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59화 (159/206)

기적의 IT 재벌 159화

시애틀에 소재한 밸브 코퍼레이션 본사.

유명 게임사들이 으레 그렇듯, 입구서부터 자사를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서로를 뽐내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로비로 들어선 배기태는 도시에 막 상경한 촌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대표님 저것 좀 보세요. 진짜 밸브예요, 초대형 밸브! 우왓, 이건 말로만 듣던 황금빠루? 오마이갓, 하프라이프 스태츄까지!”

지금은 게임 유통 플랫폼인 스팀으로 명성을 떨치는 밸브지만, 그 시작은 소규모 게임 개발사였다.

그 때문에 실내에는 밸브가 개발한 게임인 하프라이프, 팀포트리스, 카운터스트라이크, 포탈 등의 포스터와 기념품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흥분한 배기태가 호들갑을 떨어대는 사이, 데스크에서 나온 직원이 우릴 맞이한다.

“반갑습니다, 닉스에서 오신 분들 맞으신가요?”

“예.”

“저는 안내를 맡은 캐시입니다. 여러분들을 응접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뒤를 따르는 와중에 배기태가 한국어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으으,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데…….”

“일정이 끝나면 본사 견학이라도 부탁해 보시죠. 기자들이나 업계 관계자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견학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까요.”

아쉬움이 절절 묻어나던 배기태의 표정이 확 살아난다. 행동거지를 보면, 녀석은 뼛속까지 게임 덕후임이 확실하다.

로비에서 응접실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오 분이면 충분했다.

밸브 본사는 자체 사옥이 아니라, 빌딩 일부분을 임대해서 쓰고 있었다. 그래선지 이름값에 비해서 본사 규모는 아담한 편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안내직원이 떠나자 잔뜩 긴장해 있던 배기태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아, 확실히 이름있는 게임사라 그런지 본사 분위기부터가 남다르네요. 뭐라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압도당한다고 할까요?”

“글쎄요. 조형물이 흥미롭긴 하지만 딱히 특별한 느낌은 못 받았는데요.”

말이 끊어지자 배기태가 안절부절못하고 다리를 달달 떨어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다시 말을 붙여왔다.

“저기, 대표님.”

“예.”

“오늘 협상. 잘될까요?”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 여전히 긴장을 떨치지 못한 듯하다.

“왜요?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밸브 정도의 유통 공룡이 이제 걸음마 단계인 닉스 스튜디오를 받아줄까 싶어서요.”

“밸브가 게임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이라 해도, 오늘 협상 건은 모바일 분야 아닙니까? 이쪽은 우리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난 우중충한 표정을 짓는 배기태의 등판을 후려친다.

찰진 짝 소리가 실내를 울렸고. 깜짝 놀란 배기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본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하는 게 협상의 기본인 거 모릅니까? 지금 기태 씨처럼 움츠려 있으면 될 일도 실패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웃어봐요. 자, 스마일.”

내가 입꼬리를 올리자 어색하게 따라 하는 녀석.

“스, 스마일.”

배기태의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다 잘될 겁니다. 저를 믿으세요.”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대표님이 부러울 따름이네요.”

“이번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는 자신감이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세요.”

“믿는 구석요?”

그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린다.

응접실로 후덕한 체구를 자랑하는 사내가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밸브 코퍼레이션의 설립자이자 CEO인 게이브 뉴웰이었다.

“오, 대니얼! 정말 오랜만이에요.”

“게이브,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재작년이 마지막 아니었던가요? 자주 좀 들르고 그래요.”

난데없이 친근한 인사말이 이어지자 옆에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우릴 번갈아 쳐다보는 배기태.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 게이브는 한참 동안 사담을 이어갔다.

“이번에 나온 카운터스트라이크 신작 해봤어요?”

“흐흐, 해보다마다요. 죽여주게 뽑았던데요. 이스포츠를 염두에 두고 만든 거 맞죠?”

“그쪽으로 힘을 팍팍 줬죠. 이번 작을 기점으로 FPS의 붐은 다시 찾아올 겁니다. 으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자, 옆에서 배기태가 자꾸 눈치를 준다. 이 상황이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기태 씨, 제가 국내 게임사들과 연합해서 밸브를 인수하려 했다는 건 알고 있죠?”

“알다마다요. 국내 대형 게임사와 닉스가 합쳐서 인수전을 펼쳤으나, 밸브에 바람맞고 끝났다는 사건. 업계에선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 일화죠.”

“바람을 맞았다라……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아무튼, 그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개인적으로 밸브 지분을 차곡차곡 모았거든요.”

그때 이야길 듣고 있던 게이브가 끼어든다.

“직원들 지분까지 싹 쓸어 담았으면서 차곡차곡은 무슨 차곡차곡 입니까?”

“뭐,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죠.”

“아니, 글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욕심쟁이가 20%를 넘게 확보했더라니까요. 이러다 진짜 회사를 뺏기나 싶었습니다.”

“에이, 엄살 피지 마시죠. 51%를 게이브 당신이 쥐고 있는데 어떻게 뺏습니까? 저는 단순히 밸브의 비전을 보고 투자를 한 겁니다.”

게이브는 험험 하는 헛기침을 해대곤 말을 이어 한다.

“아무튼, 그때 대니얼과 일대일 담판을 지었죠. 제 지분을 일정량 양보하는 대신,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기로요.”

“전 처음부터 경영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지분을 팔아주신 건 감사한 일이지만요.”

“에이,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겁니다. 지금도 두 분이서 절 찾아온 걸 보면 뭔가를 꾸미고 온 거 아닙니까?”

난 그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음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양사가 상생할 수 있는 제안이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새로운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다만.”

게이브는 말을 끊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곤 계속했다.

“닉스의 제안 때문에 밸브가 손해 보는 사항이면 단칼에 거절할 겁니다.”

“그건 CEO로서 당연한 결정이죠.”

“좋습니다.”

게이브는 어디 해보라는 듯 자세를 고쳐 잡는다. 그가 움직이자 의자가 고통스럽게 삐걱 소리를 낸다.

“스팀에서 서비스 중인 게임을 닉스OS용으로 이식하는 것을 지원해 주십시오.”

“닉스OS 전용 게임의 바리에이션을 늘리겠다는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타 플랫폼 지원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지원해 줄지겠군요.”

“지원센터는 닉스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합니다. 스팀은 모바일 이식작에 어드밴티지를 주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전면 배너나, 정기 세일에 포함해서 프로모션을 집중해 주는 식이죠.”

게이브는 자신의 두툼한 턱을 한참 동안 매만진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떻게 거절해야 될까를 고민하는 듯했다.

서버에 등록된 게임만 1만 개에 달하는 스팀에서 일부만 특혜를 준다는 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뭉갤 정도의 이점을 넘겨준다면 어떨까?

난 준비해온 히든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닉스OS에 스팀을 선탑재 해드리겠습니다. 닉스챗과 동등한 대우로요.”

파격적인 제안에 놀랐는지 게이브의 거구가 앞으로 쏠린다. 동시에 버티다 못한 의자가 퍽,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다.

“게이브,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마다요.”

미소를 머금은 그가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서 내 손을 잡아 온다.

“그래서 선탑재는 언제부터 가능한 겁니까?”

* * *

밸브와의 협상은 긍정적인 기류를 탔다.

밸브는 스팀이 닉스OS에 선탑재되면서 게임 유통은 물론이고 커뮤니티의 강화, 모바일 사업으로 영역 확대라는 득을 취할 수 있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닉스는 스팀의 방대한 게임들을 닉스OS로 이식받으면서 부족했었던 게임 라인업을 강화할 수 있었으니, 이번 협업이야말로 양사의 완벽한 윈-윈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바일로 이식 가능한 게임이 한정적인 것이나, 개발사에 대한 지원을 닉스가 떠안아야 했던 것, 거기에 스팀에선 이식 작의 프로모션을 얼마나 강화해 줄 것인지 등등.

하지만 1억 개의 계정이 활성화된 스팀을 닉스OS에서 독점적으로 서비스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단점이 보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CEO 간의 대략적인 의견교환이 이뤄지고.

남은 실무적 문제는 닉스 스튜디오의 책임자인 배기태에 일임한 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음 같아선 시애틀에 남아 게이브와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도 날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닉스 코리아에 도착하자 로비서부터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KG전자에서 손님이 와 계십니다.”

“어디 있습니까?”

“일단은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제 방으로 오라 하세요.”

비서를 뒤로하고 걸음을 서두른다.

집무실에 도착하고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날 찾아온 손님은 KG전자의 진승모였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90도로 고갤 숙여온다.

처음엔 부담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언제부턴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예, 반가워요. 일단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진승모는 집무실 소파를 차지하자, 대뜸 준비해온 물건부터 꺼내 든다.

기다란 막대 끝에 집게가 달린 물건.

그건 KG전자에 위탁생산을 의뢰했던 셀카봉이었다.

“드디어 최종 샘플이 완성됐습니다.”

“최종이 확실합니까?”

“에이,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난 씨익 웃으며 셀카봉을 받아 들었다.

가벼우면서도 탄탄한 나노스틸 바디에 부분적으로 카본 소재를 덧대서 안정감을 더했다. 거기에다 마감처리 역시 유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괜히 대기업이 아니구나 싶다.

“마감 상태는 이쯤이면 나쁘지 않군요.”

“헤헤,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KG전자의 셀카봉 품질은 예전부터 훌륭했다. 억지로 흠잡을 곳을 찾아내는 게 곤욕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 반려 처리를 했던 건 닉스폰 생산에 재를 뿌린 진상구 녀석을 치우기 위함이었다. 그가 KG전자 부사장 자리에 계속 붙어있으면 앞으로도 사사건건 부딪칠 게 뻔했으니 말이다.

이번은 샘플에 닉스폰을 결합한다.

철컥하는 걸쇠 소리와 함께 스틱과 폰이 단단하게 고정된다. 이 정도 고정력이라면 골프채처럼 휘둘러도 끄떡없으리라.

“이대로 진행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진승모도 통과될 줄 알았는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갤 끄덕인다.

“물량은 그대로 1,000만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혹시 생산하는 데 문제 생기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스마트폰과 달리 셀카봉은 생산 과정이 단순하니까요. 저희 예상대로라면 매월 5,00만대 이상은 출고시킬 수 있습니다.”

“좋네요. 상황 보고 추가 발주도 들어갈 수 있으니 설비 상태, 잘 좀 점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난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셀카봉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버튼을 눌러 길이 조정도 해보고, 접어서 삼각대 모드로도 촬영해 본다.

확실히 고급 소재와 1티어급 전자회사의 기술력이 결합하다 보니 내 기억 속의 싸구려 셀카봉과는 질적 차원이 다른 물건이 나왔다.

그때 날 지켜보던 진승모가 질문해 온다.

“선배님, 이번 셀카봉 말입니다.”

“예.”

“1,000만대나 발주하신 거 보니, 닉스폰 후속작에 기본 구성품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었기에, 난 고갤 끄덕여 줬다.

“후속작은 전면 카메라만 개선하고 비슷한 형태로 나오겠군요?”

음? 진승모가 이건 어떻게 알았지?

내 표정을 본 진승모가 급히 손사래를 친다.

“어디서 정보를 얻은 게 아니라 제 개인적인 예상입니다. 셀카봉뿐만 아니라 닉스가 최근 인수하고 있는 업체들이 하나같이 카메라와 센서모듈 업체들 아닙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번 신제품이 기존 닉스폰 개선판이라면 제가 도울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담긴 발언은 기대를 품게 만든다.

“어떤 방법입니까?”

“KG전자에서 쥐고 있던 기존 닉스폰의 설계와 특수소재 가공기술을 이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예?”

놀란 나머지 쥐고 있던 셀카봉을 떨어뜨릴 뻔했다.

설계는 그렇다 쳐도, 특수소재 가공기술은 KG전자만의 독보적인 기술인데 그걸 내게 넘긴다고?

분위기를 탄 진승모가 얼른 말을 이어간다.

“차기작 닉스폰 생산은 모토로라가 담당할 테니, 이제 KG전자에 돌아올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기껏 해봐야 셀카봉 같은 주변기기나 디스플레이, 배터리 같은 부품이 전부겠죠. 그런 상황에서 닉스폰 설계를 쥐고 있어 봐야 쓸모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넘기고 다른 걸 취하겠다?”

“그럴 리가요. 이건 제 순수한 호의로 받아주십시오.”

헤실거리며 웃고 있지만 난 믿지 않는다.

세상천지에 금덩이를 선의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진승모는 진양현 회장이 직접 KG그룹의 후계로 올릴 녀석 아닌가? 분명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닐 터.

진승모, 대체 무슨 꿍꿍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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