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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IT재벌-110화 (110/206)

기적의 IT 재벌 110화

“음…… 오성이 싫으니까 꼭 같이 가야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의문이 실린 시선이 내게 돌아온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가 전기 차 부품 발주를 안 한다고 해서 오성이 흔들릴 회사입니까?”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대답이 바로 튀어나온다.

“당연히 아니지. 오성은 전자 부문에서 세계 탑티어야. 그런 회사가 전기 차 부품 하나 공급 못 한다고 꿈쩍이나 하겠어? 굳이 따지자면 전기 차 기술에서 뒤처지는 게 아쉬운 정도긴 하겠다.”

“그죠?”

“알면서 뭘 물어봐.”

매형은 진짜를 빨리 내놓으라는 듯 눈으로 재촉해댄다.

“반대로 우리가 계속 발주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다른 분야를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을 계속 발주해 넣으면요.”

“우리가 물량을 얼마나 밀어 넣든, 걔들은 다 쳐내고도 남을 놈들이야. 오성은 양산 부분에선 괴물이거든. 앗, 너 혹시. 오성에 발주 넣었다가 물량 끊으려는 거 아니지?”

내 입꼬리가 미묘하게 말려 올라가자. 매형이 고개를 흔들어댄다.

“현우야, 이번 전기 차 부품은 파나소닉 때와는 달라. 배터리는 우리가 독점 공급하는 재료가 있으니 마음대로 기술을 걸 수 있지만, 전기 차 부품은 재료부터 오성에서 컨트롤 한다고.”

“제가 멀쩡히 납품되는 물량을 왜 끊겠습니까? 그저 오성이 닉스라는 단일 회사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오성전자의 매출에서 전기 차 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설비투자나 연구 개발비도 이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국엔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해도 거부할 수 없게 되겠죠.”

“무슨 요구를 하려고 그래?”

“예를 들어서…… 무리한 증산 요구를 했다가 발주량을 반 토막 낸다든가? 아니면 경영 악화의 고통 분담 차원에서 결제를 어음으로 해주는 것도 좋겠네요.”

“그거 어느 회사가 많이 쓰는 레퍼토리 같은데. 나중에는 납품가 현실화라는 명목으로 단가를 후려치려는 건 아니지?”

“오, 그것도 좋겠네요.”

나와 매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하청업체에 하던 짓을 똑같이 돌려받으면 어떤 심정일까? 벌써부터 정용재의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현우야.”

같이 웃던 매형이 내 손을 잡아챈다.

웃음기가 싹 가신 진지한 표정이다.

“예, 말씀하세요.”

“네가 왜 오성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들을 마냥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도로 해도 되잖아? 응?”

걱정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마음을 녹일 정도로 따스한 눈빛이었지만, 난 끝까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눈앞의 시야가 갑자기 플래시백 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닷속.

사실, 뛰어들 때부터 죽음을 예감했었다.

그래서인지 등판에 총알이 박히는 고통보다는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공허함이 정신을 옭아맸다.

그 공간은 어둡고, 습했다. 아무도 없었다.

죽음으로서 모든 게 끝이 아니라면 어떨까?

만약 숨이 끊어지더라도 나라는 영혼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채 영원토록 그 자리를 맴돈다면…….

어쩌면 지금의 현실은 내 머릿속에 재생되는 가짜일지도 모른다.

“끅, 끅…….”

“현우야, 강현우?”

놀란 매형이 내 등을 두드린다.

“컥!”

효과가 있었는지 모자랐던 공기가 한 번에 폐부로 밀려오는 느낌이다.

사지가 파들파들 떨려오고 있다.

이래서 될 수 있으면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건만.

“너 갑자기 왜 그래?”

“그게, 순간적으로 숨이…… 안 쉬어져서요. 잠시, 잠시만 쉬면 괜찮아 질 겁니다.”

“야, 이놈아. 그런 게 어디 있어. 괜찮은 거야?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젠장,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구급차라도 불러야지!”

횡설수설하던 매형이 휴대폰을 집어 든다. 난 그런 매형의 손목을 꽉 붙잡는다.

“주변에 눈이 많습니다. 우선 차로 돌아간 다음 이야기하죠.”

힘겹게 몸뚱이를 차에 올린다.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쓰러지듯 시트에 몸을 기댔다.

“진짜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멀쩡하다니까요. 쓸데없는 일로 뉴스거리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애써 웃어보지만, 손은 여전히 덜덜 떨려댄다.

그걸 숨기기 위해 아까부터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지만, 매형은 다 아는 눈치다.

매형이 눈가가 촉촉해져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있다. 그걸 보자 어째선지 입가엔 미소가 피어난다.

그렇게 말 없는 시간이 지나고.

매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어때?”

“한 번 보시죠.”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 든다.

미미한 떨림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멀쩡한 수준이었다. 매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너 오성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사소한 악연이 있었다고 할까요.”

“사소한 일에 호흡곤란이 올 정도의 트라우마가 생겨?”

내가 답을 피하자 또 한 번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걱정되세요?”

“그럼 걱정이 안 되겠냐?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꺽꺽거리면서 숨이 넘어가는데?”

매형은 컵에 남은 냉수를 몽땅 털어 넣는다.

그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얼음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꼴깍 삼키곤 말을 이었다.

“네 반응을 보니 오성과 대립하는 걸 포기하라곤 못 하겠다. 그래도 이거 하난 명심해. 오성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어. 필요하다면 법을 비틀어서라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놈들이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10년이 넘도록 기업법률가로 일했던 매형이다. 그 누구보다 오성이 했던 일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위험한 선을 넘지 않도록 유지할게요.”

갑자기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인다.

“자, 손가락 걸고 도장도 찍어.”

“에이 참. 애들도 아니고 유치하게 뭡니까. 누나랑도 이렇게 하고 놉니까?”

“잔말 말고 빨리 걸어 이놈아.”

“합니다, 해요.”

두 손가락이 고리처럼 걸린다.

“약속한 거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손가락을 걸면서 했던 건, 약속이 아닌 사과였다.

미안합니다, 매형. 아무래도 이 약속 못 지킬 거 같네요.

* * *

한국에서 날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대기표를 끊고 기다린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420억 달러라는 닉스의 성공적인 IPO.

정부 추산 160만 평 규모의 볼보 전기 차 공장 설립.

공중파에 실시간으로 송출된 대통령과의 환담.

마지막으로 오성의 후계자, 정용재가 직접 찾아와 동석한 덕분에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게 됐다.

대다수의 미팅 요청은 매형 선에서 쳐냈다.

그럼에도 꼭 대면했어야 하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닉스와 연계를 원하는 대기업 총수급이나 IT 기업의 대표들 그리고 떡고물 하나 주워 먹으려는 집권당의 실세들 때문에 몸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중에 가장 강적은 단연 대현 자동차의 구현민 부회장이었다.

그는 이번 자동차 공장 설립 건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냈다.

생긴 것도 황소 같은 놈이 들이받을 기세로 밀고 들어왔으니, 처음엔 이놈이 약이라도 하고 나타난 줄 알았다.

강제로 끌어내서 망신을 줄까도 생각했다만, 어차피 부회장직에서 곧 물러날 시한부 인생 아니던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전기차 내장재와 카시트 쪽 납품을 던져줬더니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돌아갔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구현민 저놈은 단순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정신없이 한국과 전기 차 관련 일정을 소화하자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볼보는 흡수합병 절차가 완전히 끝나, 닉스 산하의 볼보 닉스라는 법인으로 새로 태어났다.

기존의 본사와 생산라인은 그대로 돌리고 카 실내에 장착되는 소프트웨어만 닉스에서 개발하는 형태로 협업이 이뤄졌다.

차량은 기존의 아날로그 계기판을 LCD 계기판으로 교체했고, 난해한 인터페이스의 내비게이션은 닉스 디자인과 UI를 덧씌워서 업그레이드시켰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로 인해 볼보의 안전과 더불어 닉스의 혁신적인 이미지가 잘 융합됐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반응은 즉각 닉스의 주가로 돌아왔다.

볼보의 새로운 계기판과 네비게이션의 인터페이스가 공개되던 날.

40달러 선에서 정체됐던 주가는 단숨에 50달러 선을 터치하고 48달러를 기록했다.

그날 발표에서 내가 기자들에게 던진 한마디는 뉴욕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

[대중들은 언제나 자극을 원합니다. 전 그들의 감성을 한발 앞서서 충족시켜줬을 뿐입니다.]

난 이번 인터뷰로 실리콘밸리의 메시아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 * *

라스베이거스의 9월은 변덕스럽다.

한낮에는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쌀쌀한 가을 날씨로 표정을 바꿔버린다.

실내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조장치들이 열심히 가동되고 있다만 갑자기 높아지는 온도를 따라가는 건 역부족이었다.

행사장엔 스탭들이 분주하게 무대 준비에 한창이다.

진행자의 동선, 조명의 각도, 디스플레이의 세팅까지 하나하나 점검해나간다.

오늘은 유독 점검이 철두철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 진행되는 무대는 전 세계 애플 마니아들이 목이 빠지라 기다리던 WWDC(Apple 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였기 때문이다.

이번 WWDC에선 4000만대가 팔려나간 애플폰4를 잇는 신형 스마트폰이 공개될 예정이었기에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입장권이 무려 2000달러에 육박하는 가격이었음에도 매표 10초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울 정도였다.

나는 애플의 VIP였기에 미리 행사장에 입장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먼저 입장 한 이유는 무대를 미리 보고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혹시라도 차후 발표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무대의 전경을 담아두고자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든다.

“디카를 들고 다니니까 너무 번거롭네. 빨리 스마트폰 카메라가 좋아져야 할 텐데.”

“앞으로 이삼 년만 지나면 그리되지 않겠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뒤를 돌아보자 까만 터틀넥에 리바이스 청바지 차림의 사내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스티븐 잡스였다.

“헛! 잡스,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부터 와 있었지. 자네가 무대 구석구석을 훑을 때부터 말이야.”

“그렇습니까?”

뻘쭘해진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잡스도 따라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근에는 멋진 별명을 얻었더군. 실리콘밸리의 메시아라고 했던가?”

“과분한 평가입니다.”

“아니. 자네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을 해왔어. 앞으로도 그렇게 해낼 거고. 안 그런가?”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하. 가끔은 놀러 오고 그러게. 나도 혼자 있으면 적적할 때가 있거든.”

어째선지 그의 미소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혹시 차기작 디자인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이 사람. 눈치가 너무 빠르단 말이지. 차기작 렌더링 작업은 아직인가?”

“벌써 끝냈습니다만 닉스와 애플이 맺은 계약 기간이 만료 직전 아닙니까. 슬슬 연장을 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나도 그건 알지만…… 튀겨 죽일 이사회 놈들이 로열티를 깎아야 한다고 결사반대를 하지 뭔가. 쯧쯧, 자네 디자인 아니었으면 애플폰이 이리 팔리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지.”

내 디자인 따위 없어도 애플폰은 없어서 못 팔았을 겁니다. 라는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수고하게나.”

“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IT업계의 전설, 스티븐 잡스.

본래라면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그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병이 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나로 인해 그의 미래도 바뀌었구나.

잡스가 지휘하는 애플은 내가 아는 애플보다 더 강할 것이다.

그런 애플을 닉스가 뛰어넘기에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째선지 가슴이 쿵쿵 뛰어댄다.

이건…… 잡스의 애플에 거는 기대감일까?

픽하는 웃음이 새 나온다.

“다시 태어나도 어쩔 수 없는 천상 IT 덕후라는 건가.”

고개를 털레털레 흔들고 다시 카메라를 집어 든다.

촬영을 절반쯤 마쳤을 때, 주머니에서 부르르 하는 진동이 느껴진다.

“여보세요.”

-어, 현우야! 나다 나.

“신용화 씨?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나 지금 WWDC 구경하러 왔거든.

여기 왔다고?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객석은 텅 비어 있다. 아직 입장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디신데요.”

-입구까진 왔는데, 줄이 너무 기네.

“입장은 아직 30분 넘게 기다려야 할 겁니다.”

-문제는 표도 없어.

“예?”

-사무실 직원들 전원에게 발권시켰는데, 하나도 못 건졌어. 우리 회사 해외망은 느려 터져서 써먹질 못하겠다니까. KT로 바꿔 달든가 해야지.

SG텔레콤 오너가 저런 말을 하니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 요즘 자학개그가 유행인가?

-아무튼, 입구니까 좀 데리러 와주라. 너 애플 VIP니까 프리패스일 거 아냐?

“알겠습니다. 서쪽 통로에서 기다리세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향했다.

입장할 때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긴 귀찮았기에 입구 근처의 스탭에게 인식표를 빌려서 나간다.

행사장 밖으로 한 발짝 나가자, 어마어마한 인파가 시야에 들어온다.

입장권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혹시 취소표를 현장 발권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더 몰린 것이다.

“신용화 씨, 어딥니까! 신용화 씨!”

한참이나 소리를 질러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다! 현우야, 여기!”

“스탭 통로로 넘어오세요.”

“어, 잠시만.”

그는 인간의 방벽을 억지로 헤엄쳐서 건너온다.

“와, 뭔 사람이 이리 많어?”

“표도 없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어? 어? 뭐야?

난 내뱉던 말을 끝까지 완성 못 하고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신용화 옆에서 나타난 여인 때문이었다.

차가운 인상이지만 따뜻했던 그녀.

“현우 씨, 오랜만이에요.”

“수, 수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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