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76화
[완성형 꿈의 배터리 등장!]
[닉스 에너지, 신형 리튬에어배터리 성능 공개. 기존 리튬이온보다 부피 대비 4배, 무게 대비 6배 용량과 더불어 약점이었던 충·방전 효율도 99.4%까지 증가.]
[신형 리튬에어배터리 양산 단계 접어들어. 기존 공정을 그대로 쓸 수 있어 올해 말까지는 전 세계에 보급될 듯.]
[볼보와 테슬라에 이어 폭스바겐 그룹, 도요타, GM, 혼다까지 신형 전기차 개발에 착수.]
[내연기관 자동차의 몰락 가속화될까? 전기차 공포에 포드 주가 하루 새 17% 하락.]
[닉스 에너지, 올해까지 신형 배터리 300만 개 양산 가능한 시설 갖출 것.]
닉스의 신형 리튬에어배터리 보급 소식은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기존의 1세대 전기차가 교환소 인프라의 문제로 보급이 더뎠다면, 이번 2세대 전기차는 가정에서도 충전할 수 있었기에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모았다.
전기차에 관심을 보인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먼저 배기가스에 민감하던 환경단체들이 앞다투어 내연기관 차량의 퇴출과 전기차 활성화를 지지했으며, 거기에 몇몇 유럽국가들이 동참하여 국가 차원에서 전기차 도입을 검토하고 나섰다.
전 세계가 내연기관 자동차에서 친환경 전기차라는 새로운 전환점에 주목하는 동안, 단 한 곳에서만 다른 의미로 이번 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닉스의 배터리 공장 소재지인 한국이었다.
닉스 에너지 본사 5층에 마련된 응접실.
말이 응접실이지 책상과 의자 몇 개 가져다 둔 게 전부인 투박한 공간이다.
이곳에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내가 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의 박현 정책실장이었다.
톡. 톡. 톡.
초조한 탓에 애먼 책상만 연신 두들긴다.
기약도 없이 응접실에서 기다린 지도 벌써 20분째. 홀짝이던 찻잔은 비어버린 지 오래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제아무리 그라도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이번 전기차 이슈의 중심인 닉스였기 때문이다.
‘혹시 날 피하려는 건 아니겠지?’
비서실 정책실장은 새 정부의 정책을 쥐고 흔드는 자리다. 정책 한 번으로 수많은 기업의 희비가 엇갈리는 만큼, 기업가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직접 왔는데 이런 대접을 하다니, 닉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설마?’
머릿속에서 최악의 사태가 떠오르려 하자, 박현은 머릴 털어 생각을 흩어버린다.
그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슬그머니 열린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체구의 깡마른 사내. 닉스 에너지의 손만호 사장이었다.
“어이쿠, 박 실장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좀 늦었지요?”
박현은 상대의 눈빛부터 살펴본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오긴 했다만 그렇다고 다급한 기색은 아니었다. 버선발로 자신을 맞이하던 다른 기업가들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일이 바쁘셨나 봅니다?”
“어휴, 바쁘다마다요. 혹시 공장 입구서 시위하는 사람들 못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친환경 배터리 공장 설립 찬성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걸 보니 환경단체 사람들 같던데…….”
손만호 사장은 고갤 절레절레 흔든다.
“그게 아니면 어디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이 근방에 땅을 싹쓸이한 투기꾼들입니다.”
“투기꾼요?”
“예, 벌써 공장 인근 땅값은 10배 넘게 오른 곳도 있더군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디서 정보가 흘렀는지…… 혹시 정부 부처 쪽에서 흘러간 거 아닙니까?”
박현은 뜨끔해서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린다.
“그럴 리가요. 정부는 아직 공식 발표를 내놓은 사실이 없습니다.”
공식 발표를 내놓은 게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선 전부터 닉스의 첨단 공장을 유치하겠다고 앵무새처럼 떠들어 댔으니, 배터리 공장 증설 소식과 동시에 투기꾼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휴, 저놈의 투기꾼들 시위구호만 들어도 징글징글합니다. 자기들이 떠든다고 닉스가 공장을 짓는 거도 아니고, 어디서 저런 헛소문이 새나간 건지…….”
“헛소문요?”
“예, 헛소문이지요. 저희는 아직 공장 설립에 관한 계획조차 없습니다.”
당연히 공장 증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계획조차 없다니? 이거 큰일이다 싶어 얼른 말을 붙인다.
“현재 닉스 에너지 공장에서는 연간 40만 개씩 자동차용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지요?”
“정확히는 자동차용 A클래스 배터리 42만 개를 생산합니다.”
“흠흠, 아무튼 올해까지 신형 배터리를 300만 개씩 생산하겠다고 발표하셨던데, 물량을 맞추려면 당연히 공장 증설이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손만호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갤 갸웃거린다.
“굳이 공장을 증설해야 합니까? 그러지 않고도 신형 배터리를 양산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닉스가 최대주주로 있는 파나소닉이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인 KG화학에 외주를 줘도 되는 부분이죠.”
“아니, 잠깐만요. 닉스는 자동차나 배터리 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했잖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저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습니다만?”
박현은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밀어 넣고 말했다.
“분명히 그러셨습니다. 닉스의 CEO인 강현우 대표님께서 직접 말입니다.”
강현우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박현.
손만호 사장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며 말한다.
“아하, 우리 대표님과 약조를 하신 내용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손만호의 표정으로 보건대,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했던 게 분명했다.
‘이 너구리 같은 새끼가…….’
평소의 박현이었다면 수백 번은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났겠지만, 기적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고 또 참아냈다.
이번 건은 전 국민의 시선이 쏠린 안건이다.
거기에다가 오늘 아침에는 대통령이 직접 챙기라고 지시까지 했던 일 아니던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닉스에서 확답을 받아야만 했다.
“VIP께선 닉스의 신공장 설립 발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대강의 윤곽만이라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떠신지…….”
“허허, 저희 대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와대에서 전기차 관련 법안을 언제 통과시켜 줄지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전기차 법안 이야기가 나오자 박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간다.
사실, 그도 닉스가 공장 설립 건을 두고 전기차 법안 요청을 해올 것이란 건 빤히 예상했었다. 문제는 이걸 알고 있더라도 뾰족한 답이 없다는 거였다.
억지로 전기차 활성화 법안을 통과시키자니 대현과 국회, 친기업 성향의 언론까지 정부를 때려댈 게 뻔했다. 그렇다고 법안에 손 놓고 있자니 닉스를 설득할 구실이 없었다.
결국, 박현은 빈손으로 와서 닉스를 설득해야만 했는데. 이게 말이 쉽지 돈 한 푼 없이 슈퍼에서 빵을 사고 거스름돈까지 남겨오라는 말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박 실장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예, 말씀하시지요.”
“법안 관련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저도 보고를 올려야 하는 처지라서요.”
“아, 그건 말이지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와 협상 중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여소야대 정국이라 단기간 통과는 좀 힘들 듯합니다.”
“법안 통과가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박현은 급히 말을 받아낸다.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시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어허, 손 사장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정권 초 허니문 기간에도 법안 통과를 못 시킨다면 그 이후라고 가능하겠습니까? 이래서야 지난 정권과 다를 게 뭔지, 쯧.”
가까스로 유지하던 박현의 표정이 쩍쩍 갈라진다.
상대는 명백히 정부를 비꼬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 무엇 하나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참담하고도 참담했다.
‘내가 이래서 법안 일부라도 통과해달라 했었건만…….’
박현은 이번 협상을 위해서 라이드셰어링 법안만이라도 우선해서 통과를 시키고자 했었다. 운수법은 그나마 대기업과는 연결고리가 약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택시 업계의 반발을 우려해 보류시키고 말았다.
모든 선택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럴 땐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우유부단함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표정을 잔뜩 굳힌 박현이 자리서 일어선다.
“벌써 가십니까?”
“일이 있어서요. 차는 잘 마셨습니다.”
문을 나서려는 그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결정이 나기 전에 빨리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
박현은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 * *
언론은 연일 배터리 공장에 관한 기사를 쏟아 냈다.
공장 하나로 직접 고용되는 근로자만 2만 명, 간접 고용 근로자까지 합하면 5만 명이 넘어간다는 이야기와 함께, 배터리가 부산 신항을 통해서 수출되는 만큼 경제적 파급력이 30조 이상이라는 소설까지.
분위기만 봐서는 닉스가 열댓 번은 공장을 짓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정부에서도 이번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여, 비공개 대책회의를 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는 만큼, 닉스가 배터리 공장을 짓게 할 만한 유인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회의는 진행되는 내내 같은 곳을 공전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정부의 기조가 닉스와 대현, 어느 한 곳도 척을 지지 않는 결과만을 원했으니. 답을 내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셈이다.
“전기차 보조금을 조금 줄이는 선에서 합의를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금 줄이는 수준으론 안 됩니다. 국회에서 분명 말이 나올 게 뻔해요. 차라리 전기차 보조금 적용 기준을 국산차에 맞추는 방향으로…….”
“어허, 대현 눈치를 보다가 닉스가 돌아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번 공장 유치에 전 국민의 시선이 몰렸어요.”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만 다섯 시간이 넘게 오가자, 사람들도 하나둘 핑계를 대며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회의를 주최했던 박현의 속만 타들어 가는 가운데, 비서 한 명이 살그머니 회의실로 들어온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박현에게 다가온 비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뭔데 호들갑이야?”
“미국에서 열린 전기차 포럼에서 닉스의 강현우 대표가 신공장에 관한 발언을 했습니다.”
회의실의 소란이 뚝 끊긴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관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비서는 어쩔 줄을 몰라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댄다.
“발언에서 특별한 부분이 있었어?”
“그게…….”
“답답하니까 빨리 말 해봐!”
박현의 다그침에 비서가 어렵게 말을 잇는다.
“닉스의 신공장을 미국, 중국, 한국 중에서 한 곳을 선정해서 짓겠다고 합니다. 예상 규모는 600만 평이라고…….”
“6, 600만 평?”
기존의 닉스 배터리 공장의 딱 10배다.
그런 공장이 한국에 지어진다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었다. 진짜 핵심은 갑자기 등장한 미국과 중국이라는 키워드였다.
차라리 공장을 안 지으면 모를까, 신공장을 타국에 빼앗기는 모양새가 된다면,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될 게 뻔했다.
‘놈, 일부러 외주라는 블러핑을 쳤구나.’
박현은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 휴대폰을 집어 든다.
[닉스 손만호 사장.]
뚜우- 뚜우-
이어지는 신호음에 피가 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받아라, 제발 받아라.”
그러나 신호음이 끝날 때까지 전화는 연결되지 못했다. 이후 세 번이나 다시 걸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전에 받아 뒀던 번호를 선택했다.
[닉스 강현우 대표.]
뚜우…….
신호음이 두 번도 채 울리기 전에 딸깍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니얼입니다.
“니, 닉스의 강현우 대표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전화 거신 분은 누구십니까?
“청와대 정책실장인 박현입니다.”
-정책실장? 아하, 그때 그분이시군요. 그런데 어떤 용무로 제게 전화하셨습니까?
그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를 꽉 문 채 말을 잇는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겁니까? 갑자기 미국에 공장을 짓는다고 하면 저희 입장이 어떻게 됩니까?”
-아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난 또 뭐라고. 미국서 열리는 포럼에 참석했으니 립서비스 좀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희망적인 소식에 박현의 목소리가 떨려간다.
“그 말씀은 신공장을…… 한국에 짓는 게 맞습니까?”
-한국에 공장을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이런 개떡 같은 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박현은 인상을 구긴 채 재차 물었다.
“말 돌리지 마시고 확실한 답변을 해주십시오.”
-닉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단 소립니다. 지금의 한국 정부처럼 말입니다.
“그게 무슨……?”
수화기 너머에서 약간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넘어온다.
-닉스냐, 대현이냐.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택해 주십시오. 제 인내심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