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77화
순백의 장식이 시선을 사로잡는 대연회장.
높이 솟은 천장에는 다섯 쌍의 샹들리에가 서로의 화려함을 경쟁하듯 빛을 뿜어댔으며, 야트막하게 솟은 무대 주위로는 생생한 꽃들이 화원처럼 흐드러져 있다.
이 아름다운 것들 사이로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바라본다.
“현우 씨, 어때요? 저 잘 어울려요?”
하얀 면사포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말을 잊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듣고 있어요?”
“으, 응…… 당연하지.”
“그런데 왜 말이 없어요.”
이럴 땐 이상하게 장난기가 솟아난다.
“왜 그랬다고 생각해?”
손을 뻗어 수아의 얼굴을 매만진다.
턱선을 따라 점차 입술로, 그러다 한 걸음 다가가니 눈을 꼭 감는 모습이 퍽 귀엽다.
“수아야.”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눈을 감은 그녀가 움찔한다.
“못 보던 다크서클이 많이 내려왔네. 요즘 너무 늦게 자서 그런 가보다. 다음부터 11시 전에는 꼭 자자, 알겠지?”
방금까지만 해도 미소로 날 쳐다보던 그녀가, 이제는 주둥이가 솟은 채로 삐쳐서 노려보고 있다.
난 그런 그녀의 입을 툭툭 두드려 다시 넣고서 말했다.
“면사포는 어디서 구해왔어?”
“무대 뒤편에 떨어져 있던 걸 살짝 가지고 왔어요.”
내 앞에서 두 팔을 펴고 빙그르르 돌아 보인다.
그녀의 옷차림은 결혼식 하객의 표준인 단색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면사포와 예식장 조명까지 합세하자 제법 그럴싸한 느낌이 났다.
“면사포 하나로 분위기가 확 사네, 원피스와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고.”
“정말요?”
“톱디자이너의 눈이니까 확실해.”
“현우 씨는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산업 디자이너 아니었어요?”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깔깔대던 그녀는 가방에서 기다란 무언가를 꺼낸다. 그건 닉스폰에 세트로 제공되는 셀카봉이었다.
막대를 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으로 붙어 온다.
“현우 씨, 좀 더 웃어봐요.”
“이게 한계야.”
“입만 웃지 말고 눈도 같이 웃어봐요. 자, 이렇게. 여길 보고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봐요. 하나, 둘, 셋. 스마일.”
찰칵. 찰칵.
입꼬리가 마비될 정도로 웃은 뒤에야 조형물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자들은 왜 이리 셀카에 집착하는 걸까?
셀카봉 열풍을 타고 닉스폰 2세대의 월간 판매량은 1,000만 대를 돌파했다. 지금과 같은 인기가 고무적이긴 하지만, 정작 기획한 나조차 이런 현상을 납득 못 하고 있었다.
뭐, 어때. 물건만 잘 팔리면 그만이지.
수아는 사진을 수십 장이나 찍었음에도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면사포를 벗어든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요.”
“벌써?”
“벌써라뇨 조금만 지나면 붐벼서 제대로 볼 시간도 없다고요. 자, 어서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다섯이나 되는 메이크업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찍어 바르고, 덧대고, 머리카락까지 뒤집으며 말이다.
오늘 아침부터 이 짓을 시작했으니 벌써 3시간째 이러고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공을 들여 봐야 원판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슬쩍 앞으로 돌아가 얼굴을 확인한다.
그런데 자리에는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엥? 여기 있던 강현경 씨 못 보셨나요?”
다소곳이 앉아 있던 미인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려댄다.
“애송이 펀치를 날리는 거 보니 누나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오늘 애송이 펀치에 쓰러져 볼래?”
난 킥킥대며 옆자리에 앉는다.
“이야. 화장을 괜히 하는 게 아니구나. 이 정도면 사기죄로 잡혀가는 거 아냐?”
“얘도 참. 계속 웃기지 마. 화장 번지잖아.”
누나는 억지로 웃을 때가 많았다.
백화점에서, 마트에서, 심지어는 집에서까지 습관적으로 그런 웃음을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누나가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웃었으면 좋겠다.
“누나 시집 보내면 이제 좀 한시름 놓으려나?”
“얼씨구, 누가 보면 네가 날 키운 줄 알겠어.”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에 수아가 옆으로 쪼르르 다가온다.
“언니, 너무 예뻐요!”
“수아도 같이 왔구나.”
“헤헤, 언니 보고 싶어서 빨리 왔죠.”
수아 뒤에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거 같다. 9개가 달린 여우 꼬리말이다.
여자들끼리 떠드는 동안, 구석에서 쭈그러져 있는 오늘의 다른 주인공을 만나러 갔다.
“매형.”
“어, 어…… 현우 왔냐.”
몸을 일으킨 매형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대통령과 독대했을 때도 안 떨던 분이, 지금은 신부보다 더 긴장한 거 같습니다?”
“야 인마, 넌 안 이럴 거 같지?”
“전혀요.”
“그래, 두고 보자.”
내가 킥킥대며 웃자.
“그만 웃고 따라와.”
“왜요?”
매형은 내 등을 떠밀어 밖으로 끌고 나간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누군데 분위기 빡 잡고 그럽니까? 무섭게시리.”
굳은 표정의 매형은 날 귀빈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던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박승구 대법관.
바로 매형의 아버지였다.
그는 과거, 매형과 누나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해 두 사람이 해외로 도피성 이민까지 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인간은 금수와도 같다. 너희가 주제를 알고 있다면 다시는 준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알겠느냐?
그가 했던 말들은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박혀 있다.
박승구 씨, 아직도 제가 금수로 보이십니까?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말들이 너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어 삼켜냈다. 어차피 그에겐 기억조차 없는 말 아니던가?
“아버지, 이쪽은 저희 처남입니다. 따로 소개해 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매형의 목소리가 낯설다.
건조한 것을 넘어서 거미줄처럼 갈라진 땅에서 소리가 나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승구 대법관은 웃으며 내게 손을 뻗어 온다.
“반갑습니다. 저는 준오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닉스의 강현웁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가 언제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나이 차가 배는 될법한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몸을 낮춘다.
이런 모습이 오히려 가증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내 지위가 그때와는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바뀌어버린 것을.
오늘같이 좋은 날, 얼굴 붉히기도 싫었기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는다.
“언제 시간이 나실 때 본사에 방문해 주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형식적으로 오가는 인사말이었으나, 그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후에도 영양가 없는 인사말이 한참이나 오간다.
그렇게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때쯤, 박승구 쪽에서 슬쩍 운을 띄운다.
“그건 그렇고, 강 대표님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닉스라는 신생기업을 이리 크게 성장시키다니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죠.”
“운이라뇨. 지금 같은 시대에 닉스의 성장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런 기적을 어찌 운으로 만들겠습니까? 이번에는 신소재 배터리로 자동차 업계를 쥐락펴락하신다지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하하하, 듣던 대로 겸손하시군요.”
난 대화를 그만하고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박승구는 저 혼자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번 일 때문에 주변에선 난리도 아닙니다. 우리 집안에 쌍으로 경사가 났다고 말입니다. 아 참, 들으셨습니까? 제가 이번에 대법원장 후보에 들었습니다. 법조계 집안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지요.”
“축하드립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형식적인 멘트다.
박승구는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정부 측에서는 제가 나서서 대표님을 좀 설득하면 어떻겠냐는 눈치더군요.”
“뭘 설득합니까?”
“이번 배터리 공장 말입니다.”
참다못한 매형이 꽥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
“준오, 넌 끼어들지 말고 가만있어라.”
“오늘은 제 결혼식입니다. 이런 날까지 그러셔야겠습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 아니더냐!”
강렬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본 박승구는 다시 웃는 낯으로 날 쳐다본다. 그 모습이 흡사 이중인격자 같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제 아들놈이 무례를 저질렀군요.”
“무례요?”
적의가 가득한 말투에 그의 눈이 확 커진다.
“무례는 박준오 부사장이 아니라 그쪽이 했겠죠. 오늘 같은 날 그냥 업무 이야기도 아니고 청탁을 넣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청탁이라뇨. 이건 그저…….”
“웃기지도 않군요. 공사비만 수조가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제가 그쪽 청탁을 듣고 해주리라 생각했습니까? 이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군요.”
박승구의 표정이 시커멓게 썩어간다.
내가 이리 강하게 나올 줄 몰랐나 보다.
“제겐 이 조그만 나라의 판사니 대법관이니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은 박준오 부사장의 부친이자 사돈일 뿐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그게…….”
“한 번만 더 주제넘게 선을 넘으려 들면, 그날이 당신 옷 벗는 날이 될 겁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를 두고 귀빈실을 나와 버렸다. 그러자 뒤늦게 매형도 날 따라 나온다.
“현우야 미안하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네게 소개도 안 했던 건데…….”
“형이 뭐가 미안합니까?”
“우리 부모님이 현경 씨에게 막말을 어디 한두 번 했었냐? 그런데 결혼식 날까지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네가 폭발할 만도 했지.”
누나에게 막말을 했었다고? 처음 듣는 소리다.
지금은 누나가 운영 중인 카페 체인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대기업 뺨치는 수준이다. 아무래도 그 전에 일이 있었나 보다.
“휴…… 이놈의 집안. 권력욕에 미쳐서 다들 정상이 아니야. 그놈의 명문 법조계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뭐 그리 중요한지. 네가 조금만 이해해 주라,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런 날 분위기 망친 제가 더 죄송하죠.”
“고맙다. 진짜, 내 생각해 주는 건 너나 현경 씨 밖에 없는 거 같다.”
말하면서도 표정이 서글퍼 보인다.
난 그런 매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집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좋은 소식? 혹시 배터리 공장 한국에 지을 거냐?”
“제가 미쳤습니까? 그걸 한국에 짓게요.”
애초에 한국에는 배터리 공장을 지을 생각조차 없었다. 한국의 좁은 땅덩이에는 600만 평이나 되는 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무게가 많이 나가는 차량용 배터리를 선박으로 실어 나르는 건 비효율의 극치였다.
“역시 정부와 언론이 손잡고 김칫국 마신 거네.”
“아주 김칫국은 아닙니다. 그 대신 전기차 공장이 크게 들어설 거니까요.”
“볼보라인 증설 말하는 거지?”
“아뇨. 볼보는 상용차와 엔트리급 모델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지어지는 공장은 닉스 마크를 단 고급형 전기차를 생산할 거고요. 아시다시피 한국은 전기차 공장 돌리기 최적의 장소 아닙니까.”
한국에는 핵심부품을 생산하는 양대 전자회사가 있을뿐더러, 반도체 수급을 담당하는 하이넥스까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타사 공장이 많은 만큼, 차량 부문 인재 수급에도 압도적인 유리함이 있었다.
“배터리 공장 설립 건으로 최대한 여론몰이를 할 겁니다. 정부의 무능으로 한국에 지어질 배터리 공장이 미국에 지어졌다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매형은 손가락을 딱 튕긴다.
“아하, 그때 전기차 공장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구나?”
“예, 지지율이 폭락하고 성난 민심을 한 번 경험해 보면, 소극적인 안수철 정부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도 안 움직이면 진짜 답도 없는 거고.
“흐흐, 계획대로만 되면 대현은 난리가 나겠구만. 안방에 배터리 공장 지어지는 걸 피하려다가 전기차 공장이 들어서는 꼴이니까.”
난 웃어대는 매형을 옆구리를 툭툭 쳤다.
“이제 좀 새신랑다운 표정으로 돌아왔네요. 아니지, 새신랑치곤 좀 음흉한 느낌이려나?”
“이놈이 어른을 놀리고 있어.”
“이제 장가가면서 어른은 무슨 어른입니까?”
매형은 갑자기 헛웃음을 지으며 내게 어깨동무를 해온다.
“고맙다, 현우야.”
“어허, 징그럽게 왜 이럽니까?”
“왜? 우리 처남에게 친한 척 좀 하면 안 되냐?”
떼어내려 할수록 거머리처럼 따라 붙어 온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 생각이 나네.”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1억짜리 수표를 들고 와선 100억을 대출 내달라질 않나. 어휴, 그때 잡혀서 지금까지 얼마나 굴렀던지. 내가 과로로 일찍 죽으면 다 네 탓이니까 그런 줄 알아.”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땐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게 최선이다.
“이번에 15일간 신혼여행 가시잖습니까. 일 생각하지 말고 푹 쉬다 오세요. 완전 푹.”
“어이쿠. 우리 강현우 대표님, 눈물 나게 고맙습니다. 전화기 두고 갈 테니까 그리 아시지 말입니다.”
“에이,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매형 없으면 업무 마비됩니다.”
“엄살떨기는. 준비해 달라고 했던 건은 다 쳐내고 가니까, 절대로 연락하지 마라. 알겠지?”
“음? 제가 뭘 준비해 달라고 했었죠?”
매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시켜놓고 기억도 못 하지?”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부탁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이 악덕상사 같으니라고.”
난 머쓱해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인공지능 관련 기업들, 최대한 인수해서 빼 오라고 했잖아.”
“아하, 그랬었죠.”
인공지능 분야는 모든 IT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는 터라, 어지간해서는 매물이 안 나오는 편이다.
그 때문에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내가 딱 좋은 놈을 건져놨지. IBM사에서 키운 그룹인데, 사내정치에 밀렸는지 떨어져 나왔더라고. 그걸 내가 날름 주웠다는 거 아니냐.”
“어떤 분야의 인공지능인데요? 딥러닝? 인지 컴퓨팅?”
내가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자 매형은 난처한 듯 뺨을 긁적인다.
“글쎄, 내가 이 분야는 잘 몰라서. 얼핏 듣기로는 사람과 대화를 목적으로 개발한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