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62화
오마하시 키위트플라자 꼭대기 층.
이곳은 세계 최대의 투자사인 버크셔 헤서웨이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
어떻게 세계 최대 투자사가 빌딩 한 층만을 사무실로 쓸 수 있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버크셔 헤서웨이의 ‘인수한 기업의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방침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투자사에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버핏은 투자 기업의 경영진에게 주기적으로 대면보고를 받았으며, 그에 따라 투자 비중을 조절하곤 했다.
“기기는 좀 어떻습니까, 버핏 회장님.”
아마존 COO(Chief Operating Officer · 최고운영책임자)인 올리버 루소는 눈동자만 돌려, 그의 표정을 살핀다.
한참이나 기기를 확인하던 버핏 회장의 입이 열린다.
“나쁘지 않구만.”
“그렇습니까?”
“그래. 내가 쓰고 있는 전화기보다 빠르면 된 거 아니겠나? 허허허.”
버핏 회장의 발언에 루소가 애매한 미소를 지어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버핏 회장이 쓰고 있는 휴대폰은 4년 전에 출시된 폴더폰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선지. 이제 이런 기계들이 너무 어렵구만. 나 같은 노인네가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지 않겠어?”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의 발언 한마디에 수십억이 오가는 게 현실인데요. 그러지 말고 이번 파이어폰 발표회에 소개할 코멘트 하나만 해주시죠.”
“주식시장에서나 그렇지 IT 쪽에서 내 영향은 미미해. 차라리 그…… 누구더라? 아, 그래. 대니얼 강에게 묻는 건 어떻겠나?”
버핏 회장의 입에서 닉스 CEO 이름이 나오자 루소의 눈썹이 조건반사처럼 꿈틀거린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그게…… 저희와 닉스는 경쟁사 아닙니까. 평가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지요.”
“아, 미안하네. 닉스도 비슷한 기계를 만들었었지? 내가 이쪽 방면엔 영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허허허.”
껄껄거리는 버핏을 관찰하듯 천천히 훑어본다.
‘이 영감이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능청 떠는 거야?’
루소가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상대는 11살 때부터 이 바닥에 발을 담근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으니까.
버핏은 그런 루소를 보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겁이 나서 그렇다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첨단기술엔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늙은이가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가, 다른 자리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테지. 그럴 바엔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네만.”
지금의 아마존에게는 그 어떤 광고문구보다 버핏 회장의 한마디가 효과적이다.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루소는 아쉬워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버핏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자, 우리 복잡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투자 이야기나 좀 해봄세. 아마존 주가 말이야. 최근에 제법 올랐더구먼.”
“제법이 아니라 가파르게 올랐죠. 연초 대비 50% 이상 뛰었으니까요.”
“그랬었나?”
“모두 다 회장님 덕택입니다.”
아마존은 3분기에 적자가 난 덕분에 주가가 23%나 급락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사업 진출과 더불어 버핏 회장의 지분 매입 소식이 퍼지자, 주가가 반등한 것으로 모자라 300달러 선을 돌파했고 지금도 상승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닐세. 이게 다 자네들이 올바른 길로 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이지.”
루소는 잠깐이지만 버핏 회장의 눈이 반짝거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블라인드가 쳐진 실내였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말이야. 요즘 시장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돌더구먼.”
“무슨 소문 말입니까?”
“이번 아마존이 출시하는 휴대폰이 타사의 디자인과 기술을 훔쳐서 쓴다는 이야기일세.”
루소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건 경쟁사에서 퍼뜨린 허위 사실입니다. 디자인적으로 걸고넘어지는 거 같은데, 요즘 휴대폰 디자인이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내 눈엔 어느 게 어느 회사 것인지 구분을 못 하겠더구먼.”
버핏 회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을 이어갔다.
“디자인이야 그렇다 치고 기술은 또 무슨 소린가?”
“이번 파이어폰에 채택된 특수소재 가공기술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한국 제조사들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나 보더군요.”
“그 방면에선 문제 될 게 없겠는가?”
“이번 파이어폰 제조사는 대만 HTC이며, 저희 아마존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만 결정합니다. 그 말인즉, 생산 쪽에서 기술적 분쟁이 생기면 제조사에서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지요.”
버핏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특유의 껄껄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좋네, 좋아. 이제 더는 물어볼 게 없네.”
“의문점이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아마존은 우리 버크셔 헤서웨이와 좋은 파트너가 됐으면 좋겠구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교환한다.
루소가 자리서 일어서자, 버핏 회장은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섰다.
탁.
회장실 문이 닫히고,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껄껄거리던 버핏의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아마존과 닉스라…….”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그러곤 잠겨 있던 서랍장을 조심스럽게 조작한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서랍장.
그곳에는 방금 아마존에서 주고 갔던 것과 흡사한 디자인의 스마트폰 한 대와 이미 뜯어진 손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허허, 이 맹랑한 놈. 이번에는 고맙다고 해야겠군.”
그가 집어 든 편지 겉봉엔 미려한 필기체가 흩날려 있다.
[회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닉스 CEO 대니얼 강.]
* * *
11월 1일. 출시 전부터 닉스폰과의 닮은꼴로 화제를 모았던 아마존의 파이어폰이 드디어 대중 앞에 공개됐다.
가격은 애플폰과 동일한 799달러로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게 4.8인치의 대화면과 쿼드코어 AP, 램 2GB와 저장공간 64GB라는 훌륭한 사양이 탑재됐다.
전면 4곳에는 모션 추적 카메라를 배치해서 안경 없이도 3D 입체 화면 기술을 넣었고, 음성으로 아마존 쇼핑을 가능케 하는 신기술까지 선보였다.
출시일은 신형 닉스폰 출시를 한 달여 앞둔 11월 10일로, 블랙프라이데이를 염두에 둔 절묘한 시기였다.
파이어폰의 스펙이 공개되자, 단순히 닉스폰의 짝퉁이라고 여겼던 대중들은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닉스폰과 비교하면 꿇리지 않는 디자인, 뛰어난 성능, 결정적으로 출시를 기념해 아마존의 회원이라면 200달러를 할인해 주는 프로모션까지 진행됐다.
반응은 공개와 동시에 나타났다.
아마존 콜센터는 파이어폰 문의로 폭주했고, 통신사나 전자기기 판매장까지도 출시조차 안 된 기기 탓에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파이어폰의 출시를 이틀 앞둔 날.
아마존 본사의 중역 회의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잡혔다.
CEO인 제프 베저스는 물론이고 아마존의 고위급 임원들, 거기에 이번 파이어폰을 진두지휘했던 매니저급도 회의에 불려 나왔다.
다들 한창 바쁜 시기에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심각한 베저스의 표정에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기다릴 뿐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드디어 CEO 베저스의 입이 열린다.
“이 자리에 불려 나온 이유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들도록.”
당연히 손을 든 사람은 없다.
베저스 역시 기대하지 않았는지 바로 말을 이어간다.
“다들 알겠지만, 앞으로 이틀 후면 파이어폰 판매가 시작된다. 무려 40억 달러를 투자한 중요 프로젝트의 성패가 결정되는 날이기도 하지.”
그는 고개를 돌려 이번 업무 진행 책임자인 올리버 루소에게 시선을 던진다.
“루소, 시장 분위기는 어땠지?”
“온라인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관심은 뜨겁습니다. 닉스폰 단종사건으로 여론이 돌아선 가운데, 그 대체재인 파이어폰이 등장했으니까요.”
“좋아. 반응은 그렇다 치고, 예상 판매량이 얼마였나?”
루소는 재깍 답하지 못해서 준비해 온 서류를 한참이나 뒤적인 다음에야 말했다.
“첫 달은 170만 대, 그다음 달부터는 130만 대 수준에서 안정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연간 1,500만 대 수준이라…… 그렇다면 초기 물량이 얼마야?”
“아마존 물류센터에는 총 220만 대가 확보됐습니다. 그 외에 선박으로 넘어오는 물량은 130만 대 정도로 이달 말이나 도착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초기 물량만 350만 대. 애플폰이 매달 1,000만 대 이상 파는 걸 감안하면 무리한 수량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선지 보고를 들은 베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루소가 질문을 던진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이 있고말고. 오늘 자로 매체들이 파이어폰 리뷰를 뽑았더군.”
“오, 그렇습니까? 어떻던가요. 호평이 좀 나왔던가요?”
“여기 팩스로 도착한 초본이 있어. 자네가 한 번 읽어 보게. 큰 소리로 말이야.”
뜬금없이 리뷰를 큰 소리로 읽어 보라니? 루소는 뭔가 떨떠름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먼저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리뷰입니다. 파이어폰은 놀라운 스펙과 적당한 가격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보다 낮은 사양의 애플폰보다도 답답한 사용감을…….”
처음부터 악평이 쏟아진다.
루소가 눈치를 슬쩍 보자. 배저스가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새롭게 추가된 기능 역시 어디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안드로이드OS를 개조한 아마존OS의 UI 디자인은 멋진 외관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
결국, 읽는 걸 그만둔 루소가 묻는다.
“계속 읽을까요?”
“다음 장을 넘겨서 읽어봐.”
“알겠습니다.”
다음 장은 컨슈머리포트에서 나온 리뷰였다.
비영리 기관인 소비자협회에서 개재하는 만큼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장점. 거대한 디스플레이. 매력적인 디자인. 좋은 아마존 쇼핑 접근성.”
이번은 평이 좀 낫다. 덕분에 읽어가는 루소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진 상태였다.
“단점. 앱 호환성을 떨어뜨리는 아마존OS. 절망적인 최적화로 버벅거리는 퍼포먼스. 곳곳에 배치된 아마존 광고 더미들. 끔찍한 성능의 후면 카메라.”
이후에도 단점들만 계속 이어진다. 루소는 시선을 내려 마지막 총점이 40점대인 걸 확인하고 읽는 걸 포기해 버렸다.
그는 혹시 싶어서 뒷장의 리뷰들도 확인했지만, 호평보다는 악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것들…… 온라인으로 공개된 리뷰입니까?”
“아니, 내가 그 전에 막았다.”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루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갤 푹 숙였다.
다시 무거운 공기가 찾아온 실내.
얼굴을 감싸 쥔 베저스가 채 한숨을 내쉰다.
“개발팀.”
“예.”
“40억 달러로 대체 뭘 만든 거야?”
“…….”
“대답 안 해? 안 하냐고!”
속에서 억눌려있던 화가 터져 나온다.
베저스는 서류철로 책상을 쾅쾅 내리치더니 기어코 직원 얼굴에 집어 던져 버린다.
“40억으로 뭘 했냐고 묻고 있잖아!”
“그, 그것이…… 본디 파이어폰은 전자책인 킨들처럼 아마존 생태계에 특화된 보급형으로 설계됐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대표님이 3D 기능을 고집하면서 초기판보다 스펙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닉스폰과 비슷한 디자인까지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이 밥벌레 새끼가 전부 내 탓으로 돌리려 들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루소가 몸을 날려 베저스를 막아선다.
“대표님 진정하시죠. 아직 기기는 출시도 안 됐잖습니까. 일단 출시하고 나서 상황을 지켜보시지요.”
“이익…… 안 놔?”
“야, 개발팀장 빨리 사과드려. 어서.”
회의실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은 바로 그때.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 한 명이 쫓아 들어온다. 그는 아마존의 재무관리 쪽 직원이었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넌 뭔데 호들갑이야?”
회의실 분위기가 전쟁터였지만, 직원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쏟아낸다.
“버크셔 헤서웨이가 아마존 지분을 전량 털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일부는 시간 외 거래로, 나머지는…….”
갑자기 베저스의 눈치를 보는 직원. 옆에서 지켜보던 올리버 루소가 답답했는지 재촉하고 나섰다.
“어디에 매각한 거야? 빨리 말해봐.”
“그게 그러니까…… 지분 매입처가 닉스라는 소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