘은 절대적이다. 아니, 일당독재체제에서 형식적인 투표 과정만 밟는 중국이라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 터.

그 때문에 전 세계의 정치단체나 이익단체들은 여론을 움켜쥐기 위한 여론팀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그들의 전쟁은 가상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들이 좌지우지하는 여론으로 대표가 선출된다면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지율 변화를 겪은 정부는 기존의 모호한 스탠스를 버리고 닉스에 호의적인 태도로 전향해 왔다.

약속했던 강남의 금싸라기 땅을 공시지가에 넘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기존에 지지부진했던 전기차 충전소 지원안, 택시 운수법 개정, 전자화폐 촉진안을 줄줄이 실행에 옮겼다.

당연히 야당과 대현의 입김이 닿은 언론들은 반대를 부르짖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부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어쭙잖게 중도를 표방하다간 어떤 꼴을 당하는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기차 붐이 일었으며, 그와 동시에 닉스페이와 닉스제로도 운영의 기지개를 틀었다.

정부의 지원에 닉스도 화답하여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닉스첨단산업공단, 일명 닉스공단이라 불리는 곳을 새로이 건설하기로 했는데. 공단에 참석하는 기업은 전기차의 닉스, 반도체의 하이넥스, 전장 부문의 KG전자가 최종 확정됐다.

3대 기업의 생산라인은 물론이고 R&D 연구단지, 거기다가 협력업체들도 대거 지원하고 나선 탓에 규모부터 역대급의 단지가 예정됐다.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플래시가 터져 나온다.

모여든 기자들만 500명 남짓.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언론들이 닉스공단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에 지어지는 전기차와 반도체 생산 설비로 인해 전 세계 IT산업의 흐름이 바뀔 정도였으니 당연하다고나 할까.

“강현우 대표님, 포즈 한 번 취해주십시오!”

“강 대표님, 오늘 특별한 발표는 있습니까?”

“강 대표님! 여기 한 번 봐주세요!”

포토라인 밖에서 기자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난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고 지정된 자리로 향했다.

“선배님, 어서 오십시오!”

미리 자리서 앉아 있던 KG전자의 진승모가 벌떡 일어서서 인사해온다.

평소에도 그의 인사가 깍듯했다만, 이번은 깍듯의 정도를 넘어서 과할 정도였다.

“승모 씨. 오랜만입니다.”

“승모 씨라뇨. 후배라고 불러주시기로 했잖습니까.”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대는 녀석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사내 지지기반이 닉스와의 관계가 전부인 그로선 어떻게 해서든 나와의 친분을 과시해야만 했다.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들 앞에서 말이다.

“요즘 KG전자 분위기는 좀 어떻습니까?”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스마트폰 만들어서 까먹으면 셀카봉이나 이어폰 만들어서 메꾸는 정도죠.”

“이번도 스마트폰은 실적이 안 나왔나 보군요.”

“좀, 그렇습니다.”

“KG전자의 신제품이…… 옵티무스G였죠?”

그 이름이 나오자 진승모가 한숨을 푹 내쉰다.

“예, 맞습니다. 회장님이 진두지휘해서 만든 스마트폰이죠.”

“그것도 반응이 별로였나 보네요.”

“까놓고 말해서, 옵티무스G만의 셀링포인트가 없습니다. 저희가 애플이나 오성처럼 코어 지지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닉스처럼 셀카나 몇몇 기능에 집중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팔리려야 팔릴 수가 없는 겁니다.”

진승모의 말이 엄살이 아닌 것이, 옵티무스G의 판매량은 월간 10만 대를 밑도는 처참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본디라면 이 정도 성적이 나올 물건이 아니었건만, 중급 라인에서 팬틱의 레이서 시리즈가 치고 올라오면서 애먼 KG전자만 허덕이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 사업은 이대로 밀고 나간답니까?”

“이미 닉스OS로 돌아서기엔 늦었다고, 계속 안드로이드로 간다고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법이죠.”

내 눈치를 슬쩍 살핀 진승모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쉰다.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지요.”

“무슨 자존심요?”

“KG전자는 예로부터 오성전자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인제 와서 안드로이드 진영을 이탈하면 모양새가……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직접 말은 않았지만, 진승모의 답답하다는 표정을 보니 KG전자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경영진 철학이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휴우, 그나마 전기차 부품 쪽이 빛을 보면서 적자 걱정은 안 하는 게 다행이라고 할까요.”

앞으로 신형 배터리가 장착된 차량에는 모두 닉스제 모터가 들어가야 했으니, 그 기대감 때문에 납품업체인 오성과 KG의 주가가 급등을 거듭했을 정도다.

“그건 그렇고.”

진승모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잇는다.

“오성 측은 공단에 안 들어오는 겁니까? 국가에서 이 정도로 밀어주면 무조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쪽도 자존심 문제겠지요.”

“자존심요?”

“SG그룹의 하이넥스 반도체 공장, 그게 바로 옆에 들어서는데 오성으로선 좋다고 따라 나오기가 껄끄러웠겠지요.”

“오성은 증설을 안 하고 그냥 가는 겁니까? 내년 상반기만 돼도 케파가 달릴 게 뻔한데 말입니다.”

“글쎄요. 베트남 공장을 증설하든, 무슨 수를 쓰지 않을까요?”

솔직히 오성에서 물량을 찍든 못 찍든, 난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량이 부족하면 그만큼 KG전자 측의 물량을 끌어 쓰면 그만이니까.

전자산업계의 양대산맥인 오성과 KG.

닉스는 두 곳을 지독하게 경쟁시키고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해서 쓸 수 있다. 이래서 한국이 전기차 공장을 돌리기 최적의 장소라는 거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행사장이 거의 꽉 찼다.

대다수는 공단에 입점하는 협력업체 사장들과 정부 쪽 인사들이었고, 거물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이름깨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공단 건설의 시행사인 SG건설의 신석호 사장이 유일했다.

모든 준비가 끝날 무렵에서야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포트라이트 받기 좋아하는 그를 위해, 정확한 공단의 규모와 투자금은 함구한 상태였다.

바로 지금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부터 안수철 대통령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든 이가 단상을 바라본다. 천천히 입장한 그는 시선을 즐기듯 주변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존경하는 경영자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은 한국의 역사적인 첨단산업단지에 첫 삽을 뜨는 날입니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지루한 축사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중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고갤 끄덕이며 경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대통령 안수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는 듯했다.

20분간 이어지던 축사가 끝났고, 이어서 표창장 수여식이 열렸다.

수여자 대표는 당연히 내가 선택됐다.

단상에 오르자 한껏 상기된 표정의 대통령이 나를 맞이한다.

“반갑네, 강현우 대표.”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그가 나를 탐탁잖게 여긴다는 말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떠먹여 주는 것들이 많아선지 그런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를 보조하는 비서실에서 약을 단단히 쳐뒀나 보다.

표창장을 받는 사진, 악수하는 사진, 서로 마주 보고 웃는 사진, 어깨를 두드려주는 사진 등등. 그는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사진들을 찍고서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본디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어째선지 볼보 공장설립 때와 데자뷔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준비된 행사가 마무리되자,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썩은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떼를 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를 더 발표해 주길 원하나 보다.

기자들님,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발표하게 되면 스포트라이트가 내 쪽으로 넘어와 누군가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든요.

자리를 뜨려는 차에, 시커먼 사내 한 놈이 내게로 다가온다. 오늘 행사에서 SG그룹의 대표로 참석한 신석호 사장이었다.

“강현우 대표.”

“신석호 씨, 무슨 일입니까?”

내가 쳐다보자, 그는 슬쩍 눈을 내리깐다.

일전까진 그와 나는 적대관계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 닉스 공단과 더불어 닉스 신사옥의 시행사가 그가 이끄는 SG건설로 결정됐기에, 지금은 내가 까라면 까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습니까?”

“할 이야기가 있으시면 여기서 하시죠.”

그는 내 옆에 앉은 진승모를 슬쩍 보곤,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행사장에서 약간 떨어진 검은색 세단.

그곳에서 SG그룹의 신성호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하하하, 이거 오랜만이네. 우리 사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고말고. 딱 하나만 빼면 말일세.”

“예? 어떤 것인지?”

“우리 딸과 동거 중이라며?”

순간, 숨이 턱 하니 막힌다.

분명 수아와 나 사이에는 거리낄 게 없는 사이지만, 상대가 장인어른 앞이면 느낌이 달라지는 법이다.

“동거라기보다 같이 연구를 진행했다고 보는 것이…….”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곤 날 쳐다본다. 맹수와 마주친 듯한 위압감에 잠시 숨을 죽인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책임은 확실히 질 생각으로 했다고 믿겠네.”

“물론입니다, 회장님.”

“어허, 회장님이라니.”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난 마른 침을 꿀떡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허허, 그래야지.”

그는 흡족한 듯 턱을 쓱쓱 쓰다듬더니.

“식은 언제로 잡을 텐가?”

“올해는 일이 많아서 힘들 것 같고, 내년이나 내후년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성호 회장의 눈빛이 다시 부리부리해지려 한다. 난 얼른 말을 덧붙였다.

“대신, 올해 안에 약혼식은 올릴 예정입니다.”

“약혼이라…… 그 정도면 나쁘지 않지. 대신 장소와 방식은 내가 정하겠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그래, 식 이야기는 그만하면 됐고.”

그는 깍지를 낀 채로 꼰 다리를 반대편으로 옮긴다.

“내, 여자관계를 싹 정리하라곤 하지 않겠네.”

“저기, 회장님. 아니, 장인어른.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저는 수아 외엔 다른 여자가 없습니다.”

“어허, 지금은 없을지 몰라도 앞으로도 없을 거라 어찌 장담하는 건가? 자네쯤 되는 사람을 여자들이 가만둘 거로 생각하면 오산일세.”

일전에 수아가 했던 말이 오버랩된다.

그때 그녀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재벌가에선 이런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건가? 내 상식으론 납득할 수 없는 언행들이다.

“이건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결혼을 세 번이나 했던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그러니 잘 듣게나.”

“새겨듣겠습니다.”

“세상에는 널린 게 미녀야. 특히 자네 같은 사람에겐 그런 미녀가 줄을 잇겠지. 하지만 그런 여자들이 자네에게 뭘 원하고 접근했겠는가? 술로 한 관계는 술이 깨면 사라지고, 돈으로 맺은 관계는 돈이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이지.”

“…….”

“솔직하게 얘기함세. 난 처음에 자네와 우리 수아가 교제하는 거. 반대했었네. 왜 그런 줄 아나?”

“제가 모자라서입니까?”

그는 갑자기 내 손을 꽉 잡는다. 움켜쥐는 힘이 어찌나 센지, 손을 뺄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아니, 그 반댈세. 자네는 용이야. 우리같이 지상에 있는 것들과는 태생이 다른 존재지. 그래서 이렇게 꽉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말지.”

국내의 내로라하는 재벌가에서 이런 말을 듣다니, 뭔가 느낌이 묘하다.

“두 사람, 연애로 맺어졌었다며?”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됐습니다.”

“그래, 그 점이 딱 마음에 들어. 다른 뭔가가 맞는 게 있으니 만났을 거 아닌가. 그치?”

“관심 분야가 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전자상가에서 만나게 된 거고요.”

“그래. 그거면 됐네. 돈이나 권력으로 엮인 사이만 아니라면 된 거야. 우리 수아, 잘 좀 부탁하네.”

어째선지 그의 눈빛에서 회한의 감정이 비친다.

오랜 고독에서 절여져 나온 듯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응축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차, 내가 이 말을 하려고 불렀던 게 아닌데. 깜빡했구먼. 미안하네, 나이가 차면 다들 이렇게 되더라고.”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신성호는 시트 앞에서 서류철을 꺼내 들더니, 거의 떠밀 듯 내 품에 안겨 준다.

“자네를 넘어뜨리려는 놈들 리스트야.”

“저를요?”

대강 서류를 훑어본다.

드문드문 기업가 명단도 있었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야당 의원이었다.

“이들이 저를 왜……?”

“자네가 이번에 칼춤을 췄던 거, 모를 거로 생각했나?”

“불량 사용자를 걸러냈을 뿐입니다.”

“그쪽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특히 야당 쪽에서는 대선 패배가 자네 탓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먼.”

“이를 갈아봐야 어쩌겠습니까?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인데요.”

“이빨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아직 국회의 과반은 야당이 잡고 있다네.”

난 탁, 소리가 나게 서류철을 닫는다. 그러곤 다시 신성호 회장에게로 돌려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남은 이빨도 몽땅 뽑아주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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