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75화
“현우 씨, 일어나 봐요. 어서요.”
나긋나긋하면서도 달달한 음색이 귓가에 파고든다.
눈을 뜨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수아?”
“저 말고 누가 현우 씨를 깨우겠어요.”
“미안한데 오늘은 조금만 더 자자. 어제 너무 무리했거든…….”
이불을 끌어 올리고 반대로 돌아눕는다.
온몸을 써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그녀는 집요하게 잠을 깨워댄다.
“아, 정말. 일어나셔야 한다니까요.”
“나 피곤해서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금만, 응?”
“씬이 가동을 시작했다구요!”
순간, 내 안에 있던 잠이라는 놈이 단숨에 사라졌다. 난 몸을 스프링처럼 튕겨 침대에 앉은 후 말했다.
“진짜 씬이 반응했어?”
“제가 없는 말을 하겠어요? 자, 어서 가요. 어서요.”
씬은 리튬에어배터리 연구를 마지막으로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침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씬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IT, 기계공학, 문학, 생명과학, 심지어는 시시콜콜한 요리나 실뜨기까지 입력해 봤으나 답을 얻어 내는 데 실패했었다.
어떻게 씬이 작동한 걸까? 특별한 조건이 충족됐나? 그게 아니면 일정 기간을 두고 작동하는 시스템이었던가?
머리를 팽팽 굴리는 동안에도 착실히 발을 놀린다.
마음이 급해지자 발걸음도 빨라진다. 주 연구실까지 평소 일 분이 넘게 걸리던 거리를 30초 만에 주파했다.
“여기예요.”
수아가 손짓한 곳은 씬의 시스템과 연결된 보조 모니터였다.
기세 좋게 모니터를 확인했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 대역폭이니 뭐니 하는 내용이 있는 거로 봐서, 이것이 전자 분야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이게 어떤 분야의 데이터야?”
“반도체의 D램 부문 연구 데이터예요.”
“반도체?”
“예, 반도체.”
그녀는 불장난을 준비하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혹시 하이넥스 쪽 데이터를 끌어온 건 아니겠지?”
“끌어온 건 아니에요.”
“그럼?”
“하이넥스 연구소와 씬의 시스템을 다이렉트로 연결했어요. 이게 더 확실한 방법 아닌가요?”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법이 없는 걸까?
나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내린다.
“아니…… 그게 더 문제라고.”
“왜요?”
“왜냐니? 우린 아직 씬이 어디서, 뭘 하던 시스템인지도 모르잖아. 그런 녀석을 하이넥스 연구소와 직접 연결해 버렸다고? 만약 씬이 하이넥스 서버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모르는 새 목소리가 커져 다그치는 식의 말투가 됐지만, 수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맞받아친다.
“씬은 닉스 연구소가 2년간 해내지 못한 일을 일주일 만에 해냈잖아요. 이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인류의 축복이 될 거예요.”
“축복이든 저주든 아직은 모르는 일이야. 이번 일은 네가 너무 경솔했어.”
“아뇨.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었어요.”
매번 내 의견을 군말 없이 따라주던 그녀가, 이번만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두 손을 든 건 내 쪽이었다.
“휴우-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어.”
“역시 그렇죠?”
수아는 새끼 고양이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또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게 빤히 보인다.
난 그런 그녀의 볼을 꽉 꼬집는다.
“그렇죠는 뭐가 그렇죠야.”
“으아아…….”
“두 번 다시는 이러지 마. 혼자서 이런 일을 또 벌였다간 연구소에서 쫓아낼 줄 알아.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아.”
볼에서 손을 떼자, 아픈 척 엄살을 떨어 댄다.
“엄살 피지 말고 브리핑이나 해봐.”
“진짜 아팠거든요?”
“빨리, 브리핑.”
볼을 잔뜩 부풀린 그녀는 날 한 번 노려보고서 입을 연다.
“씬을 유혹할 만한 먹잇감이 필요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책상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서류의 산을 가리킨다. 그건 지금까지 우리가 씬에 입력시킨 데이터 내역이었다.
“우리가 저렇게 많은 데이터를 입력했지만 씬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그래서 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추론해 본 결과. 씬이 이미 섭렵한 데이터에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어째서? 아니, 어떻게?”
“생각해 보세요. 씬은 웹에서 생겨난 존재예요. 당연히 전 세계의 웹사이트들을 떠돌며 어쭙잖은 지식쯤은 이미 섭렵한 뒤겠죠. 그런 애한테 이런 잡동사니 지식으로 계속 꾀어봐야 넘어오겠어요? 씬은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정보에만 반응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그녀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내 표정을 살핀다. 내가 뒷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블록체인이나 신소재 배터리 같은, 희귀하면서도 양질의 연구 데이터겠군.”
“바로 그거예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폴짝 뛰어 의자에 착지한다.
“저는 제가 세운 가설을 확인하고자 하이넥스 연구소와 씬을 연결했어요. 그러자 씬은 드디어 활동을 재개했죠.”
그녀의 추론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저 무모한 행동력은 기가 막힐 정도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CEO로 있는 회사의 데이터를 정체도 모르는 인공지능에 내준다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썩은 표정을 본 수아는 뒤늦게 변명을 덧붙인다.
“눈앞에 문명을 한 단계 진보시킬만한 시스템이 있는데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법이잖아요? 뭐라도 해봐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사 연구기록이 외부로 흘러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
“제가 연구기록을 빼서 팔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 연구해서 회사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최고경영자가? 아니면 최대 주주가?”
참고로 하이넥스의 최고경영자는 그녀 자신이고, 최대 주주는 닉스와 SG그룹이다. 즉, 외부 유출이 알려진다 해도 이걸 공론화시킬 만큼 간 큰 사람은 하이넥스 내부에 없다는 소리다.
이런 걸 보고 영악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고르라면 둘 다겠지.
내가 뭐라 말을 못 하고 있자, 그녀는 재빨리 제 할 말을 이어나간다.
“씬이 하이넥스 연구 자료를 접한 뒤, 연구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어요. 잘 보세요. 제가 이렇게 연구 자료를 이어 붙이면…….”
그녀가 연구 데이터 위로 키보드를 두드려대자, 군데군데 붉은색 밑줄과 글씨들이 추가된다.
이건 씬이 연구에 대해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내놓는 일종의 조언이었다. 나도 이런 주석 덕분에 배터리 연구를 일주일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어때요? 이젠 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죠?”
수아는 신이 나서 키보드는 더 빠르게 두드려댄다.
“반도체 분야도 공부했었어?”
“잘은 몰라요. 그저 CEO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 수박 겉핥기 수준만 배운 거죠.”
그녀는 수박 겉핥기라고 했지만, 모니터에 표시되는 연구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연구가 진행됐던 내용은 물론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연구결과에도 착실히 빈칸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막힘 없이 말이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힘이란 말인가?
씬의 능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내 머릿속은 벌써 다음 관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블록체인과 신소재 배터리. 거기에 D램 반도체.
그다음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생각들은 단 하나의 결과에 도달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만약, 인공지능에게 인공지능을 연구시키면 어떻게 되는 걸까?
* * *
“이번 배터리 계약 건에 대한 보고사항입니다.”
내 앞에서 보고서를 든 중년인, 손만호 사장은 시키지도 않았건만 새벽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왔다.
한창 연구에 빠져 있던 나로선 그가 불청객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회사 일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법이다.
“폭스바겐 그룹을 제외한 GM과 도요타, 혼다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계약서 내용이 거의 을사늑약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던데, 그걸 3곳이나 사인하고 갔단 말입니까?”
“을사늑약이라뇨. 이래서야 계약을 따낸 제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이번에 손만호 사장이 성사시킨 배터리 계약은 불공정 거래의 끝을 보여줬다.
신형 배터리의 안정성을 위해 충전 모듈이나 회생 제동장치 등을 닉스에서 납품받아야 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다 전기차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모터, 심지어는 기본탑재 블랙박스까지도 같이 계약사항에 넣어버릴 줄이야. 아마 사인했던 완성차 업체에선 쌍욕을 바가지로 했을 거다.
“다른 부품은 몰라도 핵심인 모터를 우리 쪽에서 받아야 하니, 완성차 업체들은 이후에도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당연히 모터 납품업체인 오성과 KG도 우리 눈치를 더 볼 테고요.”
“하하,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기가 막혀서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러자 손만호 사장은 더 의기양양해져서 이야길 이어간다.
“폭스바겐 그룹이 지금은 한발 뺀 모양새지만 결국 계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번 신형 배터리로 인해 자동차 사업은 내연기관에서 전기로 급격하게 재편될 텐데, 빅터 대표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겁니다.”
“혹시 대현에서는 연락이 안 왔던가요?”
대현이라는 말에 손만호 사장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펴진다. 대현 쪽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대현에는 첫 번째로 초대장을 보냈지만, 그 어떤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초대장을 보낸 곳은 완성차 업계 톱7이다.
그중 초대에 응한 업체는 폭스바겐 그룹, 도요타, 혼다, GM으로 총 4곳. 거절한 업체는 르노, 포드 2곳,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곳은 한국의 대현자동차가 유일했다.
뭔가 이상하다. 내가 아는 대현의 구현민이라면 자신의 부회장직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기차 부문에 목을 맸어야 했다.
그런데 아예 답변 자체가 없었다니?
얼마 전부터 그와 연락이 끊어진 것도 그렇고, 대현 내부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대현을 필두로 국내 전기차를 보급하려던 계획이 조금 어그러졌다. 차라리 르노 쪽과 접촉해 봐야 하나?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손만호 사장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별건 아닙니다만…….”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목소리를 낮춰온다.
“정부 측 움직임이 좀 이상합니다.”
“어떤 움직임이요?”
“안수철이가 당선자 신분일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청와대 입성 후에는 우리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난 즉시 반론하고 나섰다.
“그럴 리가요. 지금의 대통령 지지층은 닉스에 우호적이라 우리를 붙잡으려 들 텐데요.”
“닉스와 한배를 탄다는 건, 반대로 국내 대기업과 척을 진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국내 대기업이라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대현그룹입니다.”
전기차 활성화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건, 내연기관차로 안방을 꽉 잡은 대현에겐 선전포고와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현 대통령 측에서도 이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내가 말이 없자, 손만호 사장이 얼른 이야기를 이어 붙인다.
“현 정부는 국회와 사이가 틀어지는 걸 극도로 겁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소속 출신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게 어떻단 말입니까?”
“그런 정부가 갑자기 대기업에 직접 드라이브를 걸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기업 돈을 먹은 국회에서 이를 드러내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뒷덜미가 찌르르하고 쑤셔온다.
이래서 정치 쪽에는 발을 안 들이려고 했건만.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정부는 우리를 버리고 대현 줄을 잡겠다는 겁니까?”
“그건 또 아닌 거 같습니다. 불과 어제만 해도 비서실장이 직접 찾아와 신공장 설립건을 이야기하고 갔거든요. 아무래도 한곳을 밀어주기보다는 닉스와 대현 사이에서 적절한 줄타기를 할 모양입니다.”
닉스를 택하면 얻을 수 있는 대중들의 인기.
대현을 택하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입지와 돈.
양쪽 모두를 잡고 싶다는 건가.
하…… 이 사람. 전혀 변하지 않았잖아.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손만호 사장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져 온다.
“대표님, 정부에선 신공장 설립 건에 대해 당장 답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 응대해야 할까요?”
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답을 냈다.
“닉스와 대현,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라고 하세요. 신공장 건설은 그 이후입니다.”
“아…….”
이런 강경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는지 손만호 사장의 표정이 굳어 간다.
난 그를 슬쩍 올려보고 말을 잇는다.
“손 사장님, 이번에 배터리 계약 건을 보니. 갑질에 소질이 있어 보이더군요.”
“갑질이라뇨. 전 그저 닉스의 이익을 위해서…….”
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중간에 막아 세웠다.
“혹시 정부 상대로 갑 노릇 해보실 생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