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51화
애플의 임시회의실.
본디 이곳에서 열리는 애플 이사회는 매월 말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은 이례적으로 열흘 만에 다시 열리게 됐다.
반원형 테이블의 넓은 곳엔 5인의 이사회 멤버들이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CFO인 제프 베이커가 자리했다.
예전과 같은 배치였으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프의 표정이 조금 펴진 것 정도일까?
고요 속에 산발적인 기침 소리만 나던 회의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사회의 바실리 브린이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닉스챗의 점유율을 20% 넘게 빼앗아 왔더군요.”
“정확히는 28%입니다.”
그는 제프가 콕 집어서 말대답하는 모습이 아니꼬운 듯 상을 찌푸린다.
“뭐, 좋습니다. 제프 베이커.”
“말씀하시지요.”
“닉스챗을 사흘간 앱스토어에서 내린 결정이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진 않았습니까?”
제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론에 나섰다.
“무모했지만 결과적으로 점유율을 빼앗아 왔으며, 지금도 애플 메신저는 상승세에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사회에서도 당신의 이번 행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좋은 평가가 나왔지만, 제프는 본능적으로 이사들의 눈치를 살핀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이어질 뭔가를 위한 포석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닉스챗 밴은 사흘간이었죠?”
“그렇습니다.”
“다음 밴은 언제입니까?”
제프는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애플의 최대 주주인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잡스가 애플폰을 앞세워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을 때도 매출과 비교하면 마진이 부족하다고 투덜댈 정도였으니. 고작 점유율 28%를 뺏어온 거로 만족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었다.
하지만 이사회의 뜻대로 닉스를 더 궁지로 몰게 된다면, 역으로 닉스에서 폭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여기서 닉스를 더 자극하는 건 위험하다. 어떻게 해서든 이사회를 설득해야 해.’
입술을 질끈 깨문 제프는 준비해 온 말을 꺼내 들었다.
“이번 밴으로 점유율은 끌어왔지만, 파트너사인 닉스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추가 밴은 충분한 검토를 진행한 뒤 시행할 예정입니다.”
“닉스는 기껏해야 소프트웨어 개발사입니다. 그들이 플랫폼을 쥔 애플에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냥 밴 해버리세요.”
평생을 내려다보는 자로 살아왔기에 나올 법한 말이다.
제프는 속으로 쌍욕이 나왔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닉스는 모바일 앱 시장에서 독보적 영향력을 지닌 회삽니다. 그런 파트너사를 억지로 뭉개다간 앱 개발자들이 대거 반발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이탈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흠, 이탈이라…….”
바실리가 입을 다물고 생각을 고르자, 제프는 여세를 몰아 발언을 이어갔다.
“이사님도 아시다시피, 스마트폰과 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닙니까? 퀄리티 높은 앱이 줄면 애플OS에 장기적으로 독이 될 터. 결국, 추격 중인 구글에 따라잡힐 빌미만 제공하게 되는 셈이죠.”
이사회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그들에게 닉스라는 이름은 언제든 뭉갤 수 있는 존재였다면, 구글이라는 이름은 주는 무게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좋아, 효과가 있어.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제프는 일부러 헛기침해서, 시선을 모은다.
“이사회 여러분, 이번 일로 안드로이드OS에서도 애플 메신저 점유율이 유의미하게 늘었습니다. 0.8%에서 4%로. 무려 5배나 오른 셈이죠.”
이미 보고 받은 내용이었기에 바실리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제 말은 급할 게 없다는 소립니다. 닉스는 이번 일로 신뢰를 잃었습니다. 둑이 조그만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처럼, 한 번 잃은 신뢰는 봉합되긴커녕 계속 불신이 쌓여서 종국엔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가만 놔두면 저절로 점유율이 넘어온다?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라고 봅니다만.”
“이사님, 제가 가만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프는 삐죽하게 솟은 자신의 덧니를 드러내며 이사회 사람들을 돌아본다.
“리스크 있는 밴까지 갈 필요 없이, 닉스챗 보안에 대한 불신만 계속 심어주면 됩니다.”
“어떻게 말이오?”
“주기적으로 보안점검을 해서 낮은 점수를 주고, 경고를 남발하는 거죠. 그럼 닉스챗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제프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제 집무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수명이 십 년은 줄었겠네.”
그는 발언하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좋든 싫든, 제프는 닉스와 이사회 사이에서 정밀한 저울질을 해야 했다.
만약 저울의 추가 닉스 쪽으로 기운다면, 이사회에서 목을 칠 것이고, 이사회 쪽으로 기울면 닉스가 자신의 과거를 폭로할 것이다.
‘아직 괜찮아. 이 정도로는 닉스도 폭로 카드를 꺼낼 수 없을 거야.’
폭로전에 돌입하면 닉스는 애플과 적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과연, 플랫폼에 종속된 앱 개발사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닉스의 애송이가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쉽사리 폭로하지는 못하겠지.’
이대로 계속 줄타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CFO 자리서 시간을 끌다가 유럽 쪽으로 이직 처를 알아볼 생각이다. 애플의 전 CFO라는 직함은 어디를 가나 먹히는 명함이었으니 말이다.
한 시름 놨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의 긴장이 탁 풀려온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눕는다.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콧노래까지 흘러나온다.
그러길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요란한 벨 소리가 그의 휴식을 방해한다.
“젠장, 누구야?”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엔 받는 걸 택했다.
“여보세요.”
-제프 베이커 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전 닉스의 대니얼 강입니다.
순간 튀어 오르듯 몸이 소파에서 일으켜졌다.
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쥔 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지?”
-잘 아시잖습니까? 깜찍한 일을 벌이셨더군요. 앱스토어 밴이라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멍청할 줄 말이죠.
“…….”
-제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헛짓거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요.
이대로 분위기가 흘러가면 상대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 터. 제프는 억지로라도 허세를 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애플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애플과 전쟁? 당신의 죄를 폭로하는 데, 왜 애플과 전쟁이 됩니까?
“난 애플의 CFO야. 나를 건드리는데 애플이 가만있을 거 같아? 시시비비가 가려지기 전까진 닉스를 최대한 공격할 거다. 그때가 되면 애플OS에서 닉스챗 점유율은 바닥을 기게 되겠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 벌어질 문제 아닙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제 말을 무시한 당신을 처단하는 겁니다. 저는 무시당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거든요.
제프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대중들에게 인식됐던 닉스 CEO의 모습은 젊은 천재, 유능한 디자이너 정도였다. 하지만 방금 발언만 떼고 봤을 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사이코패스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오늘 오후 4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시간 뒤 군요. 로열 켄싱턴 호텔에서 기자회견 일정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죄명을 낱낱이 폭로할 겁니다. 기대하시죠.
“자, 잠깐. 내게 해명할 기회를 줘. 나도 내 의지로 이런 게 아니라고.”
-좋습니다. 최후의 변론을 들어보죠. 장소는 로열 켄싱턴 호텔 PH. 기자회견 10분 전까지는 오셔야 할 겁니다.
* * *
오늘의 원두는 탄자니아 AA.
내 취향에 따라 배전을 강하게 주어 신맛을 억누른 녀석이다.
핸드밀에 넣어 천천히 원두를 분쇄한다. 곧 도착할 손님을 위해서라도, 더 정성스럽게 작업을 진행한다.
은은한 커피 내음이 새 나올 때쯤. 문에서 쿵쿵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내.
급히 달려왔는지 숨까지 거칠어져 있었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일단 앉으시죠.”
제프는 말없이 시계를 힐끔 쳐다본다.
지금 시각은 3시 12분.
기자회견 시작까지는 48분밖에 남지 않았다.
핸드밀을 조작해 커피 분쇄를 이어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요한 실내엔 원두 가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그러길 잠시. 초조하게 지켜보던 제프는, 더 기다리는 게 힘들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라뇨?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짓을 하냔 말이다!”
“왜긴 왜겠습니까?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죠. 정성 들여 분쇄할수록 더 부드러운 향이 나온답니다.”
내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자, 제프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온다.
“나를 매장시켜서 네가 얻는 게 뭐야? 응? 이래선 닉스만 더 큰 피해를 본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나 하나를 없앤다고 애플이 바뀔 거 같아?”
“적어도 CEO인 쿡이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까요?”
제프는 고개를 크게 흔들어 댄다.
“천만에, 애플을 지배하는 건 CEO인 쿡이 아니야. 진정한 실세는 애플 초창기부터 대주주 자리를 꿰차고 있는 5인의 이사회들이지. 나나 쿡은 하수인일 뿐이다.”
“이번 일은 그들이 시킨 일이란 말입니까?”
“그래. 그들이 닉스챗의 점유율을 빼앗으라고 내 등을 떠밀었어. 단기간에 점유율을 뺏는 건, 너도 알다시피 밴밖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
“진짜야, 믿어줘. 네가 뻔히 내 약점을 쥐고 있는 걸 아는데, 내가 이런 미친 짓을 왜 하겠어? 오늘도 회의가 있었는데. 닉스챗 영구 밴을 하라는 걸 내가 뜯어말리고 오는 길이라고.”
난 분쇄된 원두를 드리퍼에 올리고, 천천히 물을 따랐다. 기다란 물줄기가 원두를 적신다. 진한 커피 향이 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당신을 쳐내도 이사회가 버티고 있는 이상 소용없다는 소리군요.”
“그, 그래. 차라리 날 계속 이용해서 이사회를 막는 게 나을걸? 난 네가 쥐고 있는 증거 때문에 반항도 못 하는 처지잖아. 안 그래?”
“당신이 이사회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다음 달에 앱스토어 보안검사를 시행할 거다. 그때 닉스챗의 보안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다시 한번 밴 시킬 예정이야.”
“닉스챗은 보안에 걸릴 만한 게 없을 텐데요? 혹시, 이번처럼 의혹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밴 할 겁니까? 물증도 없이?”
“한 번은 모르지만 두 번은 무리야. 사람들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그러니 이사회에 적당히 핑계를 대서 넘어갈 생각이다.”
“시간 끌기라는 거군요.”
예쁘게 추출된 원액에 뜨거운 물을 잘 섞는다.
공을 들인 탓인지 커피 향이 평소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죄송하지만 얼음이 없어서 아이스는 안 됩니다.”
“커피 생각 없어.”
“아쉽군요. 굉장히 잘 나왔는데 말이죠.”
난 눈을 감았다. 그리곤 꽃처럼 퍼지는 커피 내음을 음미하는 데 집중했다.
제프는 느릿한 내 행동에 초조해졌는지 주머니서 폰을 꺼내 든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했는데.
“신호가 없다? 여긴 호텔인데 왜 이런 일이……?”
“제가 통신전파를 막았습니다.”
“뭐?”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전화가 와서 방해하면 안 되잖습니까.”
그는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왜 그러시죠?”
“혹시, 녹음하고 있는 거냐? 미리 말해두지만, 증거 따위 내가 부정하면 그만이야. 재판을 질질 끌면 닉스만 불리해진다고.”
“요즘 시대에 녹음처럼 구닥다리 방식을 쓰겠습니까?”
난 픽 웃고선 탁자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벽에 걸린 대형 TV의 전원을 켠다.
“이, 이게 무슨……?”
TV에 떠오른 얼빠진 사내.
그건 바로 제프,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발이 걸려 엎어지고 만다.
“큭…… 망할. 이런다고 뭐가 바뀔 거 같아? 동의 없는 녹화는 법정증거로 쓸 수 없어!”
“법원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곳에선 이미 재판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헛! 설마, 이거 생방송?”
“이번 재판의 법관은 이 방송을 지켜보는 2천만 명의 시청자입니다.”
“2, 2천만 명?”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제프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굳어버렸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잠시 후면 이 동영상은 전 세계에 공유되겠죠. 과연, 그때도 애플이 모르쇠로 넘길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