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94화
터보 제트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 활주로에 안착한다.
기체의 이름은 미국 걸프스트림에서 출시한 G650이다.
날렵한 디자인과 982㎞/h에 이르는 최고 속도. 최대 18명을 태울 수 있는 넉넉한 실내 공간까지.
지금은 전동 안마 시트와 족욕기, 와인셀러, 비즈니스 라운지 등의 편의시설이 꽉 차 있기에 실제 탑승 인원은 9명이 최대다.
여기까지 언급했던 내용은 부가적인 옵션이고.
가장 중요한 건 여유로운 연료 탱크로 인해, 한 번 충전으로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고, 안전벨트를 풀자 건강미가 넘쳐 보이는 스튜어디스가 다가온다.
“저희 승무원들은 손님 여러분과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한결같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걸프스트림 G650을 체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승무원은 안내 멘트를 끝까지 내뱉고 문을 개방했다.
미리 준비된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반가운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닉스 이노베이션의 재무와 회계를 담당하는 엘런 페이지였다.
“대표님, 대표님!”
“오, 엘런. 공항까지 마중 나온 거예요?”
숨을 헐떡이는 그녀가 서류 한 장을 내민다.
“대표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녀가 내민 서류는 팩스로 들어온 걸프스트림 G650의 계약서였다.
당연하게도 맨 아래엔 내 서명이 휘갈겨져 있고 말이다.
“이야, 비행기 안에서 사인했는데 벌써 도착했나 보네요.”
“그런 한가한 소리 하실 때가 아니에요. 상장을 앞두고 8천만 달러짜리 전용기라뇨! 투자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처음부터 살 생각은 없었는데, 시승해 보니까 안 사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그녀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다.
“저도 전용기의 필요성은 잘 알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매주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면 저라도 전용기 욕심이 날 테니까요.”
“역시 엘런은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저는 대표님만 좋다면 뭐든 오케이라구요.”
말을 내뱉고 나니 뉘앙스가 묘한 느낌이 나자, 엘런은 당황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 아무튼, 진짜 문제는 닉스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인식이에요. 전용기 구매는 CEO의 방만한 경영으로 비칠 가능성이 크니, 상장에는 악재로 작용할지도 몰라요.”
나도 안다. 지금은 전용기를 살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매번 베이징을 경유해서 15시간씩 비행하다, 직통으로 8시간 만에 도착하는 맛을 보면 누구라도 사인하지 않고선 못 배겼을 거다.
이게 다 손만호 이사 때문이다.
걸프스트림 G650은 아직 미출시 기체다.
하지만 예비 구매자나 VVIP들에게 시승의 기회는 주어졌는데.
그 VVIP 중 한 곳이 일본의 공룡기업 파나소닉이었다.
그걸 캐치한 손만호 이사는 파나소닉 측에 압력을 넣어서 걸프스트림 G650 시승 기회를 따내 왔다.
아무래도 머스크가 닉스 에너지를 방문했을 때, 내가 그의 전용기를 보고 눈이 반짝거렸던 걸 기억하고 추진한 거 같다.
손 이사, 이 양반. 안 되겠어.
괘씸해서라도 닉스 에너지의 사장으로 올려 주든가 해야지.
우리는 공항을 빠져 나와 차에 올랐다.
그 와중에도 엘런은 착실히 업무 이야기를 이어갔다.
“상장은 올해 말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파나소닉에서는 B클래스 배터리를 양산 중이겠고, 한국에서는 S클래스 배터리 공장 설립이 끝날 즈음이니까요.”
“B클래스?”
처음 듣는 단어에 내가 되묻자.
“아 참. 내 정신 좀 봐. 대표님에겐 아직 연락이 안 갔겠네요. 클래스는 테슬라 측에서 편의상 배터리 등급을 매긴 명칭이에요.”
“테슬라에서요?”
“예, 염가판인 90% 효율 배터리는 C클래스, 개량판인 93% 배터리는 B클래스. 그리고 최고효율인 슈퍼카 전용 배터리는 S클래스로 명명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임시로 붙인 이름이니 대표님께서 다시 정정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명칭은 그대로 가는 거로 하고, 상장은…… 좀 앞당기는 게 좋겠네요.”
상장 날짜를 당긴다는 말에 엘런이 안경을 고쳐 쓰고 쳐다본다.
“왜요? 뭐 묻었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뭐라도 결과물을 보여주고 상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엘런, 인터넷에서 물건 안 사봤어요?”
“장을 보러 나갈 시간이 없으니 자주 구매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
“택배를 받았을 때, 가장 기대되는 순간은 박스를 개봉하기 전입니다. 안에 뭐가 있든 간에 개봉 전 설렘을 능가할 순 없는 법이에요.”
“뭔가 억지스러운데요. 저번에는 대표님이 결과를 보여준 후 상장하자고 하셨잖아요. 사실은 저도 모르는 뭔가가 있어서 상장을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 뜨끔한 나머지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음. 그러니까…….”
사실 상장을 서두르는 이유는 테슬라의 생산 능력 때문이다.
테슬라에서 닉스 에너지에 발주한 배터리는 연간 5만 개다.
그만한 양을 테슬라에서 소화하려면 테슬라S가 교체형이라는 걸 감안해도, 연간 1만5천 대 이상의 물량을 판매해야 가능한 수치다.
하지만 테슬라는 올해는커녕 2013년까지도 1만 대를 출고하지 못해낸다.
그 이유는 컨셉 이미지와 전기차 기술만 그럴싸하게 뽐냈을 뿐, 양산에 필요한 핵심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억지로 첨단 이미지를 씌우려고 로봇을 활용한 무인 조립시스템을 밀어붙였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테슬라의 양산 능력이 세상에 까발려진다면, 독점적으로 배터리 공급을 약속한 우리에겐 치명적인 일이다.
그전에 상장을 하든가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걸 엘런에게 어떻게 둘러대야 하느냐다.
그녀는 닉스의 전반적인 재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말해줄 순 없는 법이다.
난 억지로 다른 핑계를 꺼내 들었다.
“사실은 전용기 주문해둔 게 3달 뒤에 도착하거든요. 그러니 그 전에 상장을 해버릴 생각입니다.”
“에이, 말도 안 돼. 고작 그런 이유로 상장을 앞당긴단 말이에요?”
역시 안 통하나.
부하 직원이 너무 똘똘해도 문제다. 당최 속아 넘길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럼,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
그녀는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대표님은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죠?”
“무슨 근거로요.”
“전에 대표님과 부사장님이 내기하셨을 때 느낀 건데, 두 분은 저랑 생각 자체가 다르시더라고요. 마치 다른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고 해야 하나?”
미래의 구글 부사장에게 이런 말을 들이니 묘한 느낌이 든다.
매형이야 본래 특출난 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난 미래를 훔쳐보고 온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아무튼, 제 말의 요점은 그런 능력을 갖춘 두 분이 이런 일로 상장을 당길 리 없단 말이에요.”
“저를 너무 높게 쳐주시는 거 같습니다만.”
“높게요? 천만에요. 2년 차에 접어든 기업이 이 정도로 성장하는 일은 독재자를 등에 업은 국영 기업도 불가능할걸요.”
속여 넘기는 건 이제 포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배운 스킬을 쓰는 수밖에.
“엘런, 상장을 왜 서둘러야 하는지 궁금해요?”
“예, 무지무지 궁금해요. 게다가 상장은 제 담당인데 무조건 알아야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닉스가 왜 상장을 앞당겨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제게 보고를 올리세요.”
뜬금없이 일 더미가 떨어지자 그녀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어진다.
“저, 저기. 대표님? 농담이시죠?”
“기한은 한 달. 평가로 상벌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럼, 파이팅.”
* * *
닉스 소프트에 도착하자 브릭이 버선발로 날 맞아 준다.
“보스, 오셨군요.”
“오래 기다렸어요?”
“당연하죠. 또 뭔가 충격적인 걸 준비해왔을 텐데, 안 기다리고 배기겠어요?”
난 옅게 웃으며 입을 연다.
“새로운 프로젝트 팀원들은요?”
“소회의실에서 대기 중이에요.”
“좋네요. 일단 가서 이야기하시죠.”
브릭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내가 핀테크 쪽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니, 거는 기대가 큰가 보다.
소회의실 문을 열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를 해온다.
아는 얼굴도 있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자면, 저는 닉스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인 대니얼 강입니다.”
테이블 중앙 자리를 차지한 내가 주변을 한 번 쓱 하니 둘러보자, 대번 티가 난다.
긴장해서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이 이번 비트코인 포럼에서 데려온 예비 입사자들이고,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내는 사람들은 닉스 소프트 직원들이리라.
“닉스 소프트 직원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외부에서 스카우트 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분야의 전문가들이실 겁니다.”
내가 전문가라는 말을 강조하자, 팀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미래에는 블록체인 기술이 유망한 분야로 통하지만, 지금은 누가 더 빨리 채굴하는지 겨루는 동호회 수준이다.
그런 그들이 나름 이름 있는 CEO에게 전문가라는 말을 들으니 어깨가 으쓱거릴 수밖에.
“이번에 만든 BC팀이 어떤 녀석을 개발하는지, 혹시 들으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다들 멀뚱멀뚱하게 눈치만 볼 뿐이다.
결국, 옆에 앉은 브릭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닉스 챗에 탑재될 최종병기를 만드는 팀이죠. 핀테크 시장을 접수할, 일명 닉스페이.”
핀테크라는 말에 몇몇 사람들은 나직이 탄성을 토해냈다.
1억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한 닉스 챗에 들어갈 결제 기술이었으니. 그 파급력을 생각하면 이번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반응이 오자, 신이 났는지 브릭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단순히 페이팔 같은 카드결제 어드바이스 서비스는 아니죠? 그러니 비트코인 기술자들을 모은 거고요.”
“비트코인과는 상관없습니다. 비트코인을 이루는 분산원장 기술인 블록체인을 통해서 보안성을 확보하는 거니까요.”
“좋네요. 결제 시스템에 꽃은 보안성이죠. 하지만 보스가 직접 구상한 서비스니 보안 말고도 뭔가를 준비했을 게 분명해요.”
브릭은 흥분했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단순히 페이팔 아류작 같은 서비스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고. 모바일에 접목될 핀테크 기술이라…… 뭐가 있을까요.”
“페이팔이 어때서 그래요.”
“어떻다니요. 페이팔처럼 준비가 번거롭고 복잡한 서비스라면 제가 반대할 겁니다.”
“흐음. 브릭, 페이팔의 창립멤버가 누군지 아세요?”
내 질문에 브릭은 곰곰이 생각을 짜내며 입을 연다.
“페이팔의 창립자는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 헙!”
협력사의 CEO를 깎아내렸다는 걸 깨달은 브릭은 두 손을 합장하듯 모으며 고개를 숙인다.
“하하, 페이팔은 좋은 결제 서비스죠. 이베이에서 쓰면 정말 편하답니다. 여러분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브릭 덕분에 회의실 분위기가 많이 펴졌다.
“자, 여러분. 프로젝트 BC에서 작업할 녀석은 브릭이 말했듯 결제 서비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결제 서비스는 페이팔을 필두로 이미 포화 상태나 다름없죠.”
내가 말을 시작하자 언제 분위기가 풀어졌냐는 듯,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닉스 챗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바일에서 가장 범용성 높은 메신저 앱이죠. 이걸 핀테크에 접목시킨다? 여기서 뭔가 빠진 걸 느끼신 분?”
이번에는 누군가 손을 들었다.
안면이 있는 걸 보니, 닉스 소프트 직원인 듯했다.
“손드신 분 말씀하세요.”
“예, 저는 프로젝트 BC팀의 팀장을 맡게 될 피터 노먼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빠진 것은 혹시 오프라인 결제가 아닌지요.”
이런 인재가 새로운 프로젝트 팀장이라니. 흡족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정답입니다. 닉스 챗은 PC판도 있지만, 베이스는 모바일입니다. 모바일의 강점은 휴대성에 있고요. 그런데 휴대성을 살릴 수 있는 오프라인 결제 시장에선 핀테크 기술 자체가 미비하죠.”
“혹시 오프라인 결제를 NFC로 해결하려는 겁니까?”
난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다.
“예리하네요. NFC도 지원할 겁니다. 하지만 100% 정답은 아니에요. NFC 결제를 유도하려면 모바일 디바이스가 NFC를 탑재해야 하고, 매장마다 NFC 리더기가 있어야 하죠.”
현재 주력 스마트폰인 애플폰4와 갤럭시스S 모두 NFC를 미지원한다.
즉, 현재로선 만들어도 쓸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 이야기가 물꼬를 트자, 여기저기서 의견이 들려온다.
“그럼…… 바코드를 생성하는 방법인가요?”
“바코드 리더기는 휴대폰 액정을 잘 못 읽던데.”
“화면이 어두워서 그래. 인위적으로 밝게 만들면 된다고.”
토론에 참여한 사람은 전부 닉스 소프트 직원들이었다.
이번에 입사 예정자들은 하나 같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황당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자, 여러분 잠깐만 주목해주세요.”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실내.
“저도 오프라인 결제 시스템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적외선 통신, NFC, 블루투스, 바코드, 랜덤키 생성 등등…… 하지만 하나 같이 모자라거나 번거롭더군요. 그런데, 모든 휴대폰에 탑재된 모듈 중. 결제에 바로 쓸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휴대폰을 꺼내 들자, 회의실에 모든 눈동자가 액정을 뚫어 버릴 기세로 쳐다본다.
난 그들을 향해 카메라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갑자기 사진을 찍자 다들 당황하는 표정이다. 사진도 흔들려서 엉망이었고.
“아직 감이 안 오십니까? 모든 스마트폰에 달린 기능, 바로 카메라로 결제하는 겁니다.”
“혹시 QR코드?”
목소리는 브릭의 것이었다.
“맞습니다. QR코드 결제라면 매장에 QR코드 사진 한 장만 걸어둬도 결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고 스마트폰 기종이나 OS여부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죠.”
해답을 들은 팀원들은 그게 가능할지 걱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너무 충격적인 발상이었기에 모두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프로젝트를 궤도에 올리려면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이번에 스카우트를 받고 모이신 예비 입사자분들, 닉스에 입사하셔서 프로젝트 BC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이 튀어나온다.
“기발한 아이디어, 같이 하고 싶어요.”
“꼭 입사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정하고 왔습니다.”
“대표님, 이 프로젝트 꼭 끼워줘요!”
예비 입사자들은 물론이고, 본래 닉스 소프트 직원들까지 열정이 꽉 찬 표정이다.
난 그들을 반기는 마음을 가득 담아 답했다.
“닉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