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78화
누나의 결혼식은 축복 속에서 치러졌다.
친인척이 없는 우리 측 하객이 적어 다소 허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닉스의 임직원들과 더불어 SG그룹과 KG그룹에서도 사람을 보내와 자리가 꽉꽉 들어찬 채로 진행됐다.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두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몰디브로 떠났다.
그로부터 사흘 뒤.
구 닉스 지진연구소.
-강 대표님, 배터리 공장을 미국에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신형 배터리 공장은 미국 네바다주에 건설될 예정입니다.”
-하, 실망입니다. 배터리 공장이 한국에 들어서면 국가적으로도…….
“저기 박현 실장님, 여기서 국가가 왜 나옵니까? 혹시 제가 애국심을 가지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는 소립니까?”
-꼭 그런 뜻이 아니라 이왕이면 국가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선택했으면 좋았다 이겁니다.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저는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경영자입니다. 애국지사나 기부천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정부 측에서도 최대한의 지원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지원? 하,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군요. 이보세요, 실장님. 당신네가 입방정을 떨어서 공장 근처의 땅값이 어찌 된 줄은 알고 계십니까? 10배를 넘어, 지금은 30배까지 오른 곳도 있습니다. 이런 곳을 매입해서 공장을 지으란 말입니까?”
-부지는 저희도 협력해서 잘 해결하는 방안으로…….
“600만 평을 어디서 구하시려고요? 땅 주인에게 강제로 빼앗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어찌 강제로 하겠습니까. 잘 협의해서 적정한 가격에 거래를 유도하는 것이죠.
“적정은 무슨. 보나 마나 정부에서 정보 새나갔을 때 정부관계자들이 뒤로 꿀꺽했을 텐데, 그들이 땅을 잘도 내주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뚝 끊어진다. 이어서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만 몇 번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부지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는 뭘 보여줬습니까? 전기차 관련 법안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고 뒤늦게 택시 운수법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던데,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아시겠지만 법안 통과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다 한들, 국회에서 틀어막고 있으면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닉스가 국내 공장을 짓는다면 국회도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공장을 지어주면 국회가 움직인다?
개도 안 웃을 소리다.
배터리 공장이 한국에 지어지면 그 공은 오롯이 정부 몫이 될 터인데, 정부의 실패만을 바라고 있는 야당이 대현에 척을 지면서까지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가 말했었지요? 닉스와 대현 중, 한 곳만 선택하라고요.”
-너무 극단적인 말씀이십니다. 정부가 특정 기업 편을 드는 건 도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무엇이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중립이라는 허울 좋은 회피책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회피책이라니요. 그건 오해입니다.
“오해라면 더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군요. 앞으로는 연락할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강 대표님, 잠깐만 제 말을…….
뚝.
통화가 끝내자 기다렸던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온다.
“휴우-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리 현실감각이 없어서야.”
정부가 밀어붙였던, 닉스의 600만 평 규모의 공장 유치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야당은 이 건을 잡고 정부를 물어뜯기 시작할 거다.
거기에다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과 함께, 땅 투기꾼들까지 가세할 테니 지지율 폭락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부는 저런 태평한 대응이라니, 뭘 믿고 저러는지 궁금할 정도다.
“왜 그리 열을 내고 계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본다.
“어, 수아야. 언제 왔어?”
“한참 됐죠. 누구 씨가 전화에 열 낸다고 몰랐던 것뿐이지.”
“그랬었나.”
내가 침대에 걸터앉자, 수아가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야기가 잘 안 됐어요?”
“딱히 안 된 건 아냐. 처음부터 공장은 미국에 지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리 열을 냈어요?”
“조금 답답해서였으려나.”
“정부가 답답한 것과 현우 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의 닉스는 한국쯤은 포기해도 그만인 작은 시장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아무래도 내 마음 한편에 한 톨만큼의 애국심은 있었나 보다. 그러니 저 치들이 개판으로 정치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지는 거겠지.
자리서 일어서려는데 침대에서 부르르 하는 진동이 느껴진다.
수아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보여준다.
[청와대 정책실장 박현]
“안 받을 거죠?”
“꺼버려.”
그녀는 능숙하게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린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와 내 셔츠 깃을 잡아당겨 왔다.
“머리 아픈 일은 그만 접어둬요. 이제부터는 저랑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하니까요.”
그녀는 나를 향해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다가선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내 코를 취하게 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허리를 감아가던 차에, 그녀가 말했다.
“드디어 씬의 동기화 준비가 끝났어요.”
“무슨 동기화?”
“이번에 인수했던 새로운 인공지능 말이에요.”
“아, 그거…….”
내 떨떠름한 대답에 수아가 내 턱을 살살 간질여 온다.
“어라? 혹시, 뭔가 다른 걸 기대한 거예요?”
“딱히 기대했다는 건 아니고.”
“자, 어서 연구실로 가요. 오늘 밤은 새하얗게 불태워 보자고요.”
* * *
9대의 슈퍼컴퓨터와 수천 개의 CPU, GPU.
연구소의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인공지능을 위해서 작동 중이다.
“이번에 인수한 델류즈는 본디 IBM의 사내 벤처로 시작된 업체야. 델류즈는 촉망받는 인공지능 분야였기에 많은 지원을 받고 연구개발에 나섰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인공지능 연구는 쉽게 완성되는 게 아니잖아.”
수아는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쉬웠으면 누구나 성과를 냈을 테니까요.”
“특히 델류즈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 발전하는 인공지능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많은 데이터를 쌓아야만 했어. 하지만 지금의 IBM사에는 그런 데이터를 쌓을 만한 방법이 전무했지.”
“그래서 델류즈 팀이 IBM에서 튕겨 나온 건가요?”
“아니. IBM사가 바보도 아니고 인공지능 분야 업체를 그리 쉽게 내보낼 리가 있나.”
“그럼요?”
대화하면서도 부지런히 키보드를 조작한다.
씬을 델류즈사에서 오픈한 서버로 연결하는 키를 입력하는 작업이었다.
“델류즈 프로젝트팀은 독자적으로 타사와 협업할 준비를 했어. 자신들의 목적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완성을 위해서 말이야.”
“스스로 IBM에서 나왔다는 거군요.”
“맞아.”
“그렇다면 많은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업체를 골랐을 텐데…….”
“응. 그래서 고른 업체가 애플이야.”
수아는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마주친다.
“아! 애플폰의 시리라면 방대한 대화 데이터를 축적하기 최적의 방식이겠네요.”
“맞아. 하지만 결과적으로 애플은 델류즈를 거부했어.”
“왜요?”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애플은 IBM과 법적 분쟁을 겪으면서까지 델류즈를 끌어안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다고 생각했나 봐. 초급 인공지능쯤은 자체적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 때문에 델류즈 프로젝트팀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고.”
“충분히 애플다운 행동이네요.”
이야기하는 사이에 동기화 작업이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메인 모니터에는 델류즈사와 직접 통신 연결이 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동기화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나와 수아는 숨을 죽인 채 씬의 행동을 지켜봤다.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우리가 떠먹여 주는 데이터에만 반응하던 씬이다. 녀석은 과연, 새로운 인공지능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컵라면이 익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별다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결상태를 확인하려던 차에, 수아가 소리쳤다.
“현우 씨 이것 좀 보세요!”
“뭔데?”
급히 시선을 보조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익숙한 붉은 볼드체가 깜빡이고 있었다.
[Hello, World!]
Hello, World!는 프로그래밍에서는 쓰이는 일종의 약속 언어다. 의미 없이 쓰이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첫만남, 첫배움, 첫걸음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 음…… 현우 씨, 어떻게 할까요?”
“일단 통성명부터 해보자.”
“알겠어요.”
수아는 단어를 만들었다, 지우길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아주 평범한 문장을 완성했다.
[내 이름은 유수아야. 네 이름은 뭐지?]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시간이 필요한가 싶어서 기다려도 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씬! XIn! 질문에 대답해 주겠어?]
[여기는 닉스, 대화를 원해. 씬, 듣고 있다면 응답해 줘.]
몇 번이나 다시 대화를 시도했지만 처음 출력한 [Hello, World!]라는 문구에서 변화가 없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요?”
“글쎄다. 나도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처음이라.”
“정말 이상하네요. 동기화는 정상적으로 끝났고, 시스템도 대기 상태인 게 확인까지 됐는데…….”
“혹시 입력 방식의 문제 아닐까? 텍스트 방식이 아니라 음성으로 대화해야 한다거나.”
음성이라는 말에 수아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다.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여요. 애플의 시리도 음성입력 방식이잖아요.”
“좋아. 바로 해보자고.”
수아는 잽싸게 마이크를 준비하고 다시 모니터 앞에 섰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마이크를 내게 넘겨 준다.
“왜?”
“현우 씨가 해봐요.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라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을 리 있나.
일단 통성명부터 다시 해보기로 한다.
“난 강현우다. 넌 누구지? 이봐. 들리면 대답을 해!”
역시 반응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 후로도 해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씬과 대화를 시도했다.
컴퓨터 분야에서 쓰이는 2진수나 16진수, 어셈블리어, C언어, JAVA, 심지어는 모스부호까지 동원해 봤으나 모니터에는 [Hello, World!]라는 문구만 떠 있을 뿐이었다.
상황에 진전이 없자, 의욕적으로 달라붙었던 수아도 백기를 들었다.
“으아, 저는 포기예요.”
“이 정도까지 했는데 반응이 없다는 건 실패라고 봐야겠네.”
“그러게요. 이젠 더해볼 의욕도 안 나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녀는 상심한 듯 어깨가 축 늘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벌써 가려고?”
“예, 너무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서 잘게요.”
“그래, 수고했어.”
쿵.
수아가 연구실을 빠져나가자, 유독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접근 방향이 잘못된 걸까?”
상대는 미래에서 왔을 거라 추정되는 인공지능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지도.
혼자서는 딱히 해볼 만한 것도 없었기에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책상 위 널려있는 에너지 드링크를 싹 치우고 엉망으로 뒤엉킨 마이크 선을 둘둘 감아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모니터 옆 피자 박스를 치우려던 차에 멈춰 있던 화면이 한 번 깜빡거린다.
“음?”
손이 멈칫한 사이에 드르륵, 하는 떨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성스러운 기계음.
-반갑습니다, 사용자님. 저는 적응형 인공지능 씬입니다.
“헙! 왜 이제서야……?”
눈을 부릅뜬 채 모니터를 쳐다본다.
-대화할 준비가 되셨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속으로 삼킨다. 이어서 억지로 크게 심호흡을 반복한다.
진정하자, 강현우. 정신 똑바로 차리는 거야.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노려본다.
“후우, 하…….”
미지와의 조우.
그 첫걸음을 내디딜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