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44화
[안갯속 하이넥스 인수전, 극적인 타결! SG그룹과 닉스 공동인수.]
[SG그룹 신성호 회장 “닉스는 훌륭한 기업. 앞으로도 긴밀한 관계 유지할 것.”]
[SG텔레콤 주가 연일 폭등 중. 하이넥스 인수 불확실성 해소와 함께, 닉스와 협력 기대감 반영된 듯.]
[하이넥스의 대표이사로 SG그룹 장녀 신수아 선임.]
치열하게 이어지던 하이넥스 인수전은 SG그룹과 닉스의 공동 인수로 마무리됐다.
최종적으로 닉스가 51. SG그룹이 49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으로 결정 났지만, 예외 조항으로 대표이사 자리에 수아가 있는 동안에는 경영권을 SG그룹 측에서 가진다는 조건이 붙었다.
내 옆엔 얼떨결에 사건의 주인공이 된 수아가 앉아 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오늘 자 조간신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신문을 읽어나가는 그녀를 찬찬히 관찰한다.
새하얀 피부에 조막만 한 얼굴, 눈코입은 세트인 것처럼 조화롭다.
아마 가상의 미인을 그린다면 딱 이런 모습으로 그리리라.
가만 보니 톱스타였던 그녀의 어머니보다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내게만 이렇게 보이는 건가?
눈에 콩깍지가 쓰였다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가 보다.
매번 뒤로 질끈 묶었던 새까만 머리카락이 자유로이 하늘거리고 있다.
이성을 마비시킬 듯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그 근원지인 머리카락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데.
탁.
매섭게 내 손을 후려치는 그녀.
표정에는 나 화났어요, 라는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다.
“수아, 너. 손이 되게 맵다.”
“아프라고 때린 거거든요?”
이젠 가자미눈을 하고선 날 바라본다.
“진짜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겠어요? 저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요.”
“왜? 느낌 있잖아. 하이넥스 대표이사 유수아.”
“저는 그런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그녀는 단단히 삐졌는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린다.
난 악동 같은 웃음을 흘리며 조간신문을 집어 든다. 그러곤 경제면을 펼쳐 들었다.
그곳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번 인수에 대한 기대감과 SG그룹에 대한 찬양으로 한 페이지 전체가 도배 돼 있었다.
“여기엔 네 기사도 실렸네. 어디 보자……. 하이넥스를 인수한 SG그룹 신성호 회장은 신임 대표이사로 신수아 씨를 지목했다. 신수아 신임 대표이사는 K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부에서 탁월한 실적을 낸 후, 닉스로 자리를 옮겨 닉스OS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기사를 읽으며 수아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는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지 귀가 새빨갛게 달아 올라있다.
“신수아 신임 대표이사는 단순한 재벌 3세가 아니라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가로서 미국 실리콘 밸리에 떠오르는 샛별이라 평가…….”
그녀는 더 이상 못 들어주겠던지 신문을 강제로 뺏어 든다.
“아이, 참. 기사가 순 엉터리잖아요. KG전자에선 스마트폰 사업을 축소하는 바람에 도망치듯 나온 거고, 닉스OS도 제가 진두지휘한 게 아니라 팀원 중 한 명이었을 뿐인데.”
“원래 경제면 기사는 이렇게 쓰는 거야. 그들에겐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뉴스에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면, 대체 뭐가 중요한 데요?”
난 읽던 경제지를 그녀의 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기사 말미를 찍어주고 설명을 이어 나간다.
“잘 봐, 기사는 하이넥스 주가가 12% 올랐다고 마무리했지?”
그녀는 고갤 살짝 끄덕였다.
“이건 투자자나 기존 주주들을 하이넥스에 붙잡아 두는 게 목적인 광고야. 신임 대표이사가 재벌 3세긴 하지만, 능력 있고 닉스와는 고리도 있으니 믿고 투자를 계속해달라는 의미지.”
“신문사에서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되냐가 아니라 지면 전체가 이런 식이야. 언론이라고 뭐 특별할 거 같아? 그들도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일 뿐. 그러니 한국 언론들은 광고주인 재벌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 쏟아내는 거고.”
“아, 저는 몰라요. 그냥 닉스가 100% 인수하면 될 텐데. 뭣 하러 SG그룹과 공동 인수한 거예요?”
“그게,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
SG그룹으로선 닉스가 계속 어깃장을 놓으면 인수 자체가 어그러질 위험이 있었고, 닉스 역시 심판 역할을 해야 할 정부에서 SG그룹 편을 들어주며 버티고 있는 판국이니,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내놓은 타결책이 양사 공동인수와 함께, 신임 대표이사를 수아로 앉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물어온다.
“정부에서 막아선다 해도, 닉스의 인수가가 더 높은데 계속 밀어붙이면 어쩌지 못하는 거 아녜요?”
“그렇긴 한데, 자칫 잘못하다간 SG그룹이 무리하게 돈을 투자해서 하이넥스를 먹어버릴 수도 있거든. 그렇게 되면 SG그룹으로선 엄청난 손해를 보는 거지.”
“SG그룹이 손해를 보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자신이 오너 일가면서도 닉스를 ‘우리’라고 칭하다니, 그녀가 SG그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편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수아야, 이번 인수전은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야. 표면상으론 SG그룹이 하이넥스를 인수한다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대는 건 100% SG텔레콤이잖아.”
“그 말은 용화 오빠가 피해를 보는 건가요?”
“피해는 신용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닉스에까지 돌아와. 정확히는 닉스OS지.”
하이넥스와 닉스OS의 상관관계.
수아는 감도 안 잡힌다는 표정이다.
난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목조목 설명을 시작한다.
“SG텔레콤은 SG그룹의 곳간이나 다름없어. 여기가 흔들리면 SG그룹 전체에 돈이 쪼들리게 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예, 통신사업은 망만 깔아두면 지속해서 현금을 벌어들이는 캐시 카우잖아요.”
“그런 SG텔레콤이 이번 인수에 4조 원 이상을 투입하면 어떻게 될까?”
“음…….”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문자답했다.
“SG그룹의 경영진은 당분간 투자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맬 거야. 그치?”
“4조나 지출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죠.”
“특히 IMF를 한 번 겪어봤던 세대라면 더더욱 현금 관리에 신경 쓰겠지. 여하튼, 경영진은 기존 사업은 유지하되,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씩 연기하거나 캔슬 시킬 테고…….”
“앗! 팬틱의 중국 공장?”
난 똑똑한 수제자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다.
평소, 애 취급받는 걸 싫어했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정답이야. 이번에 팬틱이 공장 증설에 쓰이는 돈만 9억 달러, 한화로는 1조가 좀 넘어. 정상적인 경영진이라면 그 돈을 그대로 쓰게 둘까?”
“아뇨……. 연기하거나 취소시키려 들 거예요.”
“거기다 이번 팬틱 인수와 하이넥스 인수는 나와 신용화 사이에서 있던 뒷거래야. 그걸 경영진이 알게 되면, 연기가 아니라 무조건 취소시키려 들겠지. 솔직히 신성호 회장님은 이미 눈치챈 분위기던데?”
신성호 회장 이름이 나오자 수아의 인상이 눈에 띄게 찌푸려진다.
“혹시, 신 회장님 이야기 나오면 불편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곤 고개를 떨군다.
“수아야? 유수아?”
살짝씩 떨리는 그녀의 몸. 작지만 흐느끼는 듯한 소리도 들려온다.
순간, 내가 실수했구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잠시 후, 가늘게 젖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우 씨는 제가 다른 재벌들처럼 행동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재벌가 사람들은 철이 들기 전부터 경영권을 놓고 싸워요. 꼭 그룹 경영권이 아니더라도 계열사 하나라도 더 빼먹으려고 악착같이 상대를 물어뜯죠. 어제는 형제끼리, 오늘은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밤사이에 누구 하나가 죽었다 해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저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어떻게 빼 올까만 생각하지.”
그녀의 말이 과장됐다고 생각진 않는다.
얼마 전, 신용화에게 느낀 감정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제가 하이넥스 사장 자리에 앉으면, 다시 그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고 말 거예요. 이제야 그 지옥에서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미안, 난 그런지도 모르고.”
그녀에겐 내가 모르는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
상태가 이렇다면 억지로 하이넥스 사장 자리에 앉는 게 고문이나 다름없을 터.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할 게. 그 자리에 신용화를 앉히든 할 테니까, 수아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왁!”
고개를 번쩍 치켜든 그녀.
“으헙!”
내가 놀라서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자,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며 웃어댄다.
“현우 씨, 완전히 속았죠? 그렇죠? 히히.”
“뭐야, 전부 연기였어?”
수아는 나를 향해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당연하죠. 제가 고작 이런 일로 울 거로 생각했어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스무 살에 빈손으로 재벌가에서 뛰쳐나올 정도로 강심장인 앤데, 이런 일로 울 리가 없지.”
“빈손은 아니었어요. 원룸 보증금과 품위 유지비 정도는 챙겨서 나갔으니까요.”
“돈 떨어질 때까지 취직을 못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될 때까지 반복해야죠.”
엉성한 계획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언제까지 현우 씨에게 도움만 받을 순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제가 확실하게 능력을 보이겠어요.”
그녀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리라뇨. 저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예요. 그래서 현우 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거라고요.”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춘 뒤 사라졌다.
난 멍하니 수아가 떠난 쪽을 바라본다.
얼핏 보기론 그녀의 뺨에 눈물 자국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 * *
하이넥스 인수 건으로 양사의 조율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쯤, 오랜만에 신용화가 닉스까지 찾아왔다.
“강서방.”
“오랜만입니다. 신용화 씨.”
그가 주먹을 내밀자, 난 손바닥으로 탁 후려치며 맞받았다.
“그간 뭐 한다고 코빼기도 안 보였습니까?”
“이야, 천하의 강서방이 내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거야?”
“신용화 씨 얼굴이 아니라 팬틱 중국 공장 건 때문에 그럽니다. 부지선정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 삽도 못 뜨고 있는지.”
갑자기 손바닥을 펴 보이는 신용화.
“잠깐, 스톱. 그 일은 내가 아니라 너희가 문제잖아.”
“닉스가요?”
“닉스가 아니라 텐센트.”
난 금시초문인 일이라 그에게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보냈다.
“중국 현지법인에 출자를 반반씩 하기로 해놓고, 부지를 매입하니까 갑자기 25%밖에 못 내겠다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난 무슨 일인지 대번 알아채고 킥킥거렸다.
“마화텅 대표에게 한 방 먹었군요.”
“현우 너, 뭔가 알고 있지?”
“보고만 받았습니다. 마케팅비를 청구하지 않는 대신, 공장 설립비를 팬틱 측에서 추가로 부담하기로 했다던가? 저는 자발적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요.”
“뭣이? 자발적? 돈을 자발적으로 내는 새끼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그는 분을 참느라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댄다.
“얌마. 아군끼리 총질하고 이래도 되는 거야? 난 닉스가 컨트롤 해줄 줄 알고 들어온 거야. 이럴 줄 알았다면 사업 시작도 안 했다고.”
“닉스가 텐센트의 최대주주이긴 하지만 경영은 오롯이 마화텅 대표의 몫입니다. 제가 어찌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녜요.”
“아오! 이걸 확 때려치워 버려?”
“부지 매입까지 끝났다면서요.”
“그러니까 더 열 받는 거지. 내가 다음부터 중국 놈들을 믿으면 성을 간다 성을.”
“유수아에 이은 유용화가 되는 겁니까?”
쏘아보는 눈빛을 보니, 농담 한 번 더 했다간 진짜로 들이박을 기세다. 어이쿠 무서워라.
씩씩거리던 그는 냉수를 내리 2컵이나 들이마신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푸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닌데, 휴.”
“냉수 한 잔 더 드려요?”
“그건 됐고, 이번에 샘플 나왔다며?”
“무슨 샘플요?”
“닉스폰 샘플 나온 거 알고 왔다. 나한테까지 숨기기야?”
KG전자 쪽에 보안을 신경 써 달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했건만. 조만간 진승모를 불러서 정신교육을 다시 해줘야겠다.
난 서랍장에 모셔뒀던 스마트폰을 내놓는다.
“이겁니다. 닉스폰2012.”
공개와 동시에 와! 하는 감탄사를 터뜨리는 녀석.
“랜더링을 보긴 했었다만, 실물은 완전 깡패 수준인데?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내는 거야?”
“제가 10년이 넘도록 준비한 디자인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10년?”
“어, 그러니까……. 폴더폰 시절부터 생각했었거든요. 미래에 휴대폰이 이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역시 난 놈은 다르긴 하네. 이러니까 잡스가 뻑이 갔지.”
신용화는 닉스폰 샘플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뒤집어도 본다. 그러면서 연이어 감탄사를 내질렀다.
“내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휴대폰을 보고 자랐거든?”
“SG그룹의 회장님 아들이니까 당연히 그랬겠죠.”
내가 빈정거렸지만, 그는 간단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 한다.
“내 생전에 이런 디자인은 처음이다. 진짜, 미쳤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네. 애플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사실 이런 반응은 당연한 거다. 2011년도에 2017년에나 나올 법한 수준의 디자인이 나왔으니까.
게다가 재질도 플라스틱을 쓰던 시대에 글래스, 알루미늄. 소량이지만 티타늄과 세라믹까지 썼다.
“괜히 이 타이밍에 증설했다가 팬틱은 쪽박 차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가격대가 차이 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하긴, 팬틱과 닉스는 대중의 기대치부터 다르지.”
“그런 의미에서 팬틱의 새 제품도 같은 날 공개하시죠?”
“공개를 언제 하려고 그래?”
“내년 초, 라스베이거스에 열리는 CES(International Consumer Electronics Show · 세계가전전시회)에서 공개할까 합니다.”
“가만, 이번 CES에는…….”
닉스폰을 보느라 정신없던 신용화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알고 있습니다. 오성전자의 갤럭시스S3가 공개될 예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