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89화
“배터리를 연간 20만 개. 아, 5만 개는 테슬라에 납품하니까 15만 개가 되겠네요. 그 정도로 발주하면 필요한 돈이 13억 달러쯤 되죠?”
“아니, 훨씬 넘어. 물류비까지 합치면 15억 달러는 필요할 거다. 연간 15억 달러니 토탈 45억 달러는 되겠지.”
“생각보단 많네요. 하지만 그 정도는 닉스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아닌가요?”
내 말을 들은 매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린다.
“그 많은 배터리를 진짜 재고로 쌓을 셈이야?”
“필요하다면 그럴 겁니다.”
“너, 이…….”
매형은 이마를 감싸 쥐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이번 한숨은 답답함이 절절하게 묻어 나온다.
“야, 강현우.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갈 게 아니야. 45만 개 이상의 배터리를 쌓아둘 창고도 만들어야 하고, 유지 관리비는 또 어떻고? 거기다 닉스의 한국 공장에서도 배터리를 찍어 낼 텐데, 그건 어떻게 감당할 거야? 응?”
“매형, 일단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됐어? 45억도 아니고 45억 달러라고 45억 달러! 그게 유동자산도 아니고 단일 재고로 묶여 있으면 투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사실이 까발려지는 순간 주가는 바닥을…….”
난 매형의 말을 끊으려고 일부러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말했다.
“여기요! 시원한 아메리카노 2개 주세요. 하나는 시럽 듬뿍 넣어서요.”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부터 매형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기에 주변의 시선은 전부 여기로 쏠려 있었다.
매형도 그걸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흠.”
“자리 옮기고 이야기하실래요?”
식사하긴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레스토랑 내에는 직원 한두 명만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다. 그냥 여기서 하자. 조용하고 좋네.”
“그러시죠.”
냉수로 목을 축인 매형은 목소리를 확 줄여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현우야. 진짜 재고냐?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재고로 쌓냐 마냐는 제가 선택하는 거죠.”
“네가 계약서를 대충 훑어본 모양인데, 파나소닉에서 납기를 펑크내든, 아니면 우리가 발주량을 펑크내든, 둘 다 위약금이 장난 아니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어.”
“아무 상관없어요. 수량을 저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니까요.”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자, 매형은 답답한지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발주를 덜 해서 물량을 조절하면 위약금은 어쩌고?”
“잘 생각해보세요. 리튬 에어 배터리의 핵심 재료인 탄소 나노 튜브. 그거 우리가 독점 공급 아닙니까?”
내 말을 곰곰이 곱씹던 매형이 앗!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이제 아시겠죠? 탄소 나노 튜브의 공급량이나 납품가는 엿장수인 우리 맘대로란 말입니다. 배터리 공급을 줄이려면 탄소 나노 튜브의 가격을 네다섯 배 올려 버리면 그만입니다. 파나소닉 측에서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일 텐데 공장을 돌리려 들까요?”
“절대 못 돌리지. 만에 하나 억지로 공장을 돌리려 들면, 수급을 팍 줄이면 그만이니까.”
“그죠?”
그때 직원이 음료를 들고 다가온다.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매형은 목이 탔는지 빨대를 빼내고 단숨에 목구멍으로 흘려 넣는다.
“큭, 이거 시럽 안 들어간 거잖아.”
“제께 시럽 들어갔네요.”
난 아메리카노를 하나 더 주문하곤 직원을 돌려보냈다.
“아무튼, 메인 재료의 공급을 저희 맘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스타트로 20만 개를 발주할 셈입니다.”
“15만 개는 재고로 쌓으려고?”
“예, 될 수 있으면 파나소닉에 이윤을 많이 줘서 내년에는 25만 개, 내 후년에는 35만 개까지 발주량을 늘릴 예정이고요.”
“너…….”
이제야 냄새를 맡았는지 매형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는다.
“일부러 물량을 팍팍 줘서 파나소닉이 공장을 증설하게 할 셈이구나? 그치?”
“흐흐, 맞습니다.”
증설까지 했는데, 재료값이 폭등하면 파나소닉 배터리 사업부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거기다 내후년인 2012년은 이차전지 업계의 최대 불황이 겹치는 시기다.
일본의 이차전지 부문 투톱인 소니까지 배터리 사업부를 매각하려들 정도니, 업계에는 한파 수준을 넘어서 혹한이 불어닥칠 거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걸 깨달은 파나소닉은 급히 공정을 바꾸려 들 겁니다. 리튬 에어를 버리고 기존의 리튬 이온 공정으로요.”
“그렇겠지. 리튬 에어 배터리는 리튬 이온 배터리와 겹치는 공정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때쯤 되면 친환경 차의 패러다임은 하이브리드에서 전기차로 넘어간 이후일 테죠. 파나소닉이 35만 개나 되는 차량용 리튬 이온 배터리를 어디다 팔겠습니까?”
“이건 못 팔아. 절대 못 판다고 단언해. 지금도 하이브리드 카의 배터리의 수요는 연간 16만 개가 한계야.”
이후의 스토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매형이 술술 말을 토해낸다.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파나소닉은 억지로 공정을 바꾸려다 역대급 적자를 내겠지. 공장 규모가 어마어마하니 공정을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어찌 공정을 다시 리튬 이온으로 바꿨다 한들, 판매량이 시원찮으니 공장 가동률을 점차 줄어들 테고…….”
자연스럽게 내가 말을 이어받는다.
“실적이 악화하면 주주들은 경영진에 압박을 넣겠죠. 적자 덩어리인 배터리 사업부를 축소하든, 매각하든 하라고 말이죠.”
“그때 시장에 매물이 나오면 홀라당 주워 먹겠다?”
“명분은 이거죠. ‘적자 사태에 닉스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으니 책임분담 차원에서 인수해 주겠다.’ 어때요?”
내 궤변을 들은 매형은 낄낄대며 웃기 시작한다.
“인수한다도 아니고 인수해 주겠다? 경영진들 속을 뒤집어 놓겠다는 거네. 녀석들 화병 나서 실려 가는 거 아니냐?”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줄 생각입니다. 닉스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죠.”
전후 사정을 파악한 파나소닉 경영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때가 되면 거대한 배터리 공장을 인수할 곳은 닉스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이 악마 같은 녀석. 처음부터 이러려고 데이터 넘긴 거냐?”
“아뇨. 그건 즉흥적으로 떠올린 겁니다. 갑자기 번쩍하고 느낌이 오더라고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네 머리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거냐? 진짜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습관적으로 앞에 놓인 커피를 입에 댄 매형이 또 한 번 인상을 쓴다.
“크읍, 이럴 때가 아니지. 이번 계획에 필요한 예산과 타이밍을 다시 재봐야겠어. 언제 파나소닉에 물량을 끊으면 치명적일지도 계산해봐야겠고.”
“천천히 하세요. 아직 시간 많습니다.”
“내가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안 되겠어.”
급히 짐을 챙긴 매형은.
“현우야, 나 먼저 가 본다. 저녁까진 들어와라. 같이 밥이나 먹자. 그리고 전화는 좀 켜두고. 알았지?”
매형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마치, 새 장난감을 얻은 꼬마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매형이 떠난 후에도 그 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봤다.
아이들은 해가 떨어지는 게 아쉬운지 더 힘차게 물놀이를 해댔고, 연인들은 손을 잡고 어딘가로 떠나간다.
“좋을 때지. 좋을 때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자, 불현듯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수아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핀란드 생활에 적응은 했을까?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긴 건 아니겠지? 생각난 김에 핀란드로 가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갑자기 뭔 궁상이람.”
그 일이 있고도 우린 여전히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나도 이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매일 같이 느끼는 두려움. 그것 때문에 의식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게 된다.
뭐가 두려우냐고?
이 세상 모든 게 두렵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지금의 현실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싶어 미쳐버릴 것만 같다.
괜찮다고,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좋으련만. 누구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는단 말인가?
내가 미친놈처럼 사업에 몰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뭔가에 몰입할 때면, 그나마 머릿속에서 걱정들을 한편으로 밀어 둘 수 있었으니까.
“후,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 버리려 하지만 녀석들은 위성처럼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무언가, 다른 곳에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뒤적거린다.
“어, 경훈이냐? 오랜만은 무슨. 내일 시간 되면 한번 만나자고. 아니, 별일 없어. 친구끼리 그냥 만나는 거지 이유가 있어서 만나냐.”
* * *
“헉헉…… 경훈아, 좀만, 좀만 쉬었다 가자, 응?”
“등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쉬어? 꾀부리지 않고 빨리빨리 걷습니다.”
경훈이 녀석이 훈련소 조교를 흉내 내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이미 다리는 풀려서 후들거리는 상태에, 숨을 들이쉬는 것도 힘들어 토할 것만 같다.
“어이, 강현우. 힘드냐?”
“어, 죽겠다. 이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냐.”
“사람이 쉽게는 안 죽어. 빨리 올라와.”
간절기용 정장 때문에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건 둘째 치고, 소가죽 구두가 발등을 압박해서 마비가 올 지경이다.
“113번 올빼미, 빨리빨리 올라갑니다. 실시.”
“올빼미는 무슨, 토할 거 같으니까 입 다물고 가자. 응?”
“이빨 보이지 않습니다. 왼발부터 갑니다. 자, 왼발. 왼발. 왼발.”
이를 악물고 억지로 발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호흡이 편해지는 게 느껴진다.
“후.”
여유가 생기자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몰랐던 맑은 공기 역시 느껴진다. 이제 좀 산에 올라온 실감이 난다고 할까.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던 다른 등산객들이 우릴 흘긋흘긋 쳐다보고 지나간다.
그럴 만도 한 게, 우리 모습은 등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딱 맞는 정장에 구두를 신고 있었고, 경훈은 잔뜩 멋을 낸 가죽 재킷에다 새하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등산은 계획에도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며 밤새도록 술이나 퍼먹을 생각이었으니까.
한데, 경훈이 녀석이 내 표정을 보곤. 기합이 빠졌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헛소리를 지껄이며 날 산으로 끌고 왔다.
“어때? 등산도 할 만하지?”
“뭐, 그럭저럭.”
“그럭저럭은 무슨 그럭저럭이야, 표정이 확 좋아졌구만.”
“그런가?”
“너, 처음엔 어땠던 줄 아냐?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네가 다 끌어안고 있는 줄 알았다.”
난 픽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녀석은 내 표정만 보고도 어떤 상태인지 알아챈 거 같다.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가 외면해서 그렇지 이 세상엔 기댈만한 사람이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로 다시 왼발부터 시작한다. 113번 올빼미 준비됐나?”
“예, 준비됐습니다!”
“정상을 향해, 앞으로 가!”
모든 일은 처음이 힘든 법이다.
초입부터 중턱까지는 숨이 차 호흡이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산을 오르면서 꽃 구경과 더불어 수다를 떨 여유까지 생겼다.
“강 CEO.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나올 애플폰이 4S가 맞아, 아니면 5가 맞아?”
“그건 보안사항이라 가르쳐 줄 수 없어.”
“그럼 출시일은? 7월이야, 아니면 8월이야?”
“그것 역시 보안사항이지.”
경훈이 날 사정없이 째려본다.
“인마, 이런 소스 정도는 가르쳐 줘도 되잖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나, 고소 먹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크흣. 마지막 희망이 너였는데.”
실망한 표정의 경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지막 희망이 무슨 뜻이야?”
“내가 블로그를 하나 운영하고 있거든. 말 안 했었나?”
경훈이 말은 안 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녀석은 블로그 운영을 통해, 미래에 진짜 IT 기자가 되니까.
“아무튼, IT 계통에 자질구레한 뉴스나 신제품 리뷰를 올리고 있는데. 내가 전역하고부터 시작한 후발주자다 보니 조회 수가 영 안 붙더라고.”
“그래서 내게 소스를 얻어 내겠다? 이거,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잖냐. 나는 블로그 기삿거리 얻는 거고, 넌 닉스 홍보 효과를 누리는 거지.”
홍보라는 말에 저절로 콧방귀가 나온다.
“블로그에 홍보할 정도로 닉스가 구멍가게는 아니거든요?”
“야, 그래도 내 블로그는 외국인들도 많이 와.”
“외국인은 무슨, VPN으로 우회 접속한 악플러겠지.”
“이게 사람을 못 믿네.”
씩씩거리던 녀석은 직접 블로그를 열어서 내게 보여준다.
하루에 블로그 접속자는 500명 남짓.
꾸준히 블로그 운영을 한 탓인지 총 접속자는 30만 명이 넘었다.
“열심히 운영했네.”
“당연하지. 난 진지하게 IT 기자를 노리고 있다니까.”
기사를 쓱쓱 훑어보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알차다.
단순히 사진과 영상으로 리뷰를 하는 걸 넘어서. 블로그를 읽는 사람이 뭐가 궁금해서 왔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긁어주는 느낌이 든다.
“자, 봐봐. 아래쪽 글엔 외국인들 댓글 단 거 보이지?”
“전부 한글 댓글밖에 없는데? IP만 외국이면 VPN 쓴 한국인이라니까.”
“그거 말고. 제일 아래쪽에 가상화폐로 피자 2판 시켜먹었다는 글, 안 보여?”
순간, 내 눈이 놀란 토끼눈처럼 떠진다.
“이, 이거…….”
가상화폐와 실물 간의 최초 거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이 여기 걸려있었다.
내가 게시글에서 눈을 못 떼고 있자, 경훈이 설명을 덧붙인다.
“그냥 도토리 같은 사이버 머니로 피자 바꿔 먹은 건데, 외국인들이 댓글을 엄청 달았더라. 이게 뭐라고 그리 호들갑들인지. 화폐 이름이 뭐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