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56화 (156/206)

기적의 IT 재벌 156화

창밖으로 뿌연 서울의 도심이 보인다.

중국발 미세먼지와 차량 매연이 벌이는 환장의 콜라보.

그 아래론 바삐 걸어 다니는 행인들과 미니어처처럼 작은 차들이 놓여 있다. 그들은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도로를 빼곡하게 메워댄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한때 내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율주행을 탑재한 차는 소유주를 안전하게 회사로 출근시킨다. 주차할 자리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자율주행이 알아서 근처 주차장으로 향할 테니까.

한발 더 나아가 차량은 주차장으로 향하지 않고 도로를 혼자서 배회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제부터 자가용이 아니라 자율 택시로 변모한다.

자율 택시의 저렴한 요금으로 인해 택시나 우버 시스템은 사양길에 접어든다.

차츰 발전한 기술은 인간이 운전대를 잡는 걸 불법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율주행은 신호위반이나 과속, 음주, 졸음운전도 없다. 불확실성을 제거한 탓에 도로 위 교통사고가 1% 수준으로 줄어든다.

그 1%마저 무단횡단이나 보행자의 부주의에 의한 사고다.

대낮에 사람을 태우던 자율주행차들은 심야가 되면 일제히 도심 외곽의 충전소로 향한다.

충전소는 고압을 그대로 끌어 쓰기에 효율이 높고, 수요가 없는 심야 전기만 쓰는 터라 저렴하면서 대기 환경 개선에도 효과적이다.

이런 시대가 오려면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적어도 내가 살던 2020년에는 아직 멀게만 보였다. 차라리 망상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전기차와 모바일 시장에 진출한 닉스가 주도적으로 기술을 실용화한다면, 그전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강현우 대표님.”

상념에 빠진 나를 미모의 여직원이 끌어 올린다.

데스크 직원이라기보단 기내의 스튜어디스 같은 느낌을 주는 인상이다.

“집무실로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회장실이 아니라 집무실입니까?”

“예, 회장님은 부재중이시라. 진상구 부사장님이 대신해서 응접하시겠다 합니다.”

진양현 회장과 이야길 나눠볼 생각으로 직접 왔는데, 역시 갑자기 찾아와서 만나는 건 무리였나 보다.

그녀를 따라 승강기를 타고, 모퉁이를 몇 번 돌자 목적지가 나타난다.

“부사장님, 강현우 대표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여직원이 열어준 문 사이로 독한 향수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반사적으로 찡그려진 인상을 풀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날 보고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깡마른 사내가 웃으며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닉스의 강현우입니다.”

“반갑습니다, 강현우 씨. 일단 거기 앉으세요.”

사내는 통성명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앉는다.

각자의 앞에 차가 준비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냄새에 적응되는 게 아니라 두통이 밀려올 정도다. 그 때문에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제가 KG전자에 방문한 이유는 예상하셨겠지만, 닉스폰 생산 문제 때문입니다.”

“생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최근에 감산 통보를 하셨더군요.”

“아하, 그거 때문에 오셨군요.”

그는 가증스럽게도 이제야 기억난다는 듯 고갤 끄덕여 댄다.

“감산 통보라고 하니 어감이 좀 안 좋습니다.”

“이번 일이 통보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감산에 대한 협조 요청 정도로 해두시죠.”

시답잖은 말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난 이야기에 속도를 붙인다.

“협조 요청이라고 하셨으니, 이 자리에서 요청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닉스는 이번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매월 최소한 100만 대를 납품받길 원합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닉스의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100만 대씩 출고해 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저희도 신제품 출시가 임박했는데, 공장의 자원 대부분을 닉스폰에 쏟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미 약속된 물량이 있으면 그것부터 처리하는 게 도리 아닐까요? 신제품 출시를 늦추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죠.”

“약속이라…….”

진상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그건 평범한 미소가 아니라, 상대를 아래로 보는 듯한 기분 나쁜 미소였다. 사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이런 느낌을 받아 왔다.

그의 행동을 내 머리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닉스는 물품을 주문한 고객이고, KG전자는 주문받은 물품을 찍어내는 제조업체일 뿐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

시선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명판을 쳐다본다.

[KG전자 부사장 진상구]

진상구. 어떤 사람이었더라?

흐릿한 옛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 올려낸다.

내가 기억하는 건 진상구가 KG그룹 진양현 회장의 여섯 조카 중 하나고, 모바일 사업부를 말아먹고 해임된 남영 부회장의 업무를 대리해서 수행했다는 것까지다.

전임자가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하는 희대의 헛발질을 해둔 탓에, 후임인 진상구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거로 아는데…….

내가 잠시 생각하는 동안, 진상구는 책상 위로 서류 한 장을 꺼내 놓는다. 그건 닉스와 KG전자 간의 주고받은 닉스폰 위탁생산 계약서였다.

“닉스와의 계약서에 따르면 초도물량 200만 대를 제외하면 다른 계약사항이 없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계약서가 더 있습니까?”

“따로 없는 거로 압니다.”

내 대답에 진상구의 미소가 짙어진다.

초도물량 200만 대 외에 계약서가 없는 건, 후속 계약을 KG 측에서 차일피일 미뤄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하고 했던 수작질이겠지.

닉스를 상대로도 이런 짓을 해대는데, 지금까지 중소 협력업체들엔 어떤 대우를 해왔을까? 생각만으로도 역겨워서 속이 미식거린다.

“서류가 없다 하시니, 매월 100만 대가 미리 약속된 건 사항은 아니군요? 안 그렇습니까?”

“일전에 옵티무스4X 생산 건으로 감산했을 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확약을 받았습니다만.”

“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자사 제품을 제쳐 두고 타사 제품을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KG전자가 닉스의 하청업체도 아니고 말이죠.”

“닉스폰 생산 담당자와 직접 오갔던 대화입니다.”

“담당자요? 아하, 승모와 이야기하셨구나.”

그는 비웃음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 이번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말을 잇는다.

“승모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직급만 상무지 입사 2년 차인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죠.”

“그 말이 사실입니까?”

“KG전자 직원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탁, 하는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울린다. 상대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부사장님 말씀대로라면 진승모 상무와 진행했던 전기차 부품 건과 디스플레이 계약 건은 전부 무효라는 말이군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KG전자는 권한도 없는 신입사원을 닉스에 보내서 계약을 맺은 겁니까?”

그는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손을 저으며 수습에 들어간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구두로 오갔던 이야기는 서로 간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죠.”

“오해요?”

“예,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해 계약 내용을 서류로 남겨 두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좀 이상한데요. 부사장님 말대로라면, KG전자가 최근까지 닉스폰 100만 대를 생산한 건. 계약도 없는데 그냥 찍어서 납품했다는 소리군요.”

그는 반박하려고 입을 우물거리지만 결국 밖으로 내뱉는 걸 포기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었으니까.

그러다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어찌 됐든, 결정은 이미 끝났습니다. 내달부터 닉스폰은 30만 대만 생산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십시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또 일방적인 통보다.

보나 마나 닉스폰을 다른 곳에서 못 만드니까 갑질 좀 해보려는 거 같은데. 쯧, 더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었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닉스폰은 이달 말까지만 납품받는 거로 하겠습니다.”

“예?”

“못 알아들으셨습니까? 생산 중지해 달라는 말입니다.”

KG전자 모바일 사업부는 닉스폰 생산으로 자사 제품 손실을 메꾸고 있었다. 만약 닉스폰 위탁 생산이 끊기면 이번 3분기 적자는 확정이었다.

진상구는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됐는지, 다급하게 말을 쏟아 낸다.

“닉스폰을 타사에서 만들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큽니다. 제조비도 제조비지만 부품 수급도 문제가…….”

“저는 할 말 다했으니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시만요. 강현우 대표님, 닉스폰 생산을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집무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아본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서 일어나고 있었다.

“닉스폰은 이달을 마지막으로 단종합니다.”

* * *

예고 없이 닉스폰 단종을 통보받은 KG전자는 본사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된다.

당장 영업이익을 받치고 있던 닉스폰이 빠진 것도 치명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은 차기작부터 디스플레이와 배터리를 오성전자 쪽에 주문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소식은 모토로라가 본디 오성전자 부품을 써왔기에 생긴 단순한 해프닝이었지만, KG전자로선 가슴이 철렁할 만한 일이었다.

닉스가 오성 쪽과 긴밀한 관계가 되면 전기차 부품 사업도 빼앗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KG전자에서 닉스폰 생산이 뚝 끊겼고, 언론에서도 닉스폰 단종 소식이 퍼지게 된다.

[닉스폰 출시 5개월 만에 단종? 분석가들 “닉스폰의 단점은 마진이 너무 적었다는 것. 닉스로선 지속적인 판매에 부담이 컸을 듯.” 구매 예정자들 패닉.]

[닉스폰 단종 소식과 함께 리셀러들이 물량 싹쓸이. 웃돈 200달러를 주고도 살 수 없어서 구매 예정자들 분통을 터뜨려. 중고가도 천정부지로 뛰어 출고가와 비슷한 수준.]

[닉스 연구소에서 신형 스마트폰 개발 움직임 포착. 닉스폰2? 아니면 보급형 닉스폰? 모토로라 제품일 가능성도 배제 못 해.]

샌프란시스코 이전한 모토로라 신사옥.

이전하면서 내부를 다 뜯어고쳤기에 모든 것이 다 새롭다.

PC나 모니터는 물론이고 책상, 사무집기, 심지어는 내가 널브러져 있는 소파에서도 새것 냄새가 풀풀 난다.

누워 있는 내게, 매형이 다가온다.

“팔자 좋게 늘어져 있을 때냐?”

“늘어져 있는 게 아니라 재충전하는 겁니다. 밤새 모니터를 들여다봐서인지 눈이 뻑뻑해서 죽겠습니다.”

“이놈이.”

매형은 내가 누워 있는 소파에 억지로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어제 단종 소식 뜨고 난리가 났다.”

“그랬겠죠.”

내가 시큰둥하게 답하자.

“닉스 본사 앞에 시위하는 사람도 생겼어.”

“시위? 무슨 시위를 본사 앞에서 합니까?”

내가 반응을 보이자, 매형은 신이 나서 이야길 이어간다.

“무슨 시위겠어? 닉스폰 다시 생산하라는 시위지. 이번 닉스폰이 역대 최강으로 나왔었잖냐.”

“돈도 역대 최강으로 처발랐죠.”

닉스폰을 단종시키고 최종 매출 결과가 나왔다.

총마진은 5.1%로 이마저 광고 집행비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였으니, 사실상 손해 보고 판 셈이다.

“처음부터 돈 벌려고 출시한 건 아니었잖아? 닉스폰에 프리미엄 이미지는 확실하게 각인됐으니 계획은 완전히 성공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조금 아쉬운 결과기도 하네요.”

히쭉 웃은 매형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나저나, KG전자에선 요즘도 매일같이 연락 오더라.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을 하던데?”

“저한테도 오성도 쌍으로 연락 옵니다.”

KG전자는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미팅 요청을 해왔다. 처음에는 예의상 일일이 거절했으나, 여기에 오성도 냄새를 맡고 연락을 해대니, 최근엔 그냥 전화 자체를 피하고 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우리가 진짜 단종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나 보더라.”

“지금까진 공백기에 땜빵으로 닉스폰을 찍어서 짭짤했거든요. 꿀이었죠, 아주 개꿀.”

“자기들 신제품 나오면 잠시 세우고, 그치?”

“장난치는 거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할 거였으면 애초에 ODM 의뢰를 받아선 안 되는 거였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좋은 시절은 지난 다음에야 좋았던 걸 아는 법이지.”

매형은 몸을 일으켜 서류철 하나를 가져온다.

그건 이번 모토로라 인수와 함께, 넘어온 해외 공장 현황을 정리한 서류이었다.

“자, 일어났으니 일 좀 해보자고.”

“누가 들으면 제가 평소에 노는 줄 알겠습니다.”

매형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어간다.

“이번에 브라질 공장 말이다. 기존보다 공장을 확장하는 데 돈이 제법 많이 들더라고. 예상치의 2배는 되겠더라.”

“그래도 꼭 해야 합니다. 브라질에서 물량을 풀어줘야 미국 공장도 원활하게 돌아가니까요.”

모토로라의 브라질 공장은 1차 공장으로 변화 중이다. 규모가 크고 인건비가 싼 브라질에서 일차적으로 휴대폰을 조립하고, 반제품을 미국의 텍사스 공장에서 받아 완성 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made in USA 마크를 얻을 수 있음과 동시에 깐깐한 미국 공장의 QC까지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엄청난 세금 감면 혜택은 덤으로 따라오는 거고.

한참이나 공장 증설 건으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이번에 모토로라 본사에서 새로 뽑은 비서였다. 말이 비서지 근육이 울룩불룩한 게 총알도 막아낼 기세다.

“대표님,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우린 동시에 서로를 쳐다본다.

“매형, 일정 있었어요?”

“대표라잖아. 그럼 내가 아니라 널 찾는 거겠지.”

입이 무거운 비서가 말을 보충한다.

“한국 KG전자에서 왔다고 합니다. 진상구 부사장이라고 하더군요.”

“이야, 전화로는 부족해서 이젠 미국까지 직접 찾아오셨네.”

“찾아올 만도 하죠. 주제 모르고 까불다가 목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진승모가 말해주던데요. 진상구 부사장, 이번에 닉스 못 잡으면 콜센터 팀장으로 좌천시킨다나 어쨌다나.”

매형은 콜센터라는 말에 배를 붙잡고 낄낄거린다.

“어쩔래? 없다고 돌려보낼까?”

“콜센터로 보내자고요?”

“어쩌겠어. 그것도 다 인생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라 매형을 붙잡았다.

“아, 잠시만요. 일단 만나보죠.”

“어쩌려고? 이미 단종 뉴스는 나갔어. 지금 되돌리기엔 오히려 이미지만 안 좋아져.”

“이젠 슬슬 차기작을 준비할 타이밍인데, 뭐하러 닉스폰 생산을 재개하겠습니까?”

“그럼 뭐하러 만나? 질척거릴 게 뻔하잖아.”

난 되물어 오는 매형을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참에 진짜 하청업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여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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