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80화
소변검사, 초음파, CT, 내시경, 심박 변이도검사, 폐 기능검사, 생화학 및 혈청검사 등등.
평생 받을 정밀검진을 한 번에 다 몰아서 받은 듯하다. 그 결과 내가 받은 처방은.
“밀가루나 인스턴트 음식은 피하시고, 될 수 있으면 지나친 당 성분이나 나트륨, 고칼로리 음식도 삼가세요. 당연히 흡연이나 음주는 금지입니다.”
당사자인 나보다 옆에 앉은 수아가 더 초집중 상태다. 의사의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겨버릴 기세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거기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중요합니다.”
“선생님. 그래서 제 몸 상태가 어떤 겁니까?”
“이번 검진 결과에 따르면…….”
의사는 차트를 다시 한번 살피며 안경을 고쳐 쓴다.
옆에서 수아의 꼴딱하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때문에 괜히 나까지 긴장 상태가 됐다.
“급성편도선염이군요.”
탁하고 긴장이 풀린다.
급성편도선염. 다른 말로 감기다.
이 망할 돌팔이 놈이, 이딴 소리 하려고 지금까지 뜸을 들였단 말이야?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눈치를 살피던 의사가 뒤늦게 사족을 덧댄다.
“피로가 누적되면 증세가 악화할 수도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이삼일 정도는 푹 쉬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검진 결과를 받아들고서 곧장 진료실을 빠져나온다.
괜한 시간 낭비만 했다며 툴툴거리는 나와는 달리, 수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큰 문제 없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말했잖아. 잠시 현기증이 났던 거뿐이라고.”
“그래도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며칠은 쉬어요. 예?”
걱정스러운 눈빛이 날 바라본다.
난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놈의 일이 끝나야 쉬든지 하지.”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번에 씬과 진행했던 반도체 연구 말이야.”
수아는 내 말에 즉시 반문해 온다.
“반도체 부문이라면 제가 천천히 진행해도 되는 일이잖아요. 현우 씨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승부수를 띄워볼 생각이야.”
“갑자기 무슨 승부요?”
“너도 알다시피 반도체는 기술 한 단계 차이로 엄청난 성능 격차가 벌어지잖아. 그치?”
“그렇죠. 차세대 공정으로 넘어가면 발열량부터 격이 다른 결과가 나오니까요.”
“잘 들어 봐. 만약, 씬과 연구한 데이터를 토대로 시제품이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시중에 풀린 제품과 비교한다면 몇 단계나 차이 날 거 같아?”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장고에 들어간다. 그러고는 1분여 동안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D램과 플래시메모리 분야만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현재 유통되는 제품과는 3단계? 경쟁사에서 개발 중인 제품과 비교했을 땐 2단계쯤 앞설 거 같아요.”
“좋아. 지금부터 준비에 돌입하면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양산에 들어가겠지?”
“그렇겠죠.”
“차세대 반도체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경쟁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거 같아?”
“뭐예요 자꾸 질문만 하고.”
“어허, 빨리 말해봐.”
내가 재촉하자 수아는 어쩔 수 없이 답을 꺼낸다.
“음…… 제가 경쟁사였다면 제품을 덤핑으로 팔든지, 그게 아니라면 생산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일단 성능 대결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녀의 답변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상식을 파괴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이 시장에 몰아치면 어떻게 될까?
“난 씬이 개발한 차세대 반도체를 경쟁사 제품들보다 싸게 팔 생각이야.”
“아니, 현우 씨.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양산 단계에만 접어들면 성능은 우리 쪽이 압도적이라고요.”
“그래서 더 많이, 더 싸게 파는 거야.”
수아의 걸음이 그 자리서 멈춘다.
“호, 혹시……?”
“맞아, 나 아닌 모두가 죽을 때까지 이뤄지는,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을 시작할 생각이야.”
치킨게임.
본디 두 대의 차량이 마주 보고 달려, 먼저 핸들을 트는 사람을 치킨(겁쟁이)이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반도체 시장의 치킨게임은 원가 이하로 제품을 팔아, 경쟁사가 쓰러질 때까지 출혈 경쟁을 하는 것을 뜻했다.
승자독식을 위해 2007년에 시작된 1차 치킨게임은 독일의 반도체업체인 키몬다가 파산함으로 막을 내렸고.
2010년에 벌어진 2차 치킨게임에서는 일본의 엘피다가 1,000억 엔의 손실과 함께 마이크론에 인수되며, 지금의 오성전자, 하이넥스, 마이크론 3파전 양상이 굳어지게 됐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에요. 앞선 기술이 있다 해도 그만한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빚더미를 끌어안을 뿐이라고요.”
“아니, 시장의 수요는 앞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야. 현재 주 수요처인 PC와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자율주행에도 자본이 몰리고 있으니까.”
내가 대답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단순한 예측이 아닌, 다가올 미래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하이넥스가 먼저 무너지면요? 경쟁사인 오성전자와 마이크론은 두 차례의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강자들이에요. 쉽사리 핸들을 틀지 않을 게 분명해요.”
“나도 알아. 거대 업체들은 적자를 무릅쓰고라도 제품을 찍으며 버티겠지.”
“그런데 왜……?”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업체들은 싹 쓸려 나갈걸? 특히 국가 보조금으로 버티던 중국 업체들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거야.”
조목조목 설명까지 해줬으나,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달싹거리고만 있었다.
“실패할까 불안해?”
“불안하다기보단, 겁이 나요. 치킨게임을 하려면 공장을 엄청나게 증설해야 할 텐데…….”
뒷말을 흐리는 그녀.
난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말을 툭 던진다.
“물량을 감당하려면 공장을 현행 4배 이상은 지어야겠지.”
“힉! 4배나요?”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반도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야. 지금의 증설은 그때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수아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갤 끄덕이긴 했다만, 여전히 가슴 한편에는 불안함이 남은 표정이다.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서 연구했던 내용을 확실히 점검해 줘. 그 연구는 이번 전쟁의 실탄이나 마찬가지니까.”
“으으…… 지금까진 제가 하이넥스의 이름뿐인 사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계획을 진행하려니까 없던 책임감이 솟아나네요.”
손을 들어 수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평소 머리 만지는 걸 싫어하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내게 머릴 기대온다.
“나를 믿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 * *
청와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정책비서실.
이곳의 기관장인 박현은 그날 신문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경제지를 먼저 집으려던 그의 손이 멈칫한다.
[안수철 정부 지지율 30% 선 붕괴! 이례적으로 한 달 새 20% 이상 추락해. 반등 조짐도 없어 청와대 노심초사.]
노골적인 정부 때리기 기사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는 경제지를 옆으로 치우고, 이번엔 조간신문을 집어 든다. 하지만 조간신문은 이보다 더한 광경이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닉스 공장 유치 실패에 이은 철수설까지? 뿔난 지역 주민들,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까지 첨예한 대립 끝에 시위는 악화일로로.]
같이 실린 사진은 진압대가 시민을 방패로 내리찍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른 신문들의 1면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지, 하나같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들뿐이었다.
“이런 썩을 놈들이 은혜도 모르고.”
닉스의 배터리 공장유치에 실패했을 때부터였다.
정부에 우호적인 언론들이 하나둘 돌아섰고, 이어서 인터넷 여론마저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상황이 그러니 높았던 지지율도 눈에 띌 정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을 몽땅 집어다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아, 평소 사무실에서는 손에 대지도 않았던 담배를 꺼내 든다.
불을 붙이려는 차에, 사무실 문이 덜컥 열렸다.
“박 실장, 있었구먼.”
들어온 이는 최진수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박현과 나이 차가 열 살 넘게 났기에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있었다.
박현은 얼른 담배를 집어넣고 일어섰다.
“아침부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자네 혹시 오늘 자 신문 봤는가?”
신문이라는 말에 박현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봤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더군요.”
박현은 억울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4개월 차에 접어든다. 무언가를 해내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언론들은 정부가 무능하다는 프레임을 씌우며 집중포화를 때려댔다.
“그럼 그 기사도 사실이란 말인가?”
“무슨 기사 말입니까?”
최진수가 꺼내 든 것은 방금 쓰레기통에 처넣었던 조간신문이었다.
“닉스가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거 말일세.”
“에이, 그럴 리가요. 보나 마나 언론에서 꾸며낸 선동 수단일 겁니다.”
“정말 확실한가?”
시선을 받은 박현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닉스의 강현우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은 한 달 전. 그의 심경 변화가 있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박현이 입을 다물자, 최진수의 표정이 빈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휴, 이거 완전 사면초가구먼, 사면초가야.”
“다른 문제가 더 있습니까?”
“있지. 아주 큰 문제가.”
최진수는 주변을 슥 훑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자네는 갑자기 언론이 돌아선 거나, 광화문에 보수단체들이 돌아가며 시위하는 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이상하다마다요. 닉스 공장 불발부터 붉어진 여론이 수그러들 기미가 없잖습니까. 보나 마나 누군가가 불씨를 계속 살리고 있는 겁니다.”
“범인을 찾았네.”
순간 박현의 머릿속에 닉스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최진수의 입에서 나온 범인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대현에서 돈을 대고 있었어.”
“대현요?”
갑자기 큰소리가 나자, 최진수가 급히 주의를 시키고 나섰다.
“목소리 좀 줄이게.”
“아,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라서…… 그런데 우린 대현 측에 척을 질 만할 일을 한 적 없잖습니까?”
“우리가 가만있다고 그들도 가만있으란 법은 없지.”
최진수는 신문을 넘겨 사설 부분을 펼친다.
그곳에는 무리한 전기차 보조금이 해외기업에만 득이 된다는 헛소리가 장황하게 쓰여 있었다.
“전기차 때문입니까?”
“그래, 그들은 나중이라도 우리가 전기차 시장을 열어버릴 것을 우려한 듯하네. 그래서 이참에 폭삭 주저앉혀서 식물 정부로 만들어버릴 셈인 거야.”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힘이 약해졌다곤 하나, 아직은 정권 초기입니다. 대현 하나쯤 물 먹이는 건 일도 아닌 거, 최 실장님도 잘 알잖습니까?”
“대현 단독이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이 야당과 함께라면 어떨 거 같나?”
현재 국회는 여소야대 정국이다.
그 말인즉, 야당의 동의 없이는 사소한 법안 하나도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안수철 정권은 여당에도 반쪽짜리 지지만 얻고 있었으니. 상황이 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법안을 막고, 언론을 통해서 무능 프레임을 씌울 셈이군요.”
“언론뿐만이 아니야. 인터넷 여론도 그들 손아귀에 들어갔어. 댓글이나 SNS, 커뮤니티까지, 조직적인 여론조작 활동이 포착됐어.”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들이야. 단기간에 잡아내는 건 힘들다고 봐야겠지.”
안수철 정부의 지지층은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층이다. 만약 그들의 주 무대인 인터넷까지 점령됐다면 지지율은 앞으로도 회복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박현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큰 포부를 안고 맡은 자리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때 최진수가 탁자를 쿵, 소리가 나게 내려친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네.”
박현은 떨궜던 고개를 쳐든다.
“어떤 방법입니까?”
“우린 인터넷 여론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곳을 알지 않는가.”
“여론을 뒤집는다?”
고갤 갸웃하던 박현이 ‘아!’ 하는 감탄사를 터뜨린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곳이 맞네. 대선 막판에 폭풍을 일으켰던, 닉스에게 부탁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