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15화
닉스가 독자적인 온라인 쇼핑몰 개발에 착수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미국 증시는 다시 희비가 엇갈렸다.
무리한 M&A 시도로 약세를 보이던 닉스A 주가는 순식간에 파란불이 켜졌고, 반대로 끝을 모르고 치솟던 아마존 주가는 한여름의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마존의 주가가 패닉에 빠졌음에도 월가의 유명 애널리스트들은 지금이 아마존을 매입할 절호의 기회라고 떠들어댔다.
물론 입만 그렇게 떠들어댔지 실제로는 자사가 보유한 아마존 주식을 막무가내로 밀어내기 바빴다.
이번 일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월가의 공룡 중,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던 버크셔 헤서웨이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마존 주가를 띄워서 닉스에 팔아치울 생각이었기에 비공식적인 루트로 엄청난 양의 주식을 쌓아둔 상태였다.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헤지스 호텔의 소회의실.
중앙 좌석에 앉은 버핏 회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뺨이 주기적으로 움찔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이 열린다.
“메이슨.”
“예, 회장님.”
“닉스 측과 언제 만나기로 약속했지?”
“그러니까…… 3시 30분입니다.”
버핏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시간은 3시 45분. 이미 약속 시각은 15분이나 지났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지만 그의 오랜 경험과 연륜은 어떻게 해야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목구멍으로 콜라까지 밀어 넣은 후 말했다.
“다시 한번 연락해 보게.”
“알겠습니다.”
파인즈가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한참이나 신호음이 흐르고 간신히 연결된 전화에선 청초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럼.”
통화를 끝낸 파인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회장님, 도로가 꽉 막혀서 늦어진다고 합니다.”
“나와 식사 한번 하겠다고 수억을 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고작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변명이다.
‘필시 나를 초조하게 만들어 휘둘러보겠다는 심산이겠지? 그래 봤자 난 눈 하나 깜짝 안 해. 닉스에서 아마존 인수에 들인 공이 얼만데 인제 와서 포기하는 건 100% 블러핑이야.’
버핏의 눈치를 보던 파인즈가 슬쩍 물어온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이제는 우리가 아쉬운 쪽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버크셔 헤서웨이의 두 사람이 초조하게 기다리길 십여 분이 더 흐른 뒤, 드디어 소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버핏 회장은 벌떡 일어서다가 의아한 표정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을 열고 도착한 것은 닉스의 CEO가 아닌 젊은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반갑습니다, 버핏 회장님, 메이슨 파인즈 씨. 저는 닉스의 재무를 담당하는 엘런 페이지입니다.”
“대니얼 강은 어디를 가고 왜 아가씨 혼자서 온 겐가?”
“대표님은 업무차 한국에 가셨습니다. 그런고로 이번 일은 제가 대신해서 담당하게 됐습니다.”
“담당하게 됐다면 아가씨가 닉스의 CFO라는 소리겠군.”
“방금 말씀드렸지만 저는 최고 재무 관리자가 아니라 재무 관리인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유한 표정을 유지하던 버핏이었지만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느껴졌다.
“일개 재무 관리인이 수십, 수백억이 걸린 일을 담당한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옆에 있던 파인즈가 슬쩍 끼어든다.
“회장님, 그녀가 닉스의 CFO는 아니지만, 닉스의 IPO를 총괄한 담당자입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턱을 쓱쓱 쓰다듬던 버핏이 자세를 앞으로 당긴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물론이지요.”
“자네가 아마존 인수에 가진 권한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게.”
엘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답했다.
“대표님은 이번 건에 관한 전권을 제게 일임하고 한국으로 떠나셨습니다.”
“그 말은 자네의 결정에 따라 닉스의 아마존 인수가 재개될 수도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버핏 회장은 턱짓으로 파인즈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는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뭉치 하나를 꺼내서 올려놓는다.
“닉스의 재무 관리인이라고 했던가?”
“그냥 페이지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좋네, 페이지. 그 서류를 한 번 읽어 보게나.”
책상에 올라온 제본된 서류는 척 보기에도 100쪽은 넘어 보였다.
“무슨 서류입니까?”
“닉스가 아마존을 인수했을 때를 예상한 보고서네. 버크셔 헤서웨이의 투자 전문가들이 만들었으니 신뢰도는 업계 최고라고 자부하지. 아 참. 앞에는 요약본도 있으니까 일단은 그것만 읽어 보라고.”
“알겠습니다.”
엘런은 서류를 들춰 빠르게 읽어 나갔다.
보고서 형식의 서류에는 닉스가 아마존을 인수했을 때와 포기했을 때의 시가 총액 변화부터 시작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분야, 그 산업의 포괄적인 흐름까지 담겨있었다.
서류를 훑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10쪽 가량의 요약본을 다 들춰보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글을 굉장히 빨리 읽는 재주를 가졌구먼.”
“알고 있던 내용이라 빨리 읽힌 것뿐입니다.”
“알고 있었다?”
버핏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 버크셔 헤서웨이의 투자팀이다.
그런 보고서를 어떻게 닉스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알고 있단 말인가?
“닉스에 투자 전담팀이 있었던가?”
“아닙니다. 이 내용을 예상한 건 저희 대표님입니다.”
“대니얼 강이? 그는 디자이너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표면적으론 그렇지만 그분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계시죠. 그래서 이번 아마존 인수 건도 무리인 줄 알면서도 다섯 걸음 앞을 내다보고 진행하신 거고요.”
버핏은 헛소리라 생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마주 앉은 여인과는 협상을 이어 가야 했으니 말이다.
“닉스에서 어떻게 판단했든 간에 이번 일은 버크셔 헤서웨이의 회장으로서 심히 유감일세. 닉스가 리스크를 피하고자 미래의 큰 이득을 놓치는 형태가 됐으니 말이야.”
“버크셔 헤서웨이에서 수를 쓰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무난하게 성공했을 겁니다.”
“그 말은 우리가 고의로 닉스에 해를 끼친 것처럼 들리는 데. 내 착각이겠지?”
“해를 끼친 게 맞죠. 회장님은 선의의 도움을 나쁜 쪽으로 이용했으니까요. 아마존 주식을 몰래 매입하고 펌프질시킨 걸 저희가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까?”
“허허, 이것 참.”
웃던 버핏은 미소를 싹 지우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도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여인이 자신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해온다.
‘기개는 내 아랫것들보다 낫군. 고놈들이었다면 바로 꼬랑지를 내렸을 테니까.’
버핏은 굳은 표정을 풀고선 말했다.
“자네, 엘런 페이지라고 했던가?”
“예.”
“내 밑으로 오지 않겠나? 버크셔 헤서웨이의 선임 투자자 자리를 약속하지.”
대답은 칼 같이 나왔다.
“고민의 가치가 없는 제안이군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는 예상했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을 잇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서로 알고 있으니 까놓고 이야기함세. 우리가 가진 아마존 지분 10%를 주당 240달러에 넘기겠네.”
“아마존 주가는 계속 내림세를 유지할 텐데, 그걸 240달러나 주고 인수하라는 겁니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지.”
다시 안경을 낀 버핏은 상체를 등받이에 젖히고 말을 계속한다.
“이번 폭락의 원인은 닉스의 아마존 인수 포기에 있어. 그러니 닉스에서 다시 인수를 재개한다는 뉴스가 나면 주가는 즉각 반등하겠지.”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내가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라고 했지?”
버핏이 가방에서 새로운 서류를 빼 들자, 엘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따른다.
“이건 아마존 지분 10%의 대금인 96억 달러를 전액 닉스의 회사채로 받겠다는 서류야.”
“50%가 아니라 전액을요?”
“그래 절반이 아닌, 전액일세. 이거면 인수 자금이 부족한 닉스에겐 좋은 조건 아니겠나.”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엘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버핏 회장은 참았던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혼자서 결정하기 힘들면 결정권자와 상의라도 하고 오지 그러나.”
“아닙니다. 저는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당찬 아가씨구먼.”
버핏 회장은 무표정으로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러댔다.
‘지분을 10%나 취득하면 이젠 무를 수도 없을 게다.’
닉스가 아마존 주식을 다시 취득하면 폭락하던 주가는 반등한다.
10%를 팔고도 9.5%의 지분이 남은 버크셔 헤서웨이는 두 업체의 경영권 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 팔아넘길 생각이었다.
그땐 채권이 아니라 닉스의 지분을 토해야겠지만 말이다.
“조건은 아주 좋네요.”
엘런이 처음으로 싱긋 웃어주자, 버크셔 헤서웨이의 두 사람 얼굴이 활짝 핀다.
닉스로선 안 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성공을 확신한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다.
“자, 그럼.”
엘런은 넘겨받은 서류를 탁탁 털어서 책상 위에 올려둔다. 그리곤 감정 없이 설명서를 읽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닉스의 재무 관리인이자,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써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대리인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버핏 회장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 옆의 파인즈는 흠칫 놀란다.
그녀는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곤 웃으며 말을 잇는다.
“닉스는 버크셔 헤서웨이의 제안을 보류하겠습니다.”
* * *
“진짜 보류라고 말했어요? 진짜?”
전화기 너머에서 엘런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넘어온다.
-아, 정말이지. 그때 버핏 회장의 화난 표정을 사진이라도 찍어 뒀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아까운 거 있죠.
“그러다 버핏 회장이 앙심이라도 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말은 얄밉게 했지만, 실제로는 버크셔 헤서웨이에 빠져나갈 구멍을 준 거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닉스의 ‘잠정적 보류’라는 결정 때문에 급락하던 주가는 200달러 선에서 진정세를 보였다.
만약 거절이라는 소식이 뉴스를 탔다면 주가는 200달러 선이 무너지고, 지하실 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혹시 버핏 회장 쪽에서 다른 움직임은 없던가요?”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있겠어요? 지금쯤 버크셔 헤서웨이에선 뒤로 사들인 주식을 내다 파느라 정신이 없을걸요.
“혹시 다른 특이한 움직임이 보이면 연락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툭.
“휴.”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사실, 난 버핏 회장의 만남 요청을 거부하려 했다. 그들이 행한 수작질을 생각하면 괘씸해서라도 꼭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엘런은 버핏 회장에게 아량을 베풀었다.
손실을 일부분 만회할 수 있을 시간을 가져다 줄 잠정적 보류라는 카드로 말이다.
“보류라니, 참나.”
냉정하게 따지면 실리적인 결정이다.
버크셔 헤서웨이는 이번 사건으로 명성이 추락할망정, 그들의 가진 힘은 멀쩡할 테니 말이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확실히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투자사 출신이 내릴 만한 판단이네.”
전화를 집어넣고 휘적휘적 복도를 가로지른다.
그 끝에는 [사장실]이라고 적힌 방이 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신용화가 날 쳐다본다.
“어, 어? 어!”
“그 반응은 뭡니까?”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온다. 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놈이 싹수없기는 세계 제일이야.”
“누구한테 배운 거 아닙니까.”
신용화가 킬킬대며 웃는다.
이건 닉스에 그가 처음 왔을 때 했던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침 잘 왔다. 네게 상의할 게 있었는데.”
“또 새로운 사업을 생각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너희 누님과 닉스 부사장이 직접 찾아 왔었거든.”
누나와 매형? 내가 반응을 보이자 녀석은 좋다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카페 닉스가 한국에서 자리 잡는 거. SG그룹에서 밀어주기로 했다.”
밀어주면서 한 숟가락 얹을 셈이겠지.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녀석은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통신사에서 밀어주면 자리는 빨리 잡겠네요.”
“그 대신 나도 하나 먹으려고.”
그럼 그렇지.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죠?”
내가 게슴츠레 쳐다보자 신용화는 손을 휘휘 내젓는다.
“인마, 귀신을 앞에 두고 내가 헛짓거리를 하겠어?”
“제가 귀신입니까?”
“어, 그것도 돈에 환장한 귀신. 너한테 켕기는 짓을 하면 그날 밤 꿈에 네가 나오더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뭘 먹으려는 지 말해봐요.”
신용화는 대표실 귀퉁이에 있던 화이트보드를 끌고 온다.
그곳엔 카페 닉스 일본진출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일본에 들어가려고요?”
“그래.”
“한국 반응을 보고 가는 게 낫지 않나요. 거하게 말아 잡수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는 대뜸 다른 말을 꺼낸다.
“트와일라잇이 일본 포털 시장 과반 먹은 건 알아?”
“벌써 과반이나 먹었습니까?”
“먹은 지 꽤 됐어. 석 달쯤? 아무튼, 포털과 메신저를 먹었으니 프로모션 땡기면 자리 잡는 건 금방이야. 거기다 닉스 비콘인가 하는 거. 그거 아주 대박이더라. 일본 애들한테 딱 맞는 서비스던데.”
확실히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은 일본이라면 미국보다 더 효과가 클 것이다.
거기다 카페 닉스가 밀고 있는 닉스 마스코트는 일본에서 먹힐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사업권이라면 드릴 수 있습니다.”
“역시 쿨한 싸나이 강현우. 그럴 줄 알았어. 내 사랑하는 동생을 맡길만한 사내지.”
“아무리 아부해도 공짜로는 못 드립니다.”
신용화가 좋다 말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린다.
“쳇. 미리 말해두지만, 그룹 내에 돈이 씨가 말랐어. 먹고 죽을 돈도 없다. 얀마 그렇게 쳐다보지 마. 진짜야!”
돈놀이나 다름없는 통신사에 돈이 없으면 한국의 어떤 기업에 돈이 있겠는가? 아무튼, 저놈의 엄살은. 쯧쯧.
“돈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
난 대답 대신 신용화가 끌고 온 화이트보드 귀퉁이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10st]
그건 SG플래닛에서 서비스 중인 인터넷 쇼핑몰 10번가를 뜻했다.
“너, 이거…… 진짜 할 셈이었어? 주가 때문에 쇼한 거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