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60화 (160/206)

기적의 IT 재벌 160화

닉스폰 설계와 생산기술이 탐나는 건 아니다.

이미 모토로라 설계팀을 흡수한 닉스 연구소에서 차기작의 설계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뒤였으니까.

하지만 닉스폰에 사용됐던 KG전자만의 특수소재 가공 기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수소재를 극도로 얇게 가공해서 고급스러움은 살리면서 단가는 낮추는 기술은 카피하고 싶다고 카피 되는 게 아니었다.

초콜릿폰을 필두로 블랙라벨 시리즈, 명품 계열인 프라다폰 시리즈까지 거쳐서 다년간 노하우를 바탕으로 완성된 가공 기술.

이것이 없었기에 닉스폰 차기작은 평범한 글래스 & 알루미늄 소재를 택했을 정도였다.

그런 중요 기술을 경쟁사가 될지도 모르는 닉스에게 넘긴다니. 넙죽 받아먹기엔 체할 걱정부터 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진승모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선배님 너무하십니다. 제가 그렇게 의심받을 짓을 한 거도 아니잖습니까? 설사, 다른 꿍꿍이가 있다 쳐도 닉스로선 득이면 득이지, 실이 될 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전해주는 겁니까?”

“물론이죠. 예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선배님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고요.”

진승모는 환하게 웃어 보인다. 그럴수록 내 의심은 더 짙어져 간다.

일전의 닉스폰 위탁 생산처를 오성으로 이전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 특수소재 가공 기술을 넘기는 것 역시 KG전자엔 막대한 손해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는 왜 자신이 몸담은 KG그룹에 손해 될 짓까지 감수하면서 나를 돕는 거지?

가만. 이거 어디서 한 번 봤던 상황인데…… 알 듯 말 듯 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러다 머릿속에 불꽃이 확 튄다.

앗! 설마?

진승모가 했던 의문스러운 행동들은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라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던가? SG그룹의 신용화에게서 말이다.

그는 SG그룹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룹이 손상되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신석호가 그룹을 차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망가지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였으니까.

재벌가의 광기.

만약 진승모의 행동도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그가 행했던 지금까지의 행동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게 된다.

“승모 씨.”

“예.”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진승모의 반응을 자세히 살핀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안에 긴장한 본판이 보이는 듯했다.

“당신이 KG그룹의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닉스를 돕는 이유. 그건 저를 이용해서 KG그룹 내 지위를 다지기 위해서입니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솔직히 저란 놈은 닉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선배님이 저를 내친다면 끈 떨어진 연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실제로 이번 상구 형님을 밀어내는 일로 저는 확신했습니다. 닉스라는 끈을 잘만 붙잡으면 그룹 내의 실권을 쥐고, 더 나아가……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는 뒷말을 이어 하려다가 삼켜 버린다.

난 그가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 꺼내준다.

“회장 자리까지 노려봄 직하다고요?”

“하하, 어디까지나 제 망상입니다. 저 같은 햇병아리가 어찌 KG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겠습니까?”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녀석.

지금은 햇병아리처럼 보이지만 5년 후면, 그는 그룹 내의 친척들을 제치고 KG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것도 닉스라는 회사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말이다.

난 딸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말했다.

“KG그룹 회장 자리에 오를 생각이 있습니까?”

“에이, 너무 나가셨습니다.”

진승모는 억지로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은 채 나를 관찰하기 바쁘다.

“솔직하게 답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속을 꼭 감춘 사람을 도울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진승모는 마른 침을 꼴딱 삼킨다. 그의 표정에 수만 가지 감정들이 교차한다.

굳게 닫힌 그의 입이 열리지 않는다.

일견 무표정한 듯 보였지만, 속으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문이 열린다.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가능하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욕심도 없는 놈이 KG그룹 회장 자리를 차지했을 리 없잖는가.

“제가 도우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로 보시는데요.”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인다.

“대략 5할 정도,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높을 듯합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진승모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의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야망이 꿈틀거렸다.

“흠, 5할 이상이라,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군요.”

더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확정적으로 당첨되는 복권을 손에 넣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잘해봅시다, 후배님.”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승모는 악수하며 고갤 숙이는 거로 모자랐는지, 대뜸 일어서서 절을 하려 들었다.

“이렇게까진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아니…… 이거, 참.”

내가 만류하고 들었지만, 진승모는 막무가내로 큰절까지 끝낸 후에야 만족한 표정이다.

“저는 오늘을 인생의 두 번째 날로 기억할 겁니다.”

“인생의 첫 번째 날은 언젭니까?”

“당연히 선배님이 절 처음 불러주신 날입니다.”

그는 이를 훤히 드러내며 웃어댄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뜨거운 말을 하는 모습이 징그러울 정도다.

“후배님은 닉스가 어떻게 해주길 원합니까?”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선배님은 저를 이용해서 KG전자와 관계를 이어가고 닉스의 이득을 취하는 거죠.”

“이용한다?”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진승모는 자신의 위치와 쓰임새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거기다 그룹 내부의 일에는 내가 관여해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것도 이미 파악한 듯하고.

확실히 이런 놈이니 진양현 회장이 콕 집어서 뽑았을 테지. 탐나는 인재다. 차라리 KG그룹에서 떼 버리고 닉스에 꽂아버려?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만있으면 회장이 될 놈을 끌어내리려 하다니. 나도 참 무슨 생각이람. 이래서 욕심이라는 녀석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난 속내를 숨기고 화제를 전환했다.

“자, 후배님. 사적인 이야기 끝났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아, 참. 이걸 먼저 드린다는 게.”

진승모는 잽싸게 품에 있던 USB를 내밀었다.

“이게 그 기술입니까?”

“예. 한 번 보시죠.”

“잠깐만요. 내용을 보기 전에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뭐든 질문하라는 듯 고갤 끄덕였다.

“닉스폰 설계까진 빼 온다 치더라도, 특수소재 가공 기술은 KG전자의 핵심기술 아닙니까? 그걸 닉스에 넘기는 걸 경영진에서 허락하던가요?”

“당연히 반대하겠죠. 그래서 몰래 가져나온 겁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정도 기술을 빼 오다 걸리면 막대한 손해배상은 기본이고 쇠고랑까지 각오해야 했다. 뭐, 재벌가 사람이니 구속은 면하겠지만 간이 배 밖에 나온 건 확실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 기술들은 사실상 외부로 나간 자료라고 봐야 하니까요.”

“그게 무슨……?”

진승모는 살짝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말했다.

“KG전자에서 줄줄이 스마트폰 사업에 실패했잖습니까. 그 때문인지 최근 핵심 연구개발 인력들의 이탈이 있었습니다.”

“처우 문제입니까?”

“처음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스마트폰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스마트폰 사업부의 급여를 최고 수준으로 올린 게 얼마 전입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 경쟁사에서 빼갔다는 말이군요.”

“예. 이탈자들의 퇴사 날짜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행적은 한곳으로 몰렸더군요. 대만의 HTC로 말입니다.”

HTC는 스마트폰 초창기에 이름을 날렸던 전자회사다. 본디 ODM을 전문으로 하는 하청업체 정도의 이미지였지만, 터치 다이아몬드, 디자이어, EVO 시리즈를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HTC? 거기서 KG전자 인력을 빼갈 정도로 힘이 있던가요? 스마트폰에서 두각을 드러내긴 했지만, 규모 면에서는 급이 다를 텐데요.”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HTC에서 제안을 받고 거절한 사람들이 말하길. 그들이 원한 건 닉스폰의 설계와 양산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엥? 왜 하필 닉스폰이죠?”

HTC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가성비다.

좋은 말로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는 소리고, 나쁜 말론 싸구려라는 뜻이다. 그런 업체 제품에 마진도 안 남는 특수소재 가공 기술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나 다름없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만, 닉스폰 양산 기술에 거액을 내걸었고, 인력이 빠진 정황을 보면 기술은 이미 넘어갔다고 봐야겠죠.”

“흠, HTC와 닉스폰이라…… 당최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네요.”

“자사의 이미지를 프리미엄급으로 끌어올리고자 함이 아닐까요?”

“HTC가 인제 와서 닉스폰과 같은 프리미엄 이미지를 노린다? 그러기엔 시기상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HTC는 중저가 이미지가 박혀버렸잖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한다는 가설은요?”

가능성은 있다만 지금의 HTC에 그럴 여력이 있을까?

HTC는 스마트폰 초창기에 반짝하고 이름을 알렸지만 이후 스마트폰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오성, 소니, KG 같은 대형 전자회사들에 밀려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 이후도 경영진의 연이은 헛발질로 회사를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지. 오죽하면 HTC의 뜻이 Help This Company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까.

“HTC는 어차피 저물어가는 회사. 수작을 부려봐야 대세에 영향은 없습니다. 우린 우리의 길을 가면 그만인 거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 그럼. 다시 기술 이야기로 넘어가서…….”

이때의 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닉스라는 기업이 IT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더불어 그 영향 때문에 다른 기업들이 어떤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지 말이다.

* * *

닉스폰은 출시 1년이 채 안 된 시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출시 전인 CES2012에서 발표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그 기대감은 고스란히 닉스폰 사전예약으로 몰려들었다. 기기가 출고됐을 때 역시 실사용자와 IT매체들에 최상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어진 생산 문제로 수급에 차질을 빚었으며, 얼마지 않아 단종발표까지 해버리며 구매 예정자의 불만이 폭주했다.

일련의 과정을 겪는 동안 주가도 파도처럼 출렁였다.

CES2012에서 닉스폰 발표가 있자 장중 70달러를 간신히 터치했던 주가는, 출시를 목전에 앞둔 2월 말에는 97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어진 수급 문제와 단종 발표에 주가는 다시 67달러 선까지 내려앉는다.

상황이 이럴진대 설상가상으로 닉스의 대주주인 버크셔 헤서웨이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게 된다.

-버크셔 헤서웨이는 지속해서 닉스의 지분을 줄여 나갔습니다. 남은 지분 역시 레드스톤과 JP모건에 매각하는 것을 검토 중이며, 이번 매각 절차는 수익 실현의 일환으로서…….

“망할 능구렁이 영감. 이번은 또 무슨 꿍꿍이야.”

대주주의 이탈은 주가에 악영향을 준다. 그런데 그 대주주가 다른 사람도 아닌 워렌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헤서웨이였으니. 닉스의 주가는 물론이고 이미지에도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했다.

난 닉스 본사에 도착해서 집무실보다도 재무팀에 먼저 들렀다.

재무팀의 분위기는 예상대로 포탄이 떨어진 진지를 방불케 했다.

“60달러 선 무너졌습니다! 59달러! 호재라도 발표해서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호들갑 떨지 마세요. 하락은 일시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세요.”

“페이지 이사님 레드스톤의 지나 말론 대표님이 연락 왔습니다. 급하게 통화를 원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가 개인 번호로 연락 준다고 하세요.”

“57달러까지 내려왔습니다!”

재무팀 직원들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사무실을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나마 제정신인 엘런이 나를 보고 다가온다.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요. 와, 여기 전쟁이라도 났어요?”

“전쟁보다 더 심각하죠. 주가가 월초 대비 30%나 급락했는데요.”

사무실 중앙에 켜진 모니터에는 버크셔 헤서웨이의 CFO인 메이슨 파인즈의 인터뷰가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경제 방송에선 저걸 특집이라도 되는 양 계속 틀어주고 있나 보다. 보다 못한 엘런이 고함친다.

“리! 빨리 방송사에 연락해서 다른 뉴스로 돌리라고 하세요.”

리라고 불린 직원이 되묻는다.

“다른 이슈를 제공해야 할 겁니다. 지금으로선 버크셔 헤서웨이 건이 경제 톱이니까요.”

“그건 방송사에서 알아서 하는 거죠. 우리가 꼬박꼬박 광고비를 왜 내고 있어요?”

“그건…….”

“이럴 때 압박하라고 내는 겁니다. 빨리요. 어서!”

“아, 알겠습니다.”

평소엔 나긋나긋하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이다. 역시 업무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면 사람이 180도 달라진다니까.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말을 붙여온다.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 버크셔 헤서웨이에서 닉스 주식을 내다 팔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대응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헤지도 충분히 했고, 투자사들에 브리핑도 진행할 예정이에요. 충격은 있겠지만 주가는 다시 반등할 거예요.”

난 의식적으로 크게 고갤 끄덕인다.

“천천히 진행하세요. 주가 좀 내려간다 한들 닉스가 입는 타격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대형 TV에서 버크셔 헤서웨이 소식을 내보내던 방송사의 화면이 전환되고, 앵커의 모습이 나타난다.

-방금 들어온 뉴스입니다. 전자상거래 공룡인 아마존이 스마트폰 사업에 진출한다는 소식입니다. 아마존 스마트폰, 일명 파이어폰의 렌더링 이미지가 유출된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출시될 것으로 보이며…….

아마존 스마트폰이라고 공개된 디자인은 닉스폰의 디자인을 거의 빼다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대표님. 저, 저건?”

“예. 닉스폰의 세라믹 티타늄이 소재네요.”

HTC가 무리하게 닉스폰 설계와 제조 기술을 빼돌린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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