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98화 (98/206)

기적의 IT 재벌 98화

닉스 에너지 연구소의 샘플 생산설비는 쉬지 않고 돌고, 또 돌고 있었다.

보급형 배터리는 파나소닉에서 위탁 생산이 예정돼 있었지만, 테슬라Z 2세대에 탑재되는 S클래스 배터리는 전량을 닉스의 샘플 생산설비에서 생산해야 했다.

기존의 보급형 배터리가 낮은 재충전 효율을 극복하기 위해 교체형이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면, S클래스 배터리는 교체 없이 그 자체만으로 초장거리를 운행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항속거리 2000㎞에 충전효율 97%.

이론상 20회를 재충전한 뒤에도 완충 시 1000㎞를 달릴 수 있는 괴물 같은 스펙의 배터리가 S클래스였다.

물론, 어마어마한 배터리 가격과 더불어 양산할 수 없다는 단점 때문에 보급은 무리였지만, 기술 과시용으론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무자파, 바쁩니까?”

“바쁘다. 무지무지 바쁘다.”

“바빠도 이야기 좀 하죠. 내달 초까지 납품해야 할 S클래스 배터리 말인데요.”

내 입에서 S클래스라는 말이 나오자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는 무자파.

“무자파는 한국어 서툴다. 한국어 너무 어렵다. 무함마드가 말 잘한다.”

어디서 턱도 없는 거짓말을.

닉스는 한국에 정착 의향이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내 한국어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무자파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럼 영어로 이야기할까요?”

“영어. 기억 안 난다.”

“생산 독촉하려는 거 아니니까.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시죠.”

“진짜냐?”

내 이럴 줄 알았다.

요즘 외국인들은 현지화가 너무 빨라서 탈이다.

“납기일까지 몇 개나 나올 거 같습니까?”

“8개쯤……?”

“진짜 8개가 확실합니까? 솔직히 말해주셔야 합니다.”

내가 되묻자, 무자파는 우물거리며 진실을 토해냈다.

“지금으로선 4개. 잘되면 최대 5개까지 가능하다.”

“허, 절반도 안 된다고요?”

내달 중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모터쇼엔 테슬라Z 2세대의 공개 판매가 예정돼 있다.

총 10대의 차량을 상향식 경매로 판매하기로 했으며, 그에 따른 대대적인 홍보까지 마친 상태였다.

-제로백 2.7초. 항속거리 2000㎞를 자랑하는 테슬라Z 2세대 총 10대 한정 판매!

기사로만 나돌던 차량이 실제 판매된다는 소식에 전 세계의 시선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로 몰렸다.

페이퍼 스펙대로 한 번 충전에 2000㎞ 운행할 수 있을지, 홍보 영상처럼 자유로운 충전이 가능할지, 제로백은 실제 달성할 수 있을지 등등.

테슬라Z 2세대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의 사실상 메인 행사가 된 셈이다.

판을 이만큼 벌였는데 배터리 때문에 펑크라도 난다면? 닉스의 신뢰도 추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후우…… 무자파. 왜 생산이 지연됐죠? 10개는 연구소 측에서 가능하다고 해서 결정한 거 아닙니까.”

“욕심이 났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자파는 배터리를 테스트 결과를 내게 보여주며 말을 잇는다.

“기존 S클래스 배터리는 충·방전효율 97%를 목표로 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 공정을 향상하면서 98.2%까지 효율을 끌어올렸다.”

“1.2%나 오르다니. 놀랍군요. 그런데 그거랑 생산이 늦어진 거랑 무슨 상관이…….”

무자파의 눈치를 보니 어쩐지 싸늘해진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혹시 S클래스 배터리를 만들어야 할 설비에서 연구용 샘플을 생산한 겁니까?”

무자파의 눈동자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한다.

아니, 아무리 연구용 샘플을 뽑고 싶다고 해도 그렇지.

납품용 제품을 멈추고 연구용 샘플을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연구가 너무 잘 돼서 그만…….”

“후- 그래서 어쩔 생각입니까? 아무 대책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니겠죠?”

“방법은 있다. 이번에 개발한 배터리를 쓰면 된다.”

“98.2%짜리 개량품요?”

“그걸 쓰면 납품기한 내에 10개를 생산할 수 있다. 대신 돈이 많이 든다.”

“얼마나 많이 드는 데요?”

무자파는 대답 대신, 못 보던 샘플 하나를 내 앞에 가져온다.

“이 부분과 이 부분을 기존과 다른 소재를 썼다. 촉매도 바꿔서 내부 산소가 12% 오염에 강해졌고 충·방전 효율도 98% 벽을 넘어섰다.”

“좋네요. 생산 속도도 더 빠르면 이걸로 후딱 만들어 버리죠. 어차피 10대만 만들면 그만이니 가격은 높아도 상관없습니다.”

“알겠다.”

활짝 웃은 무자파가 급히 샘플을 치우려 한다. 이상을 느낀 내가 그를 가로막았다.

“무자파. 잠깐만요.”

“왜, 왜 그러냐.”

“평소엔 다이아몬드 가루도 그냥 쓰던 양반들이 비싸다고 말하니 좀 이상한데요.”

무자파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샘플을 빼앗아 다시 확인에 들어간다.

“이거 샘플 코드가 Pt? 이거, 원소 기호는 아니겠죠? 배터리를 백금으로 만들었다든가.”

“맞다. 플래티넘으로 촉매제를 만들었다. 기존 S클래스 크기로 제작하면 개당 650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

왜 항상 안 좋은 예감이 틀린 법이 없을까.

650만 달러를 한화로 환산하면 80억.

차값을 제하고 배터리 원가만 80억짜리인 백금 배터리 차의 등장이시다.

“하하하…….”

“하하.”

내가 웃자 어색하게 따라 웃는 무자파.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차 한 대에 80억짜리 배터리가 들어가게 생겼는데요?”

“할 말 없다.”

금덩이로 만든 배터리를 쳐다보며 한숨만 뻑뻑 내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표님!”

손만호 이사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토해낸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백금으로 배터리를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 일은 무자파의 단독 범행 같다.

은근슬쩍 자리를 뜨려는 무자파를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저놈을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휴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하게 뛰어오십니까?”

“대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올 거라 예상은 했다만 생각보다 시기가 빠르다.

“누가 왔습니까?”

“대, 대현의 부회장이 직접 왔습니다.”

“엥? 최승룡 이사가 아니라요?”

“구동한 회장의 아들인 구현민 부회장이 확실합니다.”

조금 의외다.

자존심 덩어리인 재벌가 자제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신용화 때처럼 그룹 내의 지위가 위태롭긴 한가보다.

“2층 세미나실로 안내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 *

“이거, 귀하신 분이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귀하다뇨. 저보다 강현우 대표님이 더 만나 뵙기 힘든 분 아닙니까.”

첫마디부터 말에 뼈가 있다.

대현 자동차 부회장 구현민. 황소 같은 외모처럼, 일단 들이받고 보는 스타일인가 보다.

아쉬운 소리 하러 온 사람이 저래서야. 쯧쯧.

저러니 부회장자리에서 얼마 못 버티고 내려오는 거겠지.

난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죠.”

“그러죠.”

우린 자리에 앉았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세미나실.

먼저 입을 연 것은 상대 쪽이었다.

“테슬라의 언론 간담회에서 공개하신 닉스의 계획들, 인상 깊게 봤습니다. 전기차를 필두로 라이드셰어링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보급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렇습니다만.”

“충전소와 라이드셰어링 본부 역할을 하는 곳, 그러니까 이름이…… 닉스 스테이션이었죠?”

“대현의 부회장님이 이름까지 외워주실 줄이야. 이거, 영광입니다.”

내가 과장해서 호응해주자, 구현민은 이때다 싶은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가 닉스 에너지를 찾아온 이유는, 대현에서 닉스의 신소재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출시하고 싶어서입니다.”

“대현에서 전기차를요?”

“이미 개발은 끝났습니다. 내년에는 공공기관부터 도입할 예정이었지요.”

공공기관이면 대현 자동차의 경형 전기차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모른 척 놀란 표정을 지어줬다.

“의외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별다른 홍보를 안 했으니 생소하실 겁니다.”

“내년에 몇 대나 출시되는 건지요?”

출고량을 묻자,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린다.

“사실…… 제품을 다 만들고 보니 문제가 있더군요. 기존의 리튬이온배터리로 전기차를 굴리면 가격은 둘째 치더라도, 항속거리가 너무 짧게 나옵디다. 무리하게 배터리를 집어넣어도 최대 300㎞가 고작이지 뭡니까.”

300㎞는 무슨.

대현이 출시한 초기 전기차의 항속거리는 160㎞를 간신히 주행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때, 닉스의 신소재 배터리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 번 충전으로 2000㎞를 운행한다고 했던가요?”

“2000㎞의 항속거리는 고급형 모델에 한해서입니다. 보급형은 900㎞ 정도로 예상합니다.”

“900㎞면 충분합니다. 기존의 내연기관 승용차도 그 정도 항속거리는 힘들 테니까요.”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구현민.

난 녀석을 떠보니 위해, 슬쩍 운을 띄운다.

“닉스에서 공개한 리튬 에어 배터리는 잦은 충전을 버틸 수 없습니다. 보급형 배터리는 10회만 충·방전을 거듭하면 최초 용량의 50% 이하로 떨어지고 마니까요.”

“효율이 93%라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한 거고요. 아시다시피, 교체형은 초기 인프라 구축비가 어마어마합니다만…….”

구현민은 이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치고 나온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 대현도 같이 인프라를 구축하면 어떻겠습니까?”

“대현과 닉스가 같이요?”

“예, 대현도 테슬라처럼 국내에 배터리 교환소를 건설하겠습니다.”

“그건 좀 무리가 아닐지…….”

내가 말을 흐리자, 구현민은 잽싸게 말을 받아낸다.

“닉스 스테이션이 단순한 배터리 교환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닉스 제로 서비스와 연계로 쓰이는, 일종의 거점 역할도 하고 있다죠?”

“맞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에선 테슬라와 공동으로 시설에 투자하는 것이고요.”

“그럼, 대현에서 라이드셰어링 서비스를 합법화시켜 드리겠습니다.”

“허, 합법화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반응을 즐기는 듯 구현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린다.

“그 정도는 준비해야 닉스도 인프라 설립에 구미가 당길 거 아닙니까. 지금 계획으론 우리 대현이 50개, 닉스가 50개씩 담당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배터리 교환소 1곳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대략 23억 원. 거기에 토지 매입비까지 합치면 30억이 훌쩍 넘게 된다.

구현민의 말대로 50개씩 건설한다고 가정하면 최소 1,500억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제법 많은 투자가 필요하지만…… 닉스 제로만 합법화된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저항이 만만찮을 텐데요.”

“국내에 펜대 쥐고 있는 놈 중, 대현 돈을 안 먹은 놈이 없습니다. 언론에서 마사지만 해주면 법안 통과는 순식간에 끝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길.”

아까부터 목이 바싹 말라온다.

긴장한 탓일까? 그게 아니면…….

“저희가 임의로 만든 계약서를 가져 왔는데, 지금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구현민 옆에서 대기하던 젊은 수행원이 서류를 건네온다.

첫 장부터 빼곡하게 적힌 계약서였지만 대략적인 내용만 간추리자면.

-닉스는 대현 자동차에 2만 개의 차량용 리튬 에어 배터리를 공급한다.

-대현과 닉스는 각각 배터리 교환소를 최소 50개씩 건설한다.

-닉스의 요청 시, 대현은 배터리 교환소 설립에 필요한 투자비를 무이자로 대여해준다.

-대현은 라이드셰어링 서비스의 활성화를 위해 협력한다.

계약서를 끝까지 읽고선, 나도 모르게 픽하는 웃음이 새 나온다. 거기에 반응한 구현민이 바로 말을 꺼낸다.

“계약서에 뭔가가 잘못됐습니까?”

“조건이 파격적으로 좋은지라 웃음을 참을 수 없었네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불쾌하다뇨. 조건이 좋은 만큼, 대현이 전기차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알아주시면 됩니다.”

“그래 보이는군요.”

내가 계약서를 다 읽고 내려두자. 구현민이 본색을 드러낸다.

“조건이 마음에 드신다면 이 자리에서 서명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흠…… 지금요?”

“조건만 맞으면 쿨하게 진행하는 것도 방법 아니겠습니까?”

“쿨하게라. 그거 참 마음에 드는 말이네요. 이 정도 조건이면 고민의 여지가 없기도 하니.”

즉시 펜을 치켜들곤, 계약서 서명란을 채워 넣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구현민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다.

“구현민 부회장님.”

“예?”

“정말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단 말입니까?”

그가 되묻자 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다시 한번 표한다.

“이런 후한 조건으로 닉스를 밀어주시는데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부상조라…… 그렇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난 일부러 고개를 90도까지 숙여서 인사했다. 더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민아,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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