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43화 (143/206)

기적의 IT 재벌 143화

사락사락.

스케치북 위로 연필이 휘날린다.

날렵한 옆 라인과 강렬한 인상의 전면부.

하나씩 봤을 땐 훌륭하지만 섞어보면 두 디자인이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느낌이다.

“이것도 아니야.”

스케치북을 단번에 찢어내, 파쇄기에 밀어 넣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디자인은 머릿속에 무궁무진하건만, 매번 발목을 잡는 건 현시대의 기술력이다.

베젤을 얇게 만들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까만 칠한 이너베젤로 눈속임을 해야 했고, 기기의 얇기도 한계가 있었기에 사이드라인을 유선형으로 집어넣어 더 얇아 보이는 효과를 준다.

어쩔 수 없이 하나둘 현실에 타협해서 디자인하다 보면, 결과는 그저 그런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흔해 빠진, 양산형 디자인 말이다.

“임팩트가 없어. 임팩트가. 첫눈에 강렬한 느낌을 줘야 할 텐데.”

드르륵 소리를 내며 파쇄기가 또 하나의 스케치를 삼킬 때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세요.”

전담비서인 김나나 대리가 들어와 고개를 숙인다.

“대표님, SG에너지 신석호 부회장님이 미팅 요청을 해왔습니다.”

“또요?”

“예, 닉스 소프트로 직접 온다고 전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흠…….”

이번 역시 하이넥스 인수 건으로 오는 게 뻔했다.

그가 1차로 왔을 땐 은근히 협박조로 인수를 포기하라 지껄이기에, 바로 다음 날 입찰가를 3,000억 더 올려버렸다.

그랬더니 다음에 왔을 땐 제발 포기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라.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그렇겐 못 해주지.

하이넥스라면 개인적인 욕심도 있고 말이야.

이번에 오면 인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려야겠다.

“저녁에는 스케줄 있습니까?”

“대현 자동차의 구현민 부회장님과 식사가 예정돼 있습니다.”

“아, 그랬었지.”

대현도 최근 들어 구애의 정도가 심해졌다.

볼보 전기차 공장이 돌기 시작했고, 여론 조사에도 전기차를 사겠다는 말이 많아지니 똥줄이 타나 보다.

“저녁은 무리니 5시 전에만 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방을 나서고, 난 무언가에 홀린 듯 밖을 바라본다.

창밖엔 어느덧 새하얀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정신없이 일만 쫓아다닌 탓에 가을이 가는 것도 몰랐나 보다.

가만 보자. SG그룹이 하이넥스를 인수할 때가 내년이었던가, 내후년이었던가? 지금 상황 굴러가는 꼴을 보면 내년 초가 확실해 보이긴 한 데…….

본래라면 입찰가를 더 높게 쓴 닉스가 하이넥스를 먹었어야 했지만, 정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간 끌기에 여념이 없었다.

분명 신석호 쪽에는 정부 측과 연결고리가 있을 테지.

만약 여기서 내가 계속 어깃장을 놓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정부는 나름대로 필사적인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이미 하이넥스 주인은 SG그룹으로 결정이 났으니 제삼자인 닉스는 알아서 빠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반도체 시장이 호황을 맞이할 걸 뻔히 아는 나로선 순순히 물러나 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신용화 녀석과 했던 약속도 있지 않던가.

신석호 쪽이 다시 SG텔레콤 키를 쥐면 닉스에게도 손해였으니 이번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답이었다.

결정을 내리고 다시 스케치에 집중한다.

* * *

사각, 사각.

드르르륵-.

파쇄기가 소리가 4번 정도 더 들려올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예.”

“SG그룹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세요.”

문이 열린다.

당연히 신석호가 들어오리라 생각했지만……. 방문자는 내 예상을 뒤엎은 사람이었다.

SG그룹의 신성호 회장!

재계 20위 밖이었던 SG그룹을 재계 4위까지 끌어올린 거물. 그의 공과 과는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능력 하난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반갑네, 난 신성호라고 함세.”

“안녕하십니까, 닉스의 대표인 강현우라고 합니다.”

맞잡은 손아귀에서 묵직한 악력이 느껴진다.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건강미가 넘치는 탓에 예순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이어서 동행한 신석호 부사장도 인사를 해왔지만 신성호 회장의 강렬한 인상 덕분에 그의 존재감이 흐릿해졌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할 이야기가 많으니 일단 앉음세.”

“아, 그러시죠.”

어째선지 그의 눈빛만으로도 내 몸이 위축되는 듯했다.

지금까지 숱한 유명인사를 만났던 난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우린 소파에 마주 앉았다.

먼저 호방하게 웃은 신성호 회장이 이야길 시작했다.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닉스라는 기업을 4년 만에 여기까지 성장시켰다지? 그것도 빈손으로 시작해서 말이야.”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고?”

신성호 회장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옆을 쳐다본다. 그곳엔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신석호가 있었다.

“내 자식놈들은 재벌가에 태어난 운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할 줄 아는 거라곤 가진 걸 지키는 게 전부지.”

“아버지!”

“시끄럽다. 어디서 큰소리냐!”

신성호 회장의 일갈에 신석호의 꼬랑지가 바로 내려간다. 범 앞에 선 개가 딱 저런 꼴이지 싶다.

다시 그의 시선에 내게로 돌아온다.

“자네에겐 먼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네.”

“감사라뇨?”

“우리 막내 아들놈.”

“신용화 씨를 말씀하십니까?”

신용화 이름이 나오자 신성호 회장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미세한 부분이었지만 방금 신석호를 나무랐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래, 녀석이 자넬 만나고부터 완전히 딴사람이 됐어. 매사 의욕이 부족하고 흐리멍덩하던 놈이, 지금은 죽기 살기로 일을 쳐내고 있지.”

“아, 그렇습니까.”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뭘까?

신석호까지 동행했다면 노리는 건 하이넥스 건으로 온 게 확실한데, 왜 쓸데없는 가정사를 읊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아 참. 자네.”

“예, 말씀하시죠.”

“결혼 날짜는 언제로 잡을 건가?”

순간, 무슨 소린가 싶어서 신성호와 신석호를 번갈아 쳐다본다.

옆에 앉은 신석호 역시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는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 거울을 보면 나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겠지.

잽싸게 늘어진 얼굴 근육을 긴장시켰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자네가 우리 수아와 교제한 지도 벌써 3년 차라며? 나이도 찼으니 슬슬 식을 올려야지. 안 그런가?”

“아니, 그게…….”

아직도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말을 우물거리자, 웃던 신성호 회장의 낯이 일순간 변한다.

“혹시, 우리 수아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저희는 진지하게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식은 왜 거절하는 건가?”

“거절이 아닙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됐을 뿐인지라…….”

갑자기 무릎을 탁 소리 나게 내리치는 신성호 회장. 그는 다짜고짜 얼굴을 앞으로 들이민다.

“좋네, 그렇다면 당장 약혼식부터 올리는 거로 하지.”

“예?”

“그래야 나도 장인어른 소리 좀 들어보지 않겠나. 크하하하.”

일흔 먹은 노인네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먹먹할 정도다. 그는 혼자서 웃다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장인어른 소리는 농담이지만 약혼식은 진짤세.”

“일단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실은…… 수아와 나 사이가 데면데면하거든. 집안사에 문제가 좀 있어.”

SG그룹의 신성호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다.

그가 갈아치운 여자만 해도 운동장을 한 바퀴 돌릴 정도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혼 역시 밥 먹듯 해서 지금은 넷째 부인을 맞이해서 살고 있었다.

그의 첫째 부인인 LK그룹의 김선화와 낳은 자식이 첫째 아들인 신석호와 둘째 아들 신윤호였고, 유명 여배우였던 둘째 부인인 유은영이 낳은 자식이 셋째 아들인 신용화와 딸인 신수아다.

수아가 직접 집안 사정을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아버지의 성인 ‘신’을 버리고 어머니 성인 ‘유’를 따른 것으로 볼 때, 필시 신성호 회장의 여성 편력 때문에 일이 났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구먼.”

신성호 회장은 회한에 젖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다 한참이 흐른 뒤, 말이 이어진다.

“우리 수아가 나와 연을 끊자며 나간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네.”

“아…….”

“후후, 수아는 아무 잘못 없어. 전부 내가 잘 못 한 거지.”

신성호 회장은 말을 끊고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자식이 아비를 닮는다고, 그 모습은 궐련을 꺼내 드는 신용화와 판박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불을 붙이려다가, 슬쩍 나를 보고 묻는다.

“한 대 태워도 되지?”

“그러시죠.”

“고맙네.”

라이터 소리에 이어서 연기가 치솟는다.

담배를 길게 머금은 후에야 신성호 회장의 말이 이어진다.

“강제로도 집에 데려 와봤고, 내가 직접 찾아도 가봤네. 그래도 그 아인 마음을 열어주지 않더군. 내가 그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탓이겠지.”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아들인 그가 이야길 이었다.

“후우- 벌써 6년이야. 6년. 자넨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인 줄 아나?”

“글쎄요…….”

“그런 딸아이가 어느 날, 웬 사내놈을 만나고 있다더군. 어디서 일하는지도 모르는 나부랭이 놈이었어. 벤처기업인가? 뭔가를 하는 반백수 놈이었다지.”

난 말을 하려다 삼키곤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난 놈을 바로 쳐내려고 했지. 말이 되는가? 재벌 집 여식과 반백수 놈의 교제라니!”

“…….”

“그런데 말이야. 그 나부랭이 놈이 글쎄, 맨손으로 재벌가에 준하는 기업을 일궈버렸지 뭔가. 그게 끝이 아니라 지금은 우리 SG그룹과 정면으로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커서 내 앞을 막고 있네. 이 이야기를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이야기의 반백수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일을 해냈군요.”

“그렇지? 정말 능력 하난 타고난 놈이야. 내 주위에는 날 때부터 금수저를 쥐여줘도 쩔쩔매는 놈이 수두룩한데 말이야.”

그는 태우던 담배를 비벼 끈다. 그러면서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데, 어찌나 강렬하던지 시선을 피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자넨 젊은이의 패기, 승부사의 과감함,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 그 모든 걸 가졌지. 난 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기재가 자네일 거라 의심치 않네. 그런 보물을 사위로 삼을 수 있다니. 어찌 흡족하지 않겠는가?”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나,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이에 풀고 갈 매듭이 남아 있지.”

“하이넥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이넥스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앉은 신석호의 눈이 반짝인다. 겉돌던 이야기가 드디어 본론으로 돌아온 것이다.

“난 이번 인수에 회사의 사활을 걸었어. 사업의 다변화는 물론이고 SG그룹이 내수 기업이라는 오명을 씻을 절호의 기회라 여긴 탓이야. 그러니 사위 될 사람이 양보해줄 순 없겠나?”

“죄송하지만 장인어른 되실 분이라 해도 양보는 어렵겠습니다.”

“SG그룹이 하이넥스 인수에 얼마나 공을 들인 줄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인가? 이번 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줄을 섰어. 우리가 번호표 1번으로 말이야.”

“인수전은 얼마나 공을 들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 하냐의 싸움 아니었습니까?”

내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답하자. 그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내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럼 장인어른께서는 수아와 같이 입장하는 기회를 날리시는 거죠.”

이야기가 뚝 끊긴다.

날 무섭게 노려보는 신성호 회장. 시선 때문에 따끔따끔하다는 말이 진짜 와닿는 순간이다.

이번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난 억지로, 오기로, 쏟아지는 기세를 버텨냈다.

말없이 시간이 흐른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목이 바짝 말라와 마른 침을 세 번쯤 삼킨 거 같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신성호 회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래 이런 식으로 나와야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야.”

그는 한참이나 껄껄거리면서 웃더니, 자세를 고쳐 잡는다.

드디어 진짜가 온다. 난 무슨 제안이 오든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선 귀를 열었다.

“SG그룹의 회장으로서 닉스의 대표이사에게 정식으로 제안을 하나 하지. 이번 하이넥스 지분을 50:50으로 나눠서 인수하자고 말일세.”

50:50? 딱 절반씩 나눠버리면 경영권을 누가 행사한단 말인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네. 당연히 절반씩 나누면 잡음이 나오겠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와 닉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사람을 대표이사로 앉히면 어떻겠나?”

그 말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신석호의 얼굴이 굳어진다.

행여나 신성호 회장 입에서 신용화의 이름이 나올까 봐 그런 것이리라. 나 역시 중재안으로 신용화가 거론될 거로 예상했다.

신용화면 서로 나쁜 카드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SG그룹 측 인사인 건 명확하기에 내가 뭔가를 더 얻어갈 만한 명분이 있다.

SG그룹에 어떤 걸 얻어 내면 좋을까? 지주회사의 지분? 아니면 기술 제휴도 좋겠다.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신성호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선지, 그는 내 머리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어, 우선은 탐색에 들어간다.

“SG그룹에 몸담은 사람이 아닌, 제3의 인물이라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난 닉스 측 인사를 추천하려 하니까.”

“예?”

당황한 내 반응에 신성호 회장은 진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SG그룹은 하이넥스의 대표이사로 신수아를 추천하겠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