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39화
반년 만에 방문한 닉스 연구소.
본디 빡빡하기로 소문났던 보안 시스템이 그사이에 한층 더 업그레이드돼 있었다.
1차로, 모든 출입자는 지정된 연구복으로 갈아입게 돼 있다.
반도체 제조공장에 쓰이는 방진복급은 아니었지만 여기서부터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2차로는 금속 탐지기다. 정상적으로 환복 절차를 마쳤다면 2차 보안은 쓱 지나가는 거로 끝날 수 있었지만, 출구로 가는 길을 일부러 길을 배배 꼬아뒀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처하기 위함이라나 어쨌다나.
마지막으론 생체 인증이 남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구소 내부는 지정된 사람 말곤 입장조차 불가능하다.
지문을 먼저 찍고 이어지는 홍채인증까지 마친 뒤에야 연구소 출입로가 개방된다.
이 모든 것이 연구소장과 대표이사가 출입을 위해 거쳐야 했던 절차다.
“예전보다 들어가는 게 더 힘들어진 거 같습니다.”
내 말에 무자파는 괜찮다는 듯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절차를 거치겠지? 이래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건가.
연구소 입구부터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그건 겹겹이 쌓여있는 서류 더미들이었다. PC가 보급된 이래,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뭔 서류가 이리 많습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네요.”
“연구소 인터넷 안 된다. 필요한 자료 로비에 연락하면 전부 인쇄해서 보내준다. 그리고 메일을 못 쓰니까 팩스 쓴다.”
지금의 닉스 시큐리티 팀이 지독하다는 말이 많던데, 이래서 그런 소문이 퍼졌구나 싶다.
무자파를 따라서 연구소 모퉁이를 세 번 정도 돌자, 중앙 연구실이 나타났다. 이곳에선 닉스 연구소의 메인인 리튬에어배터리 연구가 한창이었다.
“제가 왜 온 줄은 아시죠?”
“스마트폰에 들어갈 배터리.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냐?”
“맞습니다.”
고갤 끄덕인 무자파는 PC를 조작해서 지금까지의 배터리 연구결과를 불러왔다. 그는 모니터가 잘 보이도록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려준다.
“연구 성과가 있던 분야는 배터리 집적화다.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3.2배 정도였던 집적도가 40% 향상됐다.”
“40%면 4.5배쯤 되겠네요.”
“그렇다. 기존 1680mAh 리튬 이온 배터리를 리튬 에어 배터리로 대체하면 7560mAh의 용량을 확보할 수 있다.”
참고로 무자파가 말한 용량, 1680mAh 배터리를 탑재한 스마트폰은 올해 팬틱이 출시한 베가 레이서다.
안드로이드용 베가 레이서는 게임을 돌리면 분당 배터리가 1%씩 줄어든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배터리 이슈가 심각했다.
“7560mAh면 아주 좋군요. 거의 노트북급인데요?”
“문제는 재충전효율이 답보 상태다.”
모니터에 떠오른 결과지를 자세히 훑는다.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가 뒤얽혀 있었으나, 이쪽 방면에는 얕은 지식이 있었기에 필요한 데이터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낸 최고 효율은 99.3%다.
아직 리튬 이온 배터리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이쯤이면 충분했다. 100회 이상 충전해도 초기 용량 대비 5할선에서 머물 테니까.
이쯤이면 애플폰도 깨갱 하는 수준이겠는데?
하지만 무자파가 분위기에 찬물을 들이붓는다.
“최고 효율은 백금을 썼을 때다. 포터블 기기용 배터리 1개당 백금이 1.8온스 들어간다.”
“이런.”
백금은 1온스 당 1000달러가 넘는 초고가 금속이다. 기기 당 1.8온스가 필요하다면 어림잡아 계산해도 1,800달러 아닌가.
“제조단가 계산해봤습니까?”
“백금 배터리 재료비만 2,300달러. 마진까지 붙이면 개당 4,000달러는 받고 팔아야 남는다.”
“배터리 하나 살 돈이면 신형 애플폰 5대를 사고도 팁까지 줄 수 있겠네요.”
“이건 기술 과시용. 판매용 제품 아니다. 진짜는 이거다.”
무자파가 PC를 조작한다.
기존에 있던 결과지가 옆으로 밀리고 그래프의 경사가 심한 결과지가 새로 등장한다.
“이건 새로 개량한 산화철을 넣어서 만든 배터리다. 단가는 개당 70달러.”
배터리 제조단가가 70달러면 싼값은 아니다.
그러나 방금 4,000달러짜리 배터리 설명을 듣고 난 뒤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설마, 무자파가 이걸 노린 건가.
내 시선을 받은 무자파가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이번 건 충전효율이 어떻습니까?”
“아직 99%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턱 밑까지는 쫓아왔다. 최종 98.9%로 재충전 60회까지는 초기용량대비 5할을 유지한다.”
“60회론 턱도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매일 같이 충전해댈 텐데, 60일 만에 절반이 되는 놈을 팔라고요?”
무자파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60회는 완전 방전시키고 재충전했을 때 60회다. 절반 쓰고 절반 충전하면 100번도 넘게 버틴다. 그리고 배터리 탈착식으로 팔면 모든 게 해결된다. 방전되면 교체하고, 방전되면 또 교체하고. 그렇게 파는 거 대니얼 아이디어다.”
“전기차는 그렇게 했지만, 스마트폰은 안 됩니다.”
무자파의 의문이 깊어질수록 그의 미간 주름도 더 깊어진다.
“닉스폰은 배터리 탈착식으로 안 만듭니다. 무조건 배터리 내장형으로 만들 겁니다.”
“내장형으로 만들면 이점이 무엇?”
“재질의 선택폭이 넓어지죠. 바디에 알루미늄이나 스탠, 글래스도 쓸 수 있습니다. 무리하면 티타늄까지도 가능하고요. 반대로 탈착식을 쓰면 시중의 스마트폰들처럼 플라스틱을 가공하는 방법이 한계죠.”
“디자인 때문에 기능을 포기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자파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토해낸다.
“이해 불가다. 우리의 어드밴티지는 배터리. 그걸 포기할 정도로 디자인이 중요한가?”
“무자파. 상품에서 디자인은 예선전 같은 겁니다.”
“예선?”
“예, 디자인이라는 예선에서 통과하지 못한 상품은 기능을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은 이해한 눈치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한 그대로였다.
디자인을 위해서 기능을 포기한다는 일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라는 건 인정한다. 특히 무자파 같은 공학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난 백금 배터리 결과지와 산화철 배터리 결과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번은 닉스에서 내는 첫 스마트폰이다.
첫인상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심지 못하면, 후속작을 완성도 있게 내더라도 승산은 없다. 그걸 위해선 바디에 플라스틱 재질을 적용하는 것만은 절대 피해야만 해.
두 가지 안건이 모두 반려되자, 무자파는 팔짱을 끼고선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좋은 반응이 안 나오자 삐친 모양이다.
난 그에게 준비해왔던 메모지를 들어 보인다.
“무자파, 이거 한 번 보실래요? 제가 재미난 걸 준비해왔거든요.”
“그것 무엇?”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 * *
닉스 소프트 소회의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닉스 직원이 아니라 KG전자 설계팀이었다.
그들은 닉스폰의 설계 문제를 의논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아직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자리에선 시시콜콜한 잡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송 과장님, 이 빌딩 전체를 닉스가 임대했다던데. 닉스가 컸다는 말만 들었지, 이 정도로 컸을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닉스 시가총액이 KG그룹을 앞지른 지가 언젠데.”
“그게 진짭니까?”
송 과장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김 대리를 쳐다본다.
“당연하지. 보자, 오늘 닉스 종가가 97.6달러니까 여기에 대략 10억 주를 곱하면…… 976억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100조가 넘어.”
100조라는 소리에 놀란 김 대리는 탄산음료를 먹다가 사레에 들려서 캑캑거린다.
“작년에 상장했을 때 30달러 선 아니었습니까? 그때 딱 2달러 먹고 팔았던 기억이 있는데, 언제 이렇게나 올랐답니까?”
“손대는 것마다 돈을 버니까 주가가 안 뛰고 있겠어? 이번에 닉스OS 만든 것도 봐. 난다긴다하는 구글이 만든 안드로이드보다도 잘 뽑았잖아.”
“그건 그렇죠. 속도도 속도지만 배터리 타임이 체감상 2배는 되는 거 같더라고요.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중고시장에서는 단종된 옵티무스2N 값이 기존 옵티무스2X 2배라더라, 2배. 평가도 극과 극이야.”
“저도 봤습니다. 안드로이드 판은 똥이고 닉스 판은 갓이라던가? 이럴 거면 차라리 구글에 줄을 댈 게 아니라 닉스 쪽에 줄을 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때, 김 대리 뒤통수에 서류 판이 날아든다.
“컥!”
침묵을 지키던 왕정현 부장이었다.
“이놈아, 네가 왈가왈부 떠들 일이 아니다. 경영진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송 과장은 얼른 흐름을 타고 거들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닉스OS를 고수하는 건 단기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자칫 닉스가 OS사업을 포기해버리면 그땐 진퇴양난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여긴 우리 회의실이 아니라 닉스 회의실 아니냐. 여기서 헛소리해대다가 이쪽 직원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
김 대리가 고갤 푹 숙인다.
“주의하겠습니다.”
“송 과장, 너도 잡담할 시간 있으면 서류나 잘 가져왔는지 다시 확인해봐. 오늘 일정은 디자이너와 면담이지만 그 디자이너가 회사의 CEO니까.”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분 후.
그들이 기다리던 주인공이 나타난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사내가 벌떡 일어서 인사를 해온다.
“안녕하십니까. KG전자 스마트폰사업부 왕정현 부장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강현웁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습관적으로 앞에 놓인 커피를 입에 가져 댄다.
커피 맛이 묽은 맹탕이다. 자세히 보니 얼음이 다 녹아서 층을 만들고 있었다.
“제가 좀 늦게 왔나 보군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난 인터폰으로 새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납기가 촉박한 건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라고…….”
“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력은 해보겠지만 솔직히 무리라고 봅니다.”
난 준비해온 서류를 꺼냈다. 그곳엔 닉스폰의 외부 랜더링 이미지와 함께, 간략한 내부 설계도 있었다.
“와!”
감탄사를 터뜨렸던 직원 한 명이 급히 입을 막는다.
“어떻습니까, 왕 부장님?”
“좋습니다. 역시 대니얼 디자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군요. 그런데 랜더링상으로만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재가 일반적인 건 아닌 거 같네요.”
난 서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말을 계속한다.
“후면에 필름을 넣고 강화유리를 넣는 스타일입니다.”
“앗, 그러면 배터리 일체형으로 제작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왕정현 부장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시기의 스마트폰은 화면을 켜두면 배터리가 4시간을 채 못 버티고 꺼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때문에 한국에선 일체형 배터리가 금기로 여겨질 정도였다.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간다.
“테두리는 알루미늄 소재를 택했습니다. KG에서도 피처폰 시절에 써보셨으니 생산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크롬 도금을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제가 크롬 도금을 싫어해서요. 단가는 저렴하지만 나중엔 다 벗겨져서 흉해지잖습니까.”
그 부분은 왕정현 부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시선을 다시 서류로 보낸다.
“홈 버튼은 코팅 세라믹을 쓰셨군요. 이거 가공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특수 재료는 닉스에서 공수할 테니 설계할 때 공간만 잘 비워두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액정은 KG디스플레이에서 개발한 4.7인치 LCD에, 램 2GB……. 저기, 강현우 대표님. 주제넘은 말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런 타입이면 생산 일정이 미뤄지는 건 둘째치고, 제조단가가 엄청나게 뛸 거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만큼 출고가를 높게 책정하면 되니까요.”
태평스러운 말에 왕정현 부장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KG는 어차피 생산만 담당하는 처지니 닉스폰이 흥하든 망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내부 설계 부분에서 뭔가 발견한 그가 날 쳐다본다.
“강현우 대표님.”
“말씀하시죠.”
“여기……. 보여주신 부분 중 배터리 슬롯 부분 말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배터리 슬롯을 2개나 표시해두셨는데요.”
“그런데요?”
내 뚱한 반응에, 왕정현 부장이 오히려 당황한 눈치다. 아마 내가 화들짝 놀라서 수정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상단과 하단 슬롯 중 어디가 진짜 배터리 슬롯입니까? 한 곳은 잘 못 표기하신 거 같은데요.”
“둘 다요.”
“예?”
눈을 껌뻑거리는 왕정현 부장. 난 배터리 슬롯 두 개를 진하게 표시해주며 말했다.
“왕 부장님, 닉스폰은 배터리가 2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