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64화
도심을 빼곡히 메운 자동차의 벽에 숨이 막혀온다.
답답한 마음에 창을 내리자 메케한 매연과 빵빵거리는 소음이 창을 타고 넘어올 뿐이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성과를 얻은 채 다시 창을 닫는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한숨은 덤이었고 말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샤오후였다.
“도로 상황이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이 시간대는 그나마 양반입니다. 러시아워 시간이 되면 뉴욕의 진짜 정체가 시작되죠.”
지금도 걷는 게 더 빠른 수준으로 차가 기어가는데, 이보다 더 심하면 얼마나 막힌다는 말일까? 상상만 했음에도 싫은 표정이 지어진다.
거북이처럼 기어가던 자동차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BBP 비즈니스호텔.
외관만 봤을 땐, 버핏이 굳이 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빛바랜 빌딩의 지하로 차를 향한다.
지하 진입로가 2개에서 4개로 갈라진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양쪽으로 길이 나뉜다.
마치, 미로처럼 얽힌 지하도로. 분기마다 안내해 주는 주차요원들이 없었다면 진즉에 길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하로 들어가 도착한 곳은 주차 공간과 함께 전용 승강기가 준비된 독립적 주차장이었다.
승강기에서 내린 뒤에도 좁은 통로가 계속 이어진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와 합류되는 길이 없었다는 거다.
“건물 구조상 잡소리가 흘러나갈 염려는 없겠군요. 의문이 하나 있다면, 이 빌딩은 지을 때부터 이런 용도를 염두에 둔 거 같은데, 수지타산이 맞을까요? 기껏해야 몇몇 기업인들만 방문할 거 같은데 말이죠.”
“이곳은 아니지만 제가 아는 몇몇 시설은 돈을 쓸어 담는다고 들었습니다.”
“요금을 엄청 많이 받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 방문하는 이용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면 유명인들의 사생활이라든지. 결국은 그렇고 그런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건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약속장소 앞에 도착했다.
[BBP 라일락 룸]
무게가 느껴지는 이중문을 열자, 핼쑥한 얼굴의 사내 한 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마존의 창립자이자 CEO인 제프 베저스였다.
“늦었군요.”
“차가 좀 막혀서 말이죠.”
난 인사를 생략하고 베저스가 앉은 원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버핏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먼저 가신 건 아닐 테고.”
“그 영감은 처음부터 안 왔습니다. 자리를 만들어 준거로 할 일을 다 했다며 뒤로 빼더군요.”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이번 아마존 사태의 시발점은 버크셔 헤서웨이의 지분 매각이다. 그로선 자신이 뒤통수 친 거나 다름없는 베저스와 합석하는 게 껄끄러웠겠지.
내가 별다른 말을 않고 있자, 베저스가 먼저 이야길 시작했다.
“이유가 뭡니까?”
“무슨 이유 말입니까?”
내가 의뭉스럽게 말을 흘려 버리자, 베저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시치미떼도 소용없습니다. 버핏 회장을 종용해서 지분 던지게 만들고, 의도적으로 주가를 하락시킨 흑막이 닉스라는 걸 제가 모를 거 같습니까?”
“글쎄요. 딱히 제가 뭘 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노려보는 베저스의 눈에서 광선이 쏘아진다. 난 그럴수록 더 진한 미소를 머금어 주며 말을 잇는다.
“이번 주가 하락의 원인은 전적으로 아마존에 있는 거 아닙니까? 야심 차게 스마트폰 사업에 진출했고, 그게 쫄딱 망했으니 주가가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거죠.”
“끝까지 오리발 내밀겠다는 겁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파이어폰이 멀쩡하게 나왔으면 버핏 회장이 지분을 팔았겠습니까? 절대 아니죠. 버핏 회장이 어떤 사람인데요. 돈 냄새 맡는 거 하난 세계 제일인 분이 오를 만한 주식을 왜 던지겠습니까?”
“당신이 상황을 키웠잖습니까!”
일부러 그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최대한 얄밉게 말이다.
“한국에선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down company is down. 줄여서 DCD라고 하죠.”
“DCD?”
“내려갈 기업은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제가 시기를 앞당겼을 뿐, 겁도 없이 스마트폰 사업에 손을 댄 시점에서 아마존 주식은 본디 내려갈 운명이었단 거죠.”
베저스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뚜껑이 제대로 열렸는지 표정만 봤을 땐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다.
“씩씩거리는 건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하시고, 오늘 불러낸 이유부터 말씀하시죠. 제가 좀 바쁜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이, 이…….”
만약 이 자리에서 진짜 주먹질이 오가면 그대로 게임 끝이다.
내일 아침 신문 헤드라인에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 경쟁사 CEO 폭행!’이라는 뉴스가 박힐 테니까.
내림세던 아마존 주가는 더 폭락하고 주주총회에선 그의 해임안이 올라오겠지.
“후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베저스는 눈만 부라릴 뿐, 냉수를 삼키며 인내를 발휘했다. 그는 물컵에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좋습니다. 주가 하락에 대해서 가타부타할 것 없이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로 넘어가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시죠.”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씹어뱉듯 말을 꺼낸다.
“이 무의미한 싸움을…… 여기서 끝냅시다.”
“그 말씀은 지분 확보를 멈춰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그 외에 주가로 장난치는 것도 그만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만하면 닉스에서도 충분히 얻을 건 얻었잖습니까?”
만나자고 해서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기껏 해결책이라고 가져 나온 게 평화협상이었어?
흘러나오려는 비웃음을 참기가 곤란해질 정도다.
“무릇 평화협상이란, 양측의 힘이 대등할 때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미 힘의 균형추는 한쪽으로 기울었고 남은 건 군홧발로 짓밟는 것만 남았는데, 뭣 하러 평화협상에 응해준단 말입니까?”
“닉스 측에서 아마존 이사진 30%를 선임할 수 있게 해드리죠.”
“안타깝지만 제겐 응해야 할 매리트가 전혀 없군요.”
“그럼 40%에 부대표까지 닉스에서 선임할 수 있게 양보하겠습니다.”
“흐음…….”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그는 애가 타는지 비어버린 컵을 연신 만지작거린다. 물론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얼마 뒤면 제가 100% 선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쥐고 있던 스텐 컵이 와락 찌그러진다. 이젠 눈빛에서 노골적인 적의까지 드러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할 말을 이어 했다.
“얼마 후면 닉스폰 2세대가 출시됩니다. 당연히 파이어폰 판매량은 지금보다 더 고꾸라질 테고 재고 떨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겠죠. 생산 단가 500달러가 넘는 폰을 떨이로 판다면 주가가 어떻게 될까요? 거기다 아마존의 4분기 실적은 파이어폰 실패로 인해 적자 폭이 더 커졌을 텐데, 그게 발표되는 날엔…… 주가가 200달러 선은 버틸 수 있으려나요?”
“대주주 대부분이 나를 지지하고 있어. 네가 지분을 아무리 모아봐야 날 끌어내릴 순 없을 거다.”
야수처럼 으르렁대는 녀석.
그래 봐야 꼬랑지를 만 개가 벼랑 끝에 몰려 발악하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
“당신을 지지하는 대주주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180달러? 160달러?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주가가 얼마나 내려가야 그 잘난 대주주들이 당신의 해임안을 올릴 지로요.”
“개소리 집어치워.”
난 픽하는 조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저는 140달러에 베팅하도록 하죠.”
베저스는 더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친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길이 나를 향한다.
“그래, 어디 끝까지 해보자. 내게 돈 대줄 만한 곳이 없을 줄 알아?”
“빚으로 버텨봐야 그 끝은 파멸일 뿐입니다.”
“아마존은 내가 설립한 내 회사야. 그걸 너 같은 양아치에게 넘길 바엔 나 스스로 끝장내는 게 나아.”
“주주들이 들으면 실망할 발언이군요.”
베저스는 콧방귀를 끼곤 중지를 치켜든다.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지분 모두를 제게 넘기는 건 어떻습니까? 현 시세에 프리미엄 20%를 얹어 드리고 회장 자리까지 약속하겠습니다.”
“20%라고?”
“예. 대신에 회장의 권한은 회사 외부활동으로 한정하는 것으로 하죠.”
회사 내부에 영향력이 없는 회장 자리. 쉽게 말해서 명예회장이라는 거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베저스의 입에서 빠드득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개자식이…….”
“부디, 다음엔 웃는 낯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베저스는 떠나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러든 말든, 난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
“야! 다시 앉아. 지금 무시하는 거야? 어?”
뒤에서 분에 찬 고함과 욕설이 들려온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노려 보는 것과 고함치는 것, 그게 전부였으니까.
* * *
요란했던 파이어폰의 주목도가 한풀 꺾이자, 그 관심들은 자연스럽게 닉스폰 2세대로 집중됐다.
[닉스폰 2세대 출시 임박. 사전 예약은 아직?]
[새로운 닉스폰 디자인 유출샷은 허위로 밝혀져.]
[아마존 파이어폰 판매량 연일 감소. 신형 닉스폰 출시가 다가올수록 반품률 높아져.]
[made in USA 닉스폰의 출고량은? 벌써 웃돈 주고 되파는 리셀러들 나타나. 신형 닉스폰 물량 걱정에 속만 타는 예비 구매자들.]
IT 매체에선 연일 닉스폰 2세대의 루머로 지면을 채워댔다. 이번은 출시일뿐만 아니라 사전 예약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놀라운 배터리 타임, 거기에 닉스OS 특유의 놀라운 퍼포먼스까지 선보인 닉스폰 1세대는 그만큼 대중에게 문화적 충격을 줬기 때문이리라.
뜨거운 기대와는 달리, 이번 닉스폰 2세대는 1세대의 부분 개선판으로 제작됐다.
하드웨어적인 변화는 군더더기만 빼서 다듬은 디자인에 AP와 카메라를 업그레이드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 반면에 닉스폰 1세대에서 문제가 됐던 양산 문제는 모듈화를 통해 대폭 개선했다.
디스플레이와 카메라, 센서가 달린 전면부는 한국의 KG전자에서 조립하고, 메인 기판은 중국 모토로라 공장에서, 그 외에 하우징은 브라질 공장에서 생산한다.
곳곳에서 생산된 반제품들은 미국 텍사스 공장에 모이는데, 마지막에 완제품으로 조립하고 QC를 거친 뒤에야 made in USA 닉스폰이 완성된다.
-하나, 둘, 치즈. 찰칵!
“와우, 사진이 너무너무 이쁘게 나와요.”
엘런은 셀카봉을 들고 호들갑을 떨어 댄다.
“당연하죠. 이번 닉스폰 2세대의 아이덴티티는 향상된 셀피기술이니까요. 전면 카메라 모듈을 늘린다고 설계 전체를 갈아엎었고, 이미지처리 개선 때문에 들인 돈만 10억 달러가 넘습니…… 뭐야, 안 듣고 있나.”
그녀는 방금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다고 정신이 없었다. 슬쩍 화면을 훔쳐보는데 제목이 ‘대표님 집무실에서 단둘이’였다.
“엘런.”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됐습니다. 그보다 오해를 살만한 제목은 자제해 주시죠.”
“오해하라고 이렇게 올리는 건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너무 당당한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휴…… 말을 말죠. 그보다 2세대, 써본 감상은 좀 어때요?”
“제가 둔감해서 그런지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카메라도요?”
“아, 카메라 기능은 정말 좋아요. 보정 처리가 발군인 데다 SNS에 사진 올리기도 정말 편해졌어요. 사진 찍고 제목만 써서 터치하면 끝이니까요.”
엘런뿐만 아니라, 사내 여직원들에게 테스트 결과도 모두 대호평이었다. 여자에게 폰이란 셀카와 SNS가 최우선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까?
“이 셀카봉도 사진 찍을 때 너무 좋은 아이템인데, 밖으로 못 들고 나가서 불만이라니까요.”
“왜 못 들고 나가요? 그냥 쓰면 될 텐데요.”
“보안 때문에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난 고갤 가로 젓고 말했다.
“그냥 쓰시면 됩니다. 어차피 이거, 특허 등록도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엥? 특허가 안 됐다뇨?”
“안 된 게 아니라 못 된 겁니다. 셀카봉은 90년대에 특허등록된 물건이라 벌써 특허 기간이 만료됐거든요. 그래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거예요. 아마 닉스폰 2세대와 함께 셀카봉이 풀리면 여기저기서 짝퉁을 만들어 댈 겁니다.”
이 이야길 처음 듣는지,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크게 뜬다.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전혀 큰일이 아닙니다. 짝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어설프게 만든 셀카봉 덕분에 닉스폰은 더 주목받을 테니까요.”
“어째서요?”
“짝퉁 셀카봉은 소재도 싸구려를 쓰는 데다, 고정력이 부족해서 폰을 떨어뜨리기 일쑵니다. 거기다 아직까진 전면 카메라 성능이 처참해서 닉스폰 2세대를 제외하곤 제대로 된 셀카가 찍힐 리도 만무하고요. 아마 짝퉁으로 쓰다가 화딱지 나서라도 닉스폰을 사게 될 겁니다.”
그녀는 감탄사와 함께 엄지를 치켜든다.
“역시 잔머리 하난 우리 대표님이 최고라니까요.”
“칭찬 맞죠?”
“당연하죠. 대표님 짱짱.”
내가 계속 노려보자, 그녀는 급히 서류철을 꺼내 들어 화제를 바꾼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마존 건 보고 드리러 왔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요.”
“이번은 넘어가 드리죠.”
엘런은 특유의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보고를 시작한다.
“현재까지 보유 주식은 닉스 9.2%, 재난재단 14.5%로 베저스의 19.3%를 넘어섰습니다. 다만, 베저스를 지지하는 주주들이 많기에 최소 40%는 넘겨야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을 거로 예상합니다.”
“앞으로 16%는 더 모아야 한단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주식공개매입으로 나머질 채우면 안 됩니까? 재난재단의 자본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그게, 지금은 타이밍이 좀 안 맞아서 말이죠.”
그녀는 프린트해 온 서류 몇 장을 내 앞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는다. 최근 아마존 주가 동향 그래프였다.
아마존 주가는 200달러 선을 마지막으로 매일 소폭씩 올라 220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주가가 좀 올랐네요?”
“아마존에서 곧 자사주 매입을 시도할 거란 이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은 어디서 충당하고요?”
“아마존이 보유한 현금과 ALBD라는 사모펀드에서 조달한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구글에서도 아마존을 돕는다는 루머도 있고요.”
ALBD는 중동 오일머니로 움직이는 사모펀드다. 그쪽이야 넘치는 게 돈이지만 문제는 높은 이자였다.
발악할 줄은 알았다만 추잡스럽게도 해댄다. 판을 이리 벌여두면 나중에 어쩌려는 건지. 쯧쯧.
“어떻게 대응할까요, 대표님?”
“베저스가 무슨 짓을 꾸미든 상관없습니다. 그 전에 밟아주면 그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