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57화
똑똑.
“들어오세요.”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KG전자의 모바일 사업부를 총괄하는 진상구 부사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현우 대표님.”
90도까진 아니지만 제법 고개를 숙여 온다. 그것만 보더라도 저번 달에 만났을 때와는 온도 차가 확연하다.
“이름이…… 진상우 씨였던가요?”
“진상우가 아니라 진상구입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일단 앉으시죠.”
재벌가에서 나고 자라,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는 봤겠는가? 그의 눈빛엔 당황과 분노가 반반쯤 섞여서 일렁이고 있었다.
“미국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일전에 단종하신 닉스폰 생산 문제로 왔습니다.”
“닉스폰? 그 이야긴 끝난 거 아닙니까?”
“그게, 저 단종을…….”
난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어 먹는다.
“아하, 아직 찍어낸 재고가 남았던가요? 그럼 그거까진 저희가 납품받는 거로 하겠습니다.”
“아, 아뇨. 남은 재고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제가 온 이유는 닉스폰 단종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사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턱 끝이 살짝 떨린다. 확실히 부탁하는 행위 자체에 서툴다는 느낌이 팍팍 풍겨 나온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오는 이유는 콜센터 팀장으로 좌천되기 싫어서겠지.
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본다.
“진상구 씨. 기업 경영이 애들 장난입니까?”
“예?”
“단종 발표가 오늘 아침에 났습니다. 소식을 듣고 타사 제품을 샀던 사람이나, 웃돈 주고 리셀러에게 구매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걸 반나절도 안 돼서 뒤집으면 기업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거절당하리라 생각했었던지 미리 준비해 온 말을 풀어댄다.
“닉스폰 제조 단가를 기존보다 낮춰 드리겠습니다. 거기다 물량을 30만 대에서 2배 이상 늘려, 80만 대 수준을 생산해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쯤이면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의 표정에 자신감이 묻어 있다. 하지만 난 속으로 코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단가 따먹기는 KG전자 같은 제조사에서나 하는 겁니다.”
“마진이 높아지면 닉스로서도 좋은 일 아닙니까?”
“진상구 씨, 닉스가 마진도 없는 닉스폰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상구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물론 처음부터 답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닉스폰은 개발 목적부터, 오직 프리미엄 이미지만을 위한 기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난해한 소재와 비싼 단가, 복잡한 공정이 필요로 해도 생산을 강행했던 거죠. 그 점을 빌미 삼아 KG전자가 갑질을 해올 거란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요. 뭐, 어찌 됐든 저로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대놓고 이를 드러내자, 진상구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저기 대표님. 그건 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그 오해라는 말은 참 편리하군요. 불리할 때마다 끌어 쓰면 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 못 하고 우물우물하는 것이, 이 사람이 어떻게 대기업 부사장 자리에 앉아 있나 싶다.
“오해든 뭐든, 이미 끝난 일입니다. 닉스는 닉스폰 생산을 재개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생산을 재개한다 한들, KG전자와 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연간 1,000만 대 이상 생산될 닉스폰을 생산하겠다는 업체는 널리고 널렸는데 말이죠.”
“생산 업체는 많을지 몰라도 저희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업체는 드뭅니다. 그러니 대표님, 다시 한 번만 생각을…….”
“생각이고 뭐고 간에, 상식적으로 언제 물량으로 장난칠지도 모르는 업체와 어떻게 일을 합니까? 제 말 틀렸습니까?”
“이번은 확실하게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물량을 못 채우면 어떤 페널티도 감수할 테니. 한 번만, 딱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사장이 책상의 머리를 거의 처박다시피 하며 자비를 구걸해 온다.
쯧쯧, 감당도 못 하면서 왜 일을 벌여서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이럴 때 필요했다.
난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진상구 씨.”
“예.”
“저는 KG그룹을 좋게 봅니다. 기업 자체가 완전무결하다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경쟁사인 오성보단 깨끗하니까요. 그래서 전기차 쪽 협업을 먼저 제안했으며, 이번 위탁생산 역시 KG전자를 콕 집어서 고른 겁니다.”
그는 입을 꾹 닫고선 고갤 숙였다. 마치, 야단맞는 아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 때문에 닉스와 KG 사이에는 신뢰가 사라졌습니다. 서류로는 만들 수 없는 신뢰라는 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닉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에 조소가 흘러나온다. 저 모습도 지금뿐이지 돌아서면 내 등에 칼을 꽂으려 들 게 뻔했다.
난 음험한 속내를 숨긴 채 말을 꺼낸다.
“좋습니다. 기회를 드리죠.”
“저, 정말입니까?”
“다만, 닉스폰 생산은 재개할 수 없으니…… 주변기기라도 생산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오더든 간에 맡겨만 주시면 완벽하게 납품하겠습니다.”
진상구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그로선 닉스의 오더가 뭐든 상관없었다. 오직 닉스와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런 시그널만 있으면 부사장직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대신 서로 간에 신뢰는 없으니 원점에서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가죠.”
난 책상에서 서류철을 꺼내 그의 앞에 가져다준다.
“이건……?”
“익숙하실 겁니다. 그건 KG전자에서 쓰고 있는 기본 계약서니까요. 특이점이 있다면 마지막 장에 추가사항을 좀 기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천천히 확인하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서류를 받아든 진상구는 앞부분을 휘적휘적 넘긴다. 실제로 자신들이 쓰던 계약서와는 토씨 하나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손이 마지막 장에 딱 멈춰섰는데.
“저기, 대표님. 여기 마지막에 추가된 부분 말입니다.”
“말씀하시죠.”
“추가 2항에 있는, 닉스 측에서 판단하기를 제품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닉스는 납품된 모든 제품을 반품할 권한이 있다. 이 부분과 추가 5항인 납품일이 하루 지나면 수수료 100% 삭감, 이틀이 지나면 전체 출고가의 절반을 삭감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왜요. 지키기 힘들 거 같습니까?”
그는 서류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조심히 입을 연다.
“그렇다기보단, 이게 법적으로 좀 문제 될 소지가 있는 터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3조의2,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금지.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입에서 정확한 법률사항이 흘러나오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는 녀석.
“요즘은 기업을 굴리려면 법은 필수 아닙니까.”
“알고 계시면서 왜……?”
당황한 그를 보고 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시선을 받은 진상구도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진상구 씨, 그래서 사인 안 할 겁니까?”
* * *
“김 대리, 이게 닉스에서 오더 내린 물건이라고 했지?”
“엇? 그거 만지지 마십쇼. 진짜 큰일 납니다.”
“맨날 호들갑 떨긴.”
신 과장은 기다란 낚싯대처럼 생긴 막대의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막대의 몸체가 자동으로 길어졌다 줄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막대기 하나 오더 받으려고 부사장님이 직접 미국까지 가시다니. 닉스가 대단한 거야, 아니면 우리가 그만큼 다급한 거야?”
“우리가 아니라 오성이었어도 이번 오더는 덥석 물었을 겁니다.”
“왜?”
“그 막대기 선 발주량이 자그마치 1,000만 대랍니다.”
“히익! 1000만 대?”
신 과장은 놀라서 막대기를 찬찬히 살펴본다.
막대는 가벼우면서 충격에 강한 소재다. 그 끝에는 카본으로 만들어진 특수 집게가 있는데, 여기에다가 휴대폰을 매달아서 쓰게 만들어졌다.
“이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셀카봉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걸 어떻게 1,000만 대나 팔려는 거지? 닉스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물건 진상구 부사장님이 직접 받아 오셨잖습니까?”
“그랬었지.”
김 대리는 아무도 없는 개발실을 쓱 둘러보곤 소곤소곤 말한다.
“아무리 샘플을 들이박아도 통과가 안 된답니다. 설계 수정에다 소재 변경, 단가도 낮췄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저번 주에는 부사장님이 직접 미국까지 가셨는데도 리젝 먹었답니다.”
“크, 어쩐지 요즘 사내 분위기가 썩어 가더라니. 그런데 제품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문제가 있죠. 제품이 아니라 인간관계가요.”
“인간관계? 아, 혹시 닉스폰 단종 때문에?”
김 대리는 고갤 끄덕이곤 말을 이어간다.
“그때 진상구 부사장님이 무리하게 닉스폰 감산한다니까, 닉스서는 단종 때려 버렸잖습니까.”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자 신 과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래, 그랬었지. 그 당시엔 난리였으니까. 닉스 사장 놈도 진짜 독종이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그런 기질이 닉스를 이렇게 키운 거 아니겠습니까?”
“난 놈은 난 놈이야.”
“어쨌든, 그 사건으로 진상구 부사장님은 닉스에 단단히 찍힌 거 같습니다. 그러니 샘플 어떻게 보내도 전부 리젝 먹는 거고요.”
“그렇다면 우리 쪽에 오더는 왜 줬대? 오성에 줘버리면 그만이잖아.”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르지만, 소문으론 부사장님을 찍어내라는 닉스의 압박이랍니다.”
신 과장은 전후 사정을 듣고 고갤 절레절레 흔들어 댄다.
“해외기업도 갑 노릇 해대는 건 똑같네.”
“솔직히 우리 쪽에선 할 말 없습니다. 시작은 부사장님이 먼저 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에휴, 그 덕분에 애먼 개발실만 갈려 나가니. 이러다 1차 납기일까지 개발만 하다 끝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개발실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린다.
“히익!”
들어온 사람은 뒷담화의 장본인, 진상구 부사장이었다.
그는 놀라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두 사람 쪽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온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나마 짬밥을 먹은 신 과장이 먼저 고갤 숙인다.
진상구는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김 대리에게 다가간다.
“셀카봉 새 샘플은 나왔나?”
“여, 여기 있습니다.”
“테스트 결과값은?”
샘플과 서류를 받아든 진상구는 바람처럼 샘플실을 빠져나갔다.
남은 두 사람은 멍하니 그가 떠난 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샘플실을 빠져나온 진상구는 허겁지겁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런 허드렛일은 누군가를 대리해서 시켰겠지만, 이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강현우, 이 개자식이. 이번도 빠꾸 먹이기만 해봐라.”
진상구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대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겨 집무실에 도착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집무실의 소파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 뭐야?”
“수고가 많으십니다, 상구 형님.”
싱긋 웃으며 돌아보는 사내.
그는 이번 일을 크게 키운 장본인, 진승모였다.
‘저 얼뜨기 새끼가 회장님께 헛소리만 안 했어도.’
성질 같아선 당장에라도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를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진상구를 진승모가 가로막는다.
“뭐야? 미쳤어?”
눈빛만 보내도 얼어붙어 덜덜 떨던 녀석이 오히려 히쭉거리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의 머릿속에는 괘씸하다는 생각보다는 혼란이 앞선다.
‘무슨 일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때, 진승모가 샘플을 덥석 집어 든다.
“형님, 그 샘플 이리 주시죠.”
“뭐?”
“오늘부터 닉스에 관한 오더는 제가 핸들링하기로 결정됐습니다.”
기가 찬 진상구가 참지 못하고 진승모의 멱살을 움켜쥔다.
“어디서 개소리야!”
“회장님 지시입니다.”
순간 손에서 힘이 탁 풀려온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져나온 진승모는 자신의 구겨진 옷깃을 바로 세운다.
“지금까지 수고하셔서 분한 건 이해하지만, 폭력은 좀 자제해 주시죠.”
재벌가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은 진상구다. 그는 진승모의 여유만만한 행동거지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번에 깨달을 수 있다.
“진승모. 이번 일, 네가 설계한 거냐?”
“설계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마!”
이번에도 멱살을 쥐려 했지만, 진승모는 가볍게 그의 손을 흘려 버린다.
“예의상 한 번은 잡혀드립니다만, 두 번은 좀 그렇습니다.”
“이…… 이, 새끼가.”
진상구가 으르렁거렸지만, 진승모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린다.
“제가 설계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주제도 모르고 강현우에게 덤벼든 건 상구 형님 본인 아닙니까?”
“뭐? 주제?”
“왜요? 인정 못 하겠습니까? 그는 지난 4년간, 이름도 없던 닉스를 KG그룹보다 크게 키운 사람입니다. 형님 같은 사람 수백 명이 있어도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겠지요.”
분노에 진상구 어깨가 부르르 떨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승모는 제 할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런 거물에게 불나방처럼 뛰어드니,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는 그 과정에서 숟가락 하나 들이민 거고요.”
“회장님이 오냐오냐해주시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 착각하지 마. 네가 아무리 용써봐야 회장님 앞에서 재롱만 피우다 끝나는 거야.”
“흐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어깨를 으쓱거린 진승모는 안쪽으로 걸어가더니, 진상구의 자리에 떡 하니 걸터앉는다. 그리곤 책상 위의 명패를 집어 든다.
당연히 그 명패에는 진상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부사장 진상구라. 캬, 멋지네요. 능력도 없는데 친족이라는 거 하나로 부사장까지 달아주다니요. 역시 핏줄이 만만세입니다. 그죠?”
“개소리는 거기까지 하시지.”
그때였다.
진승모가 명패를 바닥으로 집어 던진다.
명패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진상구의 눈이 커다래진다.
“상구 형님, 제주도 AS센터로 발령 나셨더라고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