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40화
“기기에 배터리를 2개 쓴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차라리 분할 하는 공간을 터서 용량을 늘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지금의 기술로만 봤을 땐, 왕정현 부장의 말이 정답이다. 잔재주를 부려봐야 배터리 용량을 늘린 것만 못한 것이 현실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배터리를 썼을 때 이야기다.
“2개의 배터리는 각기 다른 종류가 들어갑니다. 위쪽 공간에는 일반 배터리가, 아래쪽 작은 공간에는 서브로 닉스의 신형 배터리가 들어가죠.”
“신형 배터리라 하시면…… 헙! 설마 전기차에 쓰는 그, 기적의 배터리가 들어가는 겁니까?”
“기적의 배터리요?”
내가 되묻자, 왕정현 부장이 겸연쩍은 듯 콧등을 긁적인다.
“KG화학 다니는 동기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기존 이차전지보다 용량도 높고 생산단가도 싸면서 안정성까지 잡았다고요. 문제는 충전 효율이 떨어진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번에 탑재하는 걸 보니 해결됐나 보군요?”
“아뇨, 아직 완전치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메인으로는 기존의 리튬 이온 배터리를 쓰다가 방전 직전에 보조로 달아둔 리튬 에어 배터리가 바통을 넘겨받는 방식을 쓰는 겁니다.”
“아하! 그거라면 리튬 에어 배터리의 부하를 줄일 수 있겠군요.”
“듀얼 배터리 시스템을 쓰면 충전하면서 사용하는 패턴에도 대응할 수 있죠.”
“굿 아이디어입니다. 역시 혁신의 아이콘인 닉스다운 발상이군요.”
그때 들러리처럼 앉아 있던 젊은 직원이 기습 질문을 해온다.
“이 듀얼 배터리 시스템을 쓰면 용량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습니까? 이미지상으로는 위쪽 배터리보다 공간이 절반에 불과…….”
“김 대리!”
왕정현 부장의 호통이 날아들어 질문이 끊긴다.
그런데도 김 대리는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왕 부장도 호통을 치긴 했다만 내심 궁금해하는 눈치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쪽 계통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 비슷한가 보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눈치도 없이 민감한 부분을 여쭈었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조사엔 공개해야 할 부분 아니겠습니까?”
날 바라보는 세 사내의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진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난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말을 이었다.
“메인인 리튬 이온 배터리가 2,100mAh. 보조로 들어가는 리튬에어 쪽이 4,400mAh입니다. 토탈 용량이 6,500mAh이 되는 거죠.”
충격적인 발표에 KG전자 직원들의 표정에 경악과 감탄이 섞인다.
“이거…… 엄청 난데요? 이쯤이면 혁신을 넘어선 기적입니다. 기적.”
“마, 말도 안 되는 기술이…….”
“절반의 공간을 쓰고 4,400mAh라니 진짜 기적의 배터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군요.”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존 최고급 스마트폰이라고 해도 2,000mAh 수준도 못 넘기는 게 태반이었으니, 참고로 애플폰5의 공개된 배터리는 고작 1,440mAh에 불과했다.
“그리 놀라실 거 없습니다. 이론상 6,500mAh지만 리튬에어 쪽은 피로도를 관리해야 하니 30% 이하에서만 작동될 예정입니다. 실제로 체감 성능은 1.5배를 소폭 웃도는 정도겠죠.”
“1.5배라도 현존 경쟁작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가까운 예로, 저희 옵티무스2X만 해도 닉스OS를 쓴 옵티무스2N과 체감 배터리 타임이 2배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서 또 1.5배나 향상돼 버리면…… 닉스폰과는 게임이 안 될 거 같습니다.”
왕정현 부장의 목소리 톤이 점점 거세진다.
그도 그걸 알았는지 맹탕이 된 커피를 쭉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닉스폰은 디자인적으로 완성도는 높지만, 부품 단가가 고가고, 난해한 소재를 선택했으며, 그 때문에 무리한 가격 정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리석었군요. 닉스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선택을 했을 리 없는데 말이죠.”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고급화 정책이 언제나 들어맞는 건 아니니,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죠.”
왕정현 부장에겐 내 말이 들리지도 앉나 보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꽂혔다고 하던가?
“어쨌든, 제가 요청한 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KG전자 설계팀에서 임의로 작업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설계가 완성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내가 먼저 자리서 일어나 손을 뻗는다. 왕 부장도 손을 맞잡아 왔다.
“제 새끼를 잘 부탁드립니다. 왕정현 부장님.”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최고의 걸작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닉스와 KG전자는 닉스폰 납기 문제로 릴레이 협상에 들어갔다.
KG전자 측에선 연말까지 300만대라는 무리한 납기일을 늦춰주기 원했고, 닉스는 납기일을 맞추면 추가 인센티브는 지급할 수 있으나 늦추는 건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연말까지 남은 시간은 4개월 남짓.
발등에 불이 떨어진 KG전자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우선, KG전자는 내년 2월에 출시하기로 했던 옵티무스4X의 출시를 뒤로 미뤘다.
그 공백을 10월에 출시할 옵티무스 LTE의 판촉으로 메꾸기로 했으며, 옵티무스4X에 사용될 부품과 기판을 그대로 닉스폰으로 돌려 납기일을 당기기로 했다.
닉스 역시 한 발 물러섰다.
닉스폰의 부품과 설계를 옵티무스4X와 흡사하게 수정함과 동시에, 기존 연말 납품에서 내년 2월로 일정을 미뤘다.
대신 2월까지 납품이 안 되면 엄청난 위약금을 거는 조건을 내걸었다.
양 사 모두 한 발씩 물러선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그날부로 닉스폰은 정식 생산일정에 돌입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처음부터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출시 되리란 기대는 없었다.
모바일 기기는 제조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운영체제 세팅부터 시작해서 각국의 복잡한 인증절차까지 거쳐야 했기에, 연말에 기기를 받는 다 해도 실제 출시일은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무리한 납기 조건으로 인해 KG전자와 협상에선 많은 양보를 얻어 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할까.
닉스와 KG전자가 협상 줄다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건 바로, 베가 레이서N을 출시한 팬틱이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OS 병행 금지 조치 덕택에 모든 제조사가 안드로이드OS로 돌아선 것으로 모자라, 경쟁자였던 KG전자까지 닉스OS를 포기해 버렸으니.
유일한 닉스OS 스마트폰인 베가 레이서N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닉스 소프트 대표 집무실.
원탁의 테이블 맞은편엔 관리팀 직원들이 보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9월 베가 레이서N의 판매량은 국내 42만3천대, 해외 11만6천대입니다. 현재 9월 생산분은 물론이고 12월 생산분까지 매진됐습니다.”
“잠깐만요. 10월이니 아니라 12월요?”
내 질문으로 발표가 끊긴다.
덕분에 보고를 위해 대기 중이던 직원들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예, 베가 레이서N은 12월 생산분까지 예약이 끝났다고 합니다.”
“잘 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국내나 북미 시장에서 인기도 많지만 특히 반응이 좋은 곳은 일본입니다. 프리미엄이 1만엔 이상 붙은 터라, 여행객은 물론이고 보따리상까지 달라붙어 베가 레이서N을 사들이고 있다 합니다. 그 덕분에 국내도 물량이 달리는 처지고요.”
닉스로썬 베가 레이서N이 많이 팔릴수록 좋은 일이다.
닉스OS 사용자층이 두터워질수록 나중에 출시될 닉스폰도 시너지를 받을 테니까.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입니까?”
“자사 제품이 잘 팔리면 물량을 더 찍어내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잖습니까? 그런데 팬틱은 오히려 물량을 줄이고 있습니다.”
자사 제품의 희소성 마케팅을 위해 물량을 조절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하지만 팬틱은 워크아웃 중인 기업 아닌가? 물이 들어오면 기를 쓰고 노를 저어도 모자랄 판에 물량을 오히려 줄인다고?
뭔가 이상하다.
팬틱은 구글 대신 닉스를 택했기에 안드로이드OS를 쓸 수 없다.
그 말은 즉, 공장에서 찍어내는 모든 폰이 베가 레이서N이라는 소리다.
대체 생산품도 없는데 어떻게 물량을 줄이지? 공장을 놀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쩌면.
순간적으로 퍼뜩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털레털레 흔든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건 아닐 거야.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집무실의 공기가 굳어 있다. 아무래도 내 표정 때문인 듯하다.
“오늘 보고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직원들이 떠나고 다시 고요해진 집무실.
난 책상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리곤 결국 인터폰을 집어 든다.
-비서실입니다.
“팬틱의 송태석 사장, 제가 좀 만나고 싶다 전하세요.”
-미팅 일정 잡으라는 말씀이신지요?
“아, 아니다. 그냥 여기로 오라 하세요. 최대한 빨리.”
내 맞은편에는 30분 만에 도착한 팬틱의 송태석 사장이 앉아 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계속해서 닦아대고 있었다.
“송 사장님, 최근 들어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요.”
“베가 레이서N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예, 닉스OS의 게임을 찾는 수요 때문에 일본에서는 1만 엔이나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였습니까?”
그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어색하게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 모든 게 강 대표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닉스와 손잡은 다음부터는 팬틱도 승승장구 중입니다.”
“흐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예? 어느 부분 말입니까?”
“물건이 잘 팔리면 증설을 하든, 연장 근로를 시키든, 물량을 더 뽑으려 드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팬틱은 오히려 베가 레이서N의 출고량을 줄였던데.”
“아하, 그게 궁금하셨군요.”
그는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집어넣는다. 그리곤 새 손수건을 꺼내며 이야길 계속했다.
“제2공장에서 작은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산량이 30% 정도가 줄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방안을 찾아야죠. 가만히 손놓고 있습니까?”
“예?”
“공장에 불이 났으면, 다른 공장을 알아보든, 기존 공장에 설비를 더 놓든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혹시 팬틱은 설비를 증설할 생각은 없습니까?”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당장은 베가 레이서N이 잘 팔리고 있지만 설비를 증설했다가 판매량이 뚝 끊기면 답이 없습니다. 게다가 팬틱은 워크아웃 상태라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설비에 투자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변명이다.
닉스OS가 망하면 팬틱도 같이 망한다. 안드로이드OS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속내를 숨기고 이야길 이어나갔다.
“제가 알기론 팬틱에 투자 의향을 내비친 벤처캐피털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송태석 사장은 꿀단지를 숨겨 먹다가 들킨 표정을 짓는다. 난 기세를 몰아 그를 궁지로 밀어 넣는다.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그게 아니면 닉스가 회사채를 매입하거나, 다른 우회적인 방식으로 지원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건 송 사장님의 의지죠.”
턱을 쓱쓱 쓰다듬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는다.
마치, 뱀 앞에 선 쥐새끼처럼 굳어버린 송 사장의 모습에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송 사장님. 소문에 의하면, 최근에 오성전자 측과 송 사장님의 교류가 잦다고 들었습니다.”
“어, 어디서 그런 말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만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해입니다. 동창들이 있어서 사적으론 만난 적 있지만…….”
“더 이상한데요. 사적으로 만나시는 분이, 그리 조심스럽게 움직였단 말입니까?”
입을 꾹 다문 송태석 사장.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해보려는 거 같지만 이미 얼굴은 흙빛이 된 뒤다.
“송 사장님. 혹시 해서 묻는 겁니다. 오성에서 베가 레이서N의 출고량을 줄여 달라고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