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109화 (109/206)

기적의 IT 재벌 109화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한기를 내뿜는 건 오성의 정용재 부회장이었다.

경쟁사인 KG전자 측을 부른 것도 기분 나쁜 일인데 임원급도 아닌 차장급을 동석시켰으니, 그의 반응이 이런 것은 당연하리라.

자리에 앉은 진승모 차장은 옆에서 쏘아져 오는 야차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낸다.

아니, 오히려 정용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내게 고정돼있었다.

“두 분이 다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저희 닉스는…….”

“잠깐.”

말을 끊은 건 정용재였다.

그는 가까스로 미소를 다시 머금었지만 이미 완벽한 가면은 벗겨진 뒤다.

입만 웃고 있으면 뭐하겠는가? 눈빛은 사람을 죽일 기센데 말이다.

“방금 합석하신 분이 뉘신지는 모르겠다만, 같이 이야기를 이끌어 갈 자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KG전자를 대표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요?”

“강현우 씨. 회사를 대표해서 왔다고 모든 게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자리는 최소 부서 하나쯤은 움직일 만한 권한이 있는 사람이 동석하는 자립니다. 일개 차장급이 참석해봐야 이사진과 상의해봐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고놈 참. 급을 맞춰 달라는 이야기를 뭐 저리 길게 한 대.

그 말을 대놓고 하긴 자존심이 용납 못 하나 보다.

내가 설명을 하려는 차에, 분위기를 살피던 진승모가 치고 나온다.

“듣고 있자니 좀 섭섭합니다. 용재 형님, 기억 안 나십니까? 저 승모입니다.”

진승모.

혜성산업 진본모 사장의 장자로 KG그룹의 방계인 혜성 산업을 물려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KG그룹 진양현 회장에겐 아들이 없었기에 직계에서 가장 가까운 그가 KG그룹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네가 누군데 마음대로 형님이라고 하는 거냐?”

“재작년 오성의 신년회에서 인사드렸잖습니까.”

“신년회? 그렇다면…… 아! 그때, 그 방계……?”

정용재가 아차 싶어서 입을 닫는다. 하지만 진승모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이제 기억나시나 보네요.”

“흠흠. 그래,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기억을 다 못했구나. 미안하게 됐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는 법이죠.”

“그렇다고 해도 여긴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계열사를 이끄는 사장급은 돼야 이번 협상을 감당할 수 있어.”

이야기가 길어지자 내가 끼어들어 종지부를 찍는다.

“정용재 씨. 뭔가 오해를 하시는 거 같은데, 진승모 차장은 KG전자를 대표해서 나온 게 맞습니다. 그는 이번 안건에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나왔으니까요. 제 말이 맞죠?”

진승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그럴 리가.”

뒷말이 생략됐다. 아마도 ‘너 따위가 어떻게.’ 같은 말이 이어졌겠지.

“제가 KG에 요청했습니다. 진승모 씨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같은 자리에서 뵙고 싶다고요.”

“당신이 왜!”

“진정하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정용재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다.

행사장에는 재계 인사도 많았지만, 대통령의 공식 행사였던 만큼 기자들도 수두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빠져 나간 후, 남은 기자들의 대부분이 우리 쪽을 촬영하고 있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말이다.

“우리가 이어나갈 주제는 IT와 미래 산업 아닙니까? 이런 자리에 연세가 있는 분들보다는 젊은 피들이 주도해 나간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킬 기회지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쇼를 한단 말입니까?”

“누구보다 이미지를 중시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다니, 좀 아이러니하군요. 정용재 씨에게도 재벌 2세라는 꼬리표보다 젊은 경영자 이미지가 필요하지 않나요?”

정용재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미지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지금부터 진짜 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두 전자 회사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닉스가 볼보를 인수한 이유는 두 분 다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배터리 교체형 전기 차는 보급률이 높을수록 인프라가 늘어나고, 인프라가 늘어나면 보급률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그 때문에 저희는 테슬라에 의지하지 않고 볼보 인수라는 형태로 전기 차를 직접 제조하게 됐습니다.”

정용재는 다 아는 이야기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진승모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저희가 왜 한국에 공장을 지었을까요? 한국 정부의 조건이 좋아서? 배터리 생산기지가 한국과 일본에 있어서? 그도 아니면 제가 한국인이라서 애국심 때문에?”

내 질문을 진승모가 받는다.

“전기 차 부품은 내연기관차와 달리, 대부분이 전자부품입니다. 그러니 KG와 오성이 있는 한국은 전기 차 생산기지로 최적의 장소였겠죠.”

“진승모 씨는 전기 차 지식에 해박하시군요. 평소에도 전기 차에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기 차에는 관심이 아예 없었습니다. 어떤 형태로 굴러가는지도 몰랐죠. 하지만 최근 열린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테슬라Z가 3000만 달러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어떻던가요? 전기 차의 가능성이 있어 보이던가요?”

“지금까지 쓰이던 리튬 이온 배터리로는 솔직히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선 항속거리가 너무 짧고, 충전도 난해하며, 결정적으로 내연기관차와 비교하면 경제성에서 상대가 안 됩니다. 하지만 교체형 리튬 에어 배터리라면 앞서 말했던 전기 차의 단점들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전기 차가 내연기관차를 제치고 주류로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친환경은 시대의 흐름입니다. 디젤 차량이 가장 먼저 사라질 것이며, 그나마 공해가 적은 가솔린도 전기차로 대체되는 건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KG는 물론이고, 오성에서도 부회장인 용재 형님이 직접 나오신 거겠죠.”

조목조목 다 맞는 말들이라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러니 진양현 회장이 양자로 들이면서까지 후계로 삼으려 들었겠지.

이런 우리의 대화를 정용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KG 측에서 진승모가 나온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자, 서론은 이만 접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닉스는 여기 두 업체에 전기 차 부품을 발주하려 합니다. 발주량은 정확히 절반씩.”

“절반이면 따로 리스트가 정해진 게 있습니까?”

두 사람 모두, 주요 부품을 선점하겠다는 욕심이 눈에 보인다.

“부품 리스트는 필요 없습니다. 동일한 부품도 두 업체에서 반반씩 발주 넣는 걸 원칙으로 하겠습니다.”

이미 대현과 도요타에 하이브리드 카 부품을 조달하던 오성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당연히 자신들이 주요 부품 물량을 따낼 거로 생각했는데, 부품 모두를 절반씩 나누겠다니!

정용재는 재깍 반발하고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고작 30만 대를 생산하는 데 그걸 반반씩 갈라 먹으라니요. 그럴 거면 오성은 닉스와 거래에서 손 떼겠습니다.”

“저희 KG도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동일한 부품을 반반씩 발주하면 물량도 적어질 뿐더러 양사가 중복으로 투자하는 꼴이 되어 효율이 떨어집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물 흐르듯 준비한 말을 꺼내 들었다.

“볼보 전기차의 내년 생산량은 30만 대로 정했지만 향후 2014년까지 연 5백만 대까지 증산하는 걸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아, 참고로 볼보 전기 차에는 전 차종에 17인치 LCD 패널이 들어갑니다.”

두 사람은 5백만 대 증산이라는 이야기에 한번 놀라고, 전 차종 17인치 LCD 장착에 다시 한번 놀란다.

차 한 대당 800만 원 정도의 전자부품이 들어간다 치면, 연간 40조 원의 매출이 발생하는 셈이다.

거기다 두 회사 모두 디스플레이 계열사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저기…… 강현우 대표님. 한국 볼보 공장에서 연간 5백만 대나 양산이 가능합니까?”

진승모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예상했던 규모를 아득히 넘어섰기 때문이리라.

“수요만 충분하다면 양산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볼보를 사들인 거고요.”

이번은 정용재가 반박에 나섰다.

“볼보와 테슬라의 기술만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양산에 필요한 공장, 설비는 물론이고 그게 들어설 터도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연간 5백만 대를 생산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쉽던데요?”

너무 간단하게 답을 꺼내자 두 사람 모두 당황한 표정이다.

“보십시오. 제가 공장을 만든다니까 정부에선 무상으로 땅을 대주고 세금도 감면해 준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라고 다를 거 같습니까? 지금처럼 세계 경기가 안 좋을 때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고 하면 한국처럼 해줄 나라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렇다고 닉스가 공장을 지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젭니까?”

닉스의 시가총액은 420억 달러.

어지간한 완성차 업체는 찜 쪄 먹을 수준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뭐라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딸그락거리는 찻잔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겉으로 보기엔 묵묵히 차만 마시는 거 같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서 주판알을 튕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정용재였다.

“확실히 5백만 대 양산이 가능한 겁니까?”

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볼보에서 5백만 대를 생산 못 해도 두 업체에선 남는 장사 아닐까요?”

“발주량이 미달인데 남는 장사라뇨.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여러분은 1세대 양산형 전기 차 사업에 참여하는 겁니다. 앞으로 전기차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건 기정사실이고, 이번에 참여한 오성이나 KG는 전기 차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됩니다. 매번 다른 업체를 카피만 해대는 짝퉁. 아, 아니지 죄송합니다. 정정하죠. 패스트팔로워 역할만 할 게 아니라면 이번 건은 꼭 잡으셔야 할 텐데요?”

마지막 말은 오성전자가 애플폰의 디자인과 기능을 카피한 걸 꼬집는 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애플도 오성을 카피할 정도로 스마트폰 시장은 개판이 되지만.

뭐 그건 한참 뒤에 이야기니까.

“…….”

내 말의 의도를 모를 리 없던 정용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양 주먹을 어찌나 세게 말아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톡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폭발하기 직전일 거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어쩌겠는가? 오성이 이번 딜을 안 받는다면 닉스는 KG에서 부품을 조달받으면 그만이다.

오성이 전기 차 분야를 포기한다는 건 단순히 일감이 줄어드는 것뿐만 아니라, 경쟁사인 KG전자 배를 불리는 결과가 된다.

즉, 마이너스 1점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오성은 이번 계약을…….”

정용재의 말이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멈춘다.

자, 어쩔 거냐. 정용재.

숙이고 절반이라도 먹을 테냐, 아니면 반찬 투정하는 애새끼처럼 판을 뒤엎고 빠질 테냐?

이변은 없었다.

오성과 KG. 두 업체는 절반씩 부품 공급을 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봤다.

정식 서류가 오가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부회장인 정용재의 결정이었기에 의견 교환이 최종 결재나 마찬가지였다.

정용재는 표정 관리를 포기한 듯 대놓고 썩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진승모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 명함을 내민다.

“오, 오늘 감사했습니다.”

“제가 감사받을 일이 있었던가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러니까…… 굳이 저를 콕 집어서 이번 협상테이블에 불러주셨잖습니까.”

진승모가 미래의 KG그룹 회장이 된다고 하지만 10년은 이르다.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즉, 들러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기…… 강현우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괜찮다면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엥?”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매형도 놀라서 마시던 물을 게워낸다.

“저기 진승모 씨. 제가 더 어린 건 아세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선배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자식, 누구랑 다르게 붙임성 하난 좋네.

“뭐, 편하신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강현우 선배님.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는 신입사원처럼 90도로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자신이 일어난 의자까지 밀어 넣고선 말이다.

이런 예절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평소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다.

재벌가 자제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의 인상은 정용재나 신용화 같은 부류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정용재와 진승모가 자리를 뜨자, 지켜보던 매형이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파-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무슨 일을 그리 무지막지하게 진행하냐?”

“뭐가요?”

“왜 자꾸 정용재를 건드리는 거야? KG 쪽만 연결해도 부품조달은 어찌 되겠다만, 한국에서 오성의 파워는 절대적이야. 자칫 오성에서 재 뿌리면 우리만 피곤해져.”

정용재를 계속해서 자극한 이유?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이번 계획엔 무조건 오성이 포함돼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내심 그가 자리를 박차고 판을 깨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오성의 회장될 사람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된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테니 말이다.

“네가 예전부터 오성이랑은 악감정이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성의 도련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어찌 됐든 결과만 나오면 된 거 아닙니까?”

“으휴, 널 누가 말리겠냐.”

내가 실없이 웃자 매형은 속이 타는지 연신 찬물을 들이켠다.

“그런데 현우야.”

“예.”

“오성이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이번 부품 공급 명단에서 빼버리고 파나소닉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럼 배터리 쪽과 연계도 될 거 아냐.”

“음…… 오성이 싫으니까 꼭 같이 가야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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