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28화
“어렵다. 정말 어려운 사람이야.”
마화텅이 중얼거린 말은 방금 대표실을 떠난 사내. 닉스의 CEO인 대니얼 강에 대한 평가였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들려오는 소문들.
그러니까 실리콘밸리의 메시아, IT업계의 신성 따위로 불리는 그의 위명은 모두 과장됐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젊은 나이에 위명을 얻은 자들은 하나같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벼락부자가 된, 운 좋은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금 만나봤던 닉스 CEO는 달랐다.
오죽했으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까.
‘내가 아들뻘의 젊은이에게 밀린 건가? 아니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이건 마치…… 내게 없는 특별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게 뭔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애를 태워댄다.
마치, 형체 없는 연기를 손에 쥐려 뛰어다니는 꼬맹이가 된 기분이 들 정도다.
마화텅은 답답한 나머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든다.
그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기에 실내에서는 담배를 태운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오른다.
폐부 깊숙이 담배를 빨아들이자, 대화 중 한 부분이 머릿속에서 플래시백 된다.
‘닉스 챗은 물론이고 닉스 서클, 닉스 페이까지의 소프트웨어를 텐센트에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나열했던 것들은 하나같이 닉스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서비스다.
닉스의 CEO는 그런 알짜배기 소프트웨어를 경쟁사나 다름없는 텐센트에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다.
이런 걸 젊은 피의 만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가 내비친 건 자신감이다.
텐센트에 모든 서비스를 내줘도 닉스는 끄떡없다는, 그런 압도적인 자신감 말이다.
‘닉스 서비스를 텐센트라는 포장지를 씌워 중국에 밀어 넣고 그 하위 서비스로 승부를 볼 생각이겠군. 예를 들자면 닉스 제로 같은 서비스로 말이지.’
여타 해외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중국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닉스는 그들과는 반대로 최대한 조용히 중국에 자리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왜 눈에 띄지 않게 들어오려는 걸까?
마화텅은 이번 의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당국의 눈치를 보는 건가?’
요즘 들어 당국에서 내려오는 지침이 더 깐깐해진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해외업체들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철수를 고민하는 곳도 많았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작년 말 구글이 검열을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한 달가량을 검색 서비스를 금지당했던 일도 있었다.
‘만약 닉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움직인 거라면…….’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처음엔 젊은 혈기로 달려드는 애송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방금 했던 가정이 맞는다면 그는 그 어떤 전문가들보다 냉정하게 중국 시장을 꿰뚫어 봤다는 것 아니겠는가?
“앗 뜨거! 씁…….”
생각에 빠진 나머지 쥐고 있던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창가로 걸어갔다.
저 멀리엔 한창 터를 다지고 있는 텐센트의 신사옥 부지가 보인다.
그곳은 본디 홍콩과 무역으로 성장했던 종합상사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당국의 방침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종합상사는 하루아침에 도산해 버렸다.
“영원한 건 없어. 현실에 안주하면 서서히 말라죽을 뿐이다.”
마화텅의 눈이 착 가라앉는다.
눈앞에 반사된 유리에는 두 업체가 동시에 겹쳐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구형 엔진을 억지로 밀어 넣는 네스퍼였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모든 걸 오픈한 닉스였다.
어느 곳과 손을 잡아야 할지는 명약관화한 상황. 문제는 네스퍼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거였다.
그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던 그는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비서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네스퍼의 아론 회장과 약속 잡아.”
“장소는 어디로 정할까요?”
“내가 직접 네스퍼 본사로 간다.”
* * *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선 상가와 호객꾼들.
시장터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지만, 여타 시장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상가는 물론이고 가판대마저 파는 물건이 범상치 않다. 그곳엔 평범한 가전부터 시작해서 포터블 기기, 게임기, PC부품, 기업용 기판이나 IC칩들이 늘어져 있었다.
“선전의 전자상가가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내 말을 뒤따라 걷던 샤오후가 받는다.
“요 몇 년간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판매가 더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게 일부라는 소린가요?”
“그렇습니다. 알리바바와 같은 오픈마켓에서 영업 중인 업체들 대다수가 선전에 소재지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구역만 안으로 더 들어가면 온라인 전문 상가들이 밀집한 구역이 나옵니다.”
이미 전자상가를 한 시간이나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규모인데, 이게 상가 일부분이라니.
“그건 그렇고, 호텔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한 시간은 넘게 걸은 거 같은데요.”
“호텔은 상가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대략 한 시간 정도 더 걸으면 되겠군요.”
“한 시간이나요?”
“그것도 짧게 잡은 겁니다.”
상가라는 말에 한국의 용산전자상가 정도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고?
상식적으로 전자상가 하나 가로지르는 데 두 시간이나 걸릴 거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래, 인정한다. 내가 대륙의 스케일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했다.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이동하시겠습니까? 대로변으로 가는 길은 10분 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이왕 온 거, 천천히 쉬면서 돌아보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호텔로 가는 걸 뒤로 밀어두고 유람하듯 전자상가를 돌아다녔다.
선전에는 전 세계의 모든 전자기기가 모였다 팔려 나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가판대에는 평소 IT덕후라고 자처하던 나도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와, 90년대에 나온 CDP가 아직 있네. 엥? 저건 삐삐잖아?”
정신없이 시장을 돌아보던 중, 내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물건이 있었다.
그건 학창 시절 즐겨 쓰던 소니의 워크맨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저 때만 해도 워크맨은 문화 충격 급의 신문물이었다.
저거 사달라고 누나한테 떼를 엄청나게 써댔었지. 지금 생각하면 참, 나도 철이 없긴 없었다.
난 워크맨을 집어 들고 어설픈 중국어를 꺼내 든다.
“이건 얼맙니까?”
“500위안.”
500위안이면 한화로 대략 8만 원이다.
돈이야 못 쓸 정도로 넘친다만 어째선지 가판대에서는 가격을 깎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밀려온다.
“깎아주세요.”
“450위안. 그 이하는 안 된다.”
“250위안으로 합시다.”
“오케이. 250위안에 팔지.”
엥? 가격을 절반이나 깎았음에도 손해본 듯한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나 혹시 호갱당한 거야?
난 정답을 듣기 위해 샤오후를 돌아봤지만, 그는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워크맨을 시작으로 유물을 파내듯 전자상가를 돌아다녔다.
주로 사들인 물건은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휴대용 게임보이나, 슈퍼 패미컴, 아이리버 MP3 따위의 골동품이었다.
한참이나 쇼핑을 하고 호텔에 돌아오자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전자상가에 들렀을 때가 점심때 즈음이었으니 대략 6시간은 걸어 다닌 셈이다.
파김치가 돼 소파에 널브러진 내게 샤오후가 다가온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샤오후는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리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사흘째 관광만 다니시는 모습이 좀 이상해서 여쭙습니다. 평소 대표님이 이렇게 쉬는 걸 못 본 터라…….”
경호원이 쉬는 걸 이상하게 볼 정도라니. 나도 참, 인생이 빡빡한 놈인가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진짜 제대로 된 휴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떡밥을 열심히 뿌려뒀으니 기다리는 겁니다. 물고기가 입질할지 말지는 하늘에 달렸다고나 할까요.”
“물고기라면 첫날 방문했던 텐센트를 뜻하시는 거군요.”
“그런 셈이죠.”
본디 내 계획은 단순하게 텐센트 지분 51%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쉽게 가려던 내 계획은 텐센트의 기형적인 지분 비율 덕분에 어그러져 버렸다.
현재 텐센트의 1대 주주는 43%를 쥔 네스퍼고, 2대 주주는 11%를 가진 CEO 마화텅이다.
이 둘만 합쳐도 과반을 가뿐히 넘기는 54%의 비율이 돼버렸기에 닉스가 돈을 때려 부어도 텐센트 경영권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닉스가 텐센트를 통해서 중국에 우회 진출을 하려면 CEO인 마화텅을 포섭하거나, 1대 주주인 네스퍼의 지분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텐센트에서 연락이 안 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요. 다른 업체를 찾아야죠. 포털의 바이두나 오픈마켓 1위인 아리바바 정도가 후보군이겠네요.”
샤오후 역시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갤 끄덕인다.
“아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전부터 닉스 챗에 우호적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봤자 플랜B일 뿐, 최선이 텐센트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가진 6억 명의 QQ메신저 사용자 데이터는 다른 업체를 압도하고도 남으니까요.”
난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뻑 내쉰다.
“어휴, 애플만 아니었어도 급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천천히 중국 시장을 장악했을 텐데.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네요.”
“일전에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공안 당국이 해외 IT기업 진입을 막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는 건 닉스가 단독으로 중국 시장을 장악해도 의미가 없는 게 아닌지요.”
“당연히 그전에 텐센트와 협상을 봐야죠. 서로 경쟁 상태일 때 손을 내미는 것과 승부가 난 뒤에 손을 내미는 건 명분과 실리적인 면 모두 천지 차이니까요.”
“승부가 난다면 승자는 닉스 챗이 되는 겁니까?”
“글쎄요. 예전이었다면 애플폰에 선탑재까지 된 닉스 챗이 무조건 우위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네요.”
모바일 메신저 시장은 애플이라는 변수가 너무 크다.
그들이 자체 메신저를 달고 나와, 닉스 챗을 견제하고 든다면 승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알 수 없게 된다.
“아 참. 애플 쪽은 어떤가요?”
“SPI에서 중간보고가 들어왔었습니다.”
“호오, 뭐 좀 알아낸 거 있습니까?”
“우선 애플 메신저 개발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프로젝트가 비대한 탓에 업계에선 공공연한 비밀 수준으로 정보가 돌아다니더군요. 이미 진척도도 9할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닉스와 애플의 정면 대결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그런데 정보를 캐는 도중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잡스가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혀 몇 일째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잡스가 누구와 접촉했는지를 알아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잡스는 대체 뭘 만들고 있기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거지? 가만 생각해보면 그의 최근 행보는 의문투성이다.
먼저, 나와의 만남을 피하고 번호까지 바꾼 그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잡스라면 이런 일을 꾸미고도 태연하게 나를 맞았을 것이다.
아니지, 자존심 덩어리인 잡스의 성격상, 오히려 애플 메신저를 내게 가져와 자랑하며 선전포고하지 않았을까? “어때, 대니얼. 이쯤이면 우리가 만든 게 더 어썸 하지?” 같은 농담을 던지며 말이다.
게다가 애플 내부 인사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내가 알기론 애플의 CMO인 제프 베이커는 이사회 쪽 사람이다.
당연히 이사회와는 앙숙인 잡스가 제프의 복직을 탐탁잖게 생각했을 텐데, 어떻게 그가 본사로 돌아올 수 있던 걸까?
잡스와 이사회 사이에 뭔가 딜이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째선지 나쁜 가정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라고 애써 부정하면서도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의문을 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