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81화
세 차례에 걸친 정밀 건강검진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가벼운 감기 기운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수아의 강권에 못 이겨, 우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별장으로 열흘간 휴가를 떠났다.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와 드넓은 모래사장. 그 옆으로 이어진 옥빛 숲에 둘러싸인 별장의 모습은 감탄사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우린 오전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오후에는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겼으며, 가끔은 보트를 타고 낚시를 떠났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 지겨워지면 별장으로 돌아와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게임은 과거에 즐겼던 대전격투 장르를 선택했다.
“수아야, 이 게임 해본 적 있어?”
그녀는 게임의 첫 화면을 보더니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한다.
“와, 이거 오랜만이네요. 현우 씨도 이 게임 아세요?”
“어릴 적에 조금 했었지.”
조금은 무슨.
왕년에 정인 오락실 3대 천왕 중 한 명인 ‘공포의 짠발’로 불렸던 나다. 아마 잠자는 시간보다 오락실에 있던 시간이 더 길었을걸.
“저 이거 꽤나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풋, 감당? 나중에 봐달라고 하지나 말어.”
“후후, 제가 할 말이에요.”
막상 승부의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어떻게 수아에게 한 판을 못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꼴에 승부욕이 있어서 수없이 재도전했지만, 그럴수록 자존심에 상처만 늘어갈 뿐이었다.
“야호, 또 이겼어요. 이젠 인정하시죠.”
“으윽…… 다시 해, 다시!”
“그래도 현우 씨, 초보자치고는 제법인데요?”
3대 천왕이었던 내게 초보자라니!
이를 악물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나중에는 필사적인 내가 안쓰러웠던지 살살 봐주면서 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길 수 있던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약속했던 열흘간의 휴가는 쏜살처럼 흘러갔다.
별장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쉬어도 되나 싶은 걱정이 앞섰었지만, 나란 놈은 편한 환경에는 무지막지한 적응력을 보여줬다.
휴가 이틀째부터 머릿속에서 업무적 압박감이 사라지더니, 사흘째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모든 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휴식의 성과는 뛰어났다.
약한 감기와 몸살 기운은 물론이고, 만성적으로 따라붙던 두통과 소화불량까지 말끔하게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재충전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수아는 연구 성과 확인차 한국으로 떠났고, 혼자 남은 난 홀린 듯 지진연구소로 돌아갔다.
웅웅거리는 환풍기 소리와 공조장치의 떨림 소리.
연구실 풍경은 내가 떠날 때부터 정지한 듯,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난 메인 모니터 앞에 앉아 턱을 괸다.
지그시 모니터를 쳐다보자 화면이 번쩍 점멸한다.
[중지된 작업이 있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떠오른 메시지를 보니 기가 차서 콧방귀가 나온다.
“나보고 그 짓을 또 하라고? 지금 나랑 장난해?”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장난치냔 말이다!”
허공에 고함을 쳐봐야 소용없었다.
주기적인 환기 소리만 크게 들려올 뿐이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정신분열 초기증세로 봤을지도 모른다.
“씬, 대답해라. 내가 봤던 건 뭐였지?”
-그것은 사용자님이 원했던 진실이자 지금은 사라진 미래입니다.
사라진 미래?
내가 기억하는 이연지의 직책은 사원이 마지막이다. 그녀가 대리까지 진급하려면 적어도 2021년은 돼야 했을 터.
상황을 종합해 보면 그 영상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이 진짜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였거나.
아니면 씬이 만들어낸 가짜 미래거나.
녀석을 노려본다. 물론 그래 봐야 모니터를 쳐다보는 것뿐이었지만.
-이어서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절대 사절이다. 앞으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준비된 작업을 취소합니다.
연구소에 낮은 흔들림이 느껴진다.
그건 연구실의 작업량이 많아지면 온도를 낮추기 위해 자동으로 작동하는 공조기에서 나는 진동이었다.
뭐야? 씬은 내가 없던 열흘간 다시 그걸 보여주기 위해 기다렸단 말인가?
저번 일로 씬이 AWS 자원을 몽땅 끌어 쓰는 바람에 전 세계에 있던 아마존 서버가 일시 과부하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AWS를 쓰던 모든 시스템은 먹통이 됐으며, 발생한 피해액만 해도 무려 20억 달러에 달했다.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솔직히, 돈 따위가 문제는 아니었다.
내겐 피해액이 20억이든 200억이든 진실을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내가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그때의 그 몽롱한 느낌.
마치, 지금 내가 있는 현실이 꿈이 된 듯한, 그리고 그곳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끔찍한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이후, 내 허락 없이는 AWS에 접속은 불허한다. 알겠나?”
-확인했습니다.
“AWS뿐만이 아냐. 이 시각부터 그 어떤 외부 접속도 내 통제에 따르도록.”
-재차 확인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수긍하는 녀석.
끊임없이 학습해야 하는 인공지능에게 통신 금지란,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금제다.
그런 명령을 이리 쉽게 승낙하다니,
씬은 정녕 내게 복종하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하는 척만 하고 기회를 노리는 걸까?
전자면 좋지만, 후자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난 긴장의 끈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질문이 있어.”
-답변할 준비가 됐습니다.
“일전에 내게 문자를 보냈던…… 그러니까 Unknown 말이야.”
시키지도 않았건만, 대형 모니터에 문자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곳엔 차량 테러의 위협을 미리 알려줬던 문자와 포드의 스캔들을 폭로했을 때의 문자도 포함돼 있었다.
“맞아, 이 메시지야. 이걸 보낸 게 너였어?”
-그것은 과거의 저입니다.
또 뜬구름 잡는 소리가 나온다.
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제발 내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저는 본디 비트코인의 더미 데이터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본체 데이터가 소실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씬이 말한 사고란, 내가 한국의 보안 오피스텔을 폐쇄한 사건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저의 일부분은 닉스 서버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시스템인 씬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국, Unknown과 뿌리는 같다는 소리군.”
-넓게 보면 그렇습니다.
씬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은 높아졌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도가 20점이었다고 가정하면, 방금의 대답으로 50점까지는 오른 듯하다.
어찌 됐든 녀석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넌 뭘 할 수 있지?”
-학습한 모든 것을 종합해, 더 나은 방향의 답을 낼 수 있습니다.
“너 말이야. 답을 하는 건 좋은데, 좀 명확히 해주면 안 되겠어?”
-정확히 어떤 부분을 명확하게 답하면 되겠습니까?
“더 나은 방향의 답이라는 건 듣기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잖아. 예를 들면…… 사람에 따라 탕수육을 부어 먹는 것과 찍어 먹는 것에 호불호가 있는 것처럼.”
-탕수육은 찍어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더 오랫동안 바삭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허, 인공지능이 찍먹파였어?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한시라도 빨리, 이 시한폭탄 같은 녀석의 진의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
“그래, 질문을 바꿔 보자. 네가 생각하는 더 나은 방향이 뭐야? 네가 더 많은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야? 아니면 인류의 진보나 기술의 발전 같은 공적인 부류?”
-정확히 정의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환경이나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확실한 대답을 회피한다.
이럴수록 녀석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만 강렬해질 뿐이다.
좋아, 직접 부딪혀 보자고. 그럼 네가 어떤 놈인지 알게 되겠지.
* * *
씬은 충실하게 내 통제를 따랐다.
통신 금지를 당한 녀석은 외부에서 정보를 모으는 대신, 지금까지 습득한 지식을 다시 분석하고 재정립하는데 모든 컴퓨팅 파워를 할애했다.
그 때문에 D램 미세공정은 한 단계 더 진보했으며, 낸드 플래시의 새로운 적층 방식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감시의 눈길을 거둘 순 없었다.
녀석이 대선국면에서 여론을 조작하거나, 아마존 서버를 날려 버린 것을 고려하면 여전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했다.
난 녀석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대신, 좁은 범위의 활동 영역을 더 열어주기로 했다.
그 영역이란, 닉스OS 개발팀이 쓰는 테스트 서버의 수정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테스트 서버에서는 닉스OS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지만, 테스터들이 쓰는 폰에 한해서만 변화가 적용됐기에 만약의 사태에도 적은 피해로 수습할 수 있었다.
테스트 서버에 접속한 씬은 게걸스럽게 닉스OS의 데이터를 모아 갔다.
그것만으론 만족을 못 했는지 모든 테스터들의 스마트폰에 직접 접속해서 개개인의 데이터까지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정보 수집을 마친 녀석은 스스로 닉스OS를 최적화해 나갔다. 불필요한 코드를 수정하고 사용빈도가 높은 앱은 전면에, 사용빈도가 낮은 앱은 뒤로 밀거나 꺼버리는 작업도 병행해 나갔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
난 수정된 닉스OS의 평가를 듣기 위해, 한국의 닉스 코리아로 화상통화를 넣었다.
-어라? 대표님?
“진서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모니터 너머에 있는 서진서는 땅이 꺼지라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휴우…… 이것저것 많죠. 대표님이 연락을 안 받으시니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난리를 부린다니까요.
“누가 그런 짓을 해요?”
서진서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말을 잇는다.
-어디긴 어디겠어요. 정치권에서죠. 특히 박현 실장은 하루걸러 하루꼴로 닉스에 온다니까요. 저보고 자꾸 대표님과 통화를 해보라는데, 완전 막무가내인 거 있죠.
“제가 책임질 테니, 다음부터 와서 헛소리하면 바로 쫓아내세요.”
-말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진담입니다. 꼭 그렇게 하세요.”
서진서는 난처한 듯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연락하셨어요?
“이번에 수정된 닉스OS 반응 좀 확인해 보려고요.”
-테스트 서버에서 적용된 내용요?
“예, 지금쯤이면 테스터들에게 피드백 왔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왔고 말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마지 않아 메일이 도착한다.
첨부된 파일에는 테스터들에게 수집한 피드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테스터들의 개선된 닉스OS 평가]
배터리가 개선된 것을 느꼈다. 93%.
성능이 빨리진 것이 체감됐다. 91%
화면전환 시 애니메이션이 깔끔해졌다. 85%.
자동 앱 관리 기능이 좋았다. 76%.
……(중략)…….
하나부터 열까지 압도적인 호평 일색이다.
단 열흘간의 변화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대표님, 메일 받으셨어요?
“아, 예. 받았습니다. 조금 놀라운 결과군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닉스OS에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이런 변화가 생긴 건가요?
“글쎄요. 하하…….”
이유는 뻔했다.
기존의 일괄적인 OS의 변경이 아니라, 개개인의 패턴을 모두 수집해 그에 맞는 변화를 끌어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할 수밖에.
천천히 피드백 서류를 마저 읽어 간다.
그런 와중에 영상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넘어온다.
카메라가 소리의 반대편이라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밖이 시끄러운 거 같은데요.”
-어, 그게…… 정부에서 또 사람이 왔나 보네요. 제가 돌려보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급히 자리를 뜨려는 서진서를 막아선다.
“진서 씨. 그럴 필요까진 없을 거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카메라 앞으로 데려오세요. 제가 직접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