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88화
한국의 제2공항인 김해 공항은 인천 공항과 비교하면 부지나 시설이 협소한 편이다.
하지만 이용자 수는 지방의 모든 공항을 합친 것보다 많았으니. 탑승 대기 줄이 똬리를 튼 뱀처럼 길게 늘어지는 건 흔한 광경이었다.
한국에서의 업무를 마친 파나소닉 직원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탑승 수속을 끝내는 것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기에 안으로 들어와서는 면세점을 돌아볼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중 부장인 사사키는 직원들을 대기시키고 혼자 VIP 라운지에 올라왔다.
그는 널찍한 라운지에 짐을 내려두곤 미리 준비해온 맥주를 잔에 따라 마신다.
“캬~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는 맥주잔에 남은 하얀색 거품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
니시무라 전무에게 닉스 에너지의 배터리 기술을 빼돌리라는 명령을 들었을 땐, 눈앞이 깜깜할 정도였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음알음 찾아간 에이전시에서 닉스 에너지 내부자를 포섭했다고 했을 땐, 정말이지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만 같았다.
‘이걸로 된 거야. 지금쯤이면 파일을 니시무라 전무가 열어 봤을 테니, 내 임무는 끝난 거라고.’
맥주잔에는 승진한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부장에서 임원으로 한 방에 승진해서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그런 자신의 모습 말이다.
맥주 한 잔을 깔끔하게 비우자, 은은한 취기가 오른다.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먼 곳을 쳐다보는데,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분명 낯이 익은 사람인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 그런 흐릿한 기억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사사키 도이치 부장님이시죠?”
유창한 영어를 듣고 나서야, 기억의 파도가 몰아친다.
테슬라의 발표장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 * *
“사사키 도이치 부장님이시죠?”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답이 돌아온다.
“맞습니다.”
“저는 닉스의 대표, 대니얼 강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유명한 분을 여기서 뵙네요.”
상대는 자리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그러곤 황급히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는데.
“귀하신 분을 만났는데, 아쉽게 비행기 시간이 다 됐네요. 다음에 꼭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난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사사키의 등에 대고 한 마디를 날린다.
“부하 직원들 앞에서 체포되고 싶지 않으면 앉으세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그의 앞에 대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지금 당장 탑승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알고 싶지 않아도 알 게 될 테니까요.”
“…….”
굳은 얼굴의 사사키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 이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된 거 같군요. 평범한 주제부터 시작해 보죠. 왜 산업 스파이를 보냈습니까?”
“산업 스파이라니 사실무근입니다.”
갑자기 훅 들어갔는데, 표정 관리가 잘 되는 모습이다.
“흠, 산업 스파이가 기술을 빼간 당일, 그 기술이 가장 필요한 업체에서 서른 명이나 견학을 와서 보안에 구멍을 냈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우연이 겹친 겁니다.”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다. 사사키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내는 듯하더니 결국 눈을 내리깐다.
“오사카행 비행기 시간이 50분 남았네요. 그 안에 이야기를 끝내려면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겠군요.”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우연이라고 했던 이야기죠. 이걸 듣고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지 한 번 봅시다.”
난 휴대폰을 조작해 녹음된 파일 하나를 재생시킨다.
-오늘 파나소닉에서 직원을 대규모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혼란한 틈을 타서 파일을 빼 오면 된다고…… 아, 아닙니다. 진짜 저는 시킨 대로만 했습니다. 파일은 여기로 전송했고 그다음은 저도 모릅니다.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올수록 사사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언제부터인지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손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범인은 이미 잡았습니다. CCTV와 통화 내역 등의 증거는 완벽하게 준비했고, 이제 경찰에 인계하는 일만 남았죠. 아, 참고로 재판은 미국에서 받을 겁니다. 기술 원천은 미국의 닉스 이노베이션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와 거리를 좁힌다.
“참고로 미국법은 산업 스파이에게 선고하는 형량의 최대가 20년이더군요. 기술을 훔치고도 절반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한국법과는 차원이 다르죠.”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사사키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는 모,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전부 거짓말입니다.”
“이런. 아직도 발뺌입니까? 저를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어 버린다.
“혹시, 아직도 회사가 당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계신 겁니까?”
“…….”
“안타깝게도 그건 헛된 희망이 될 거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리튬 에어 배터리의 포괄적인 기술은 닉스 에너지에서 개발하고 있지만, 핵심 소재는 다른 곳에서 제조 중입니다. 그게 없으면 리튬 에어 배터리는 평범한 고철 덩이나 다름없지요.”
난 비어버린 그의 잔에 물을 가득 따라주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쯤 파나소닉에서도 그걸 인지하고 비상회의가 열렸을 겁니다. 기대했던 신소재 배터리 기술은 쓸 수 없고, 테슬라의 배터리를 생산할 예정이던 공장은 가동을 멈췄으니. 자, 이제 회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앞으로 당신이 마주할 진실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나는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실 때까지 기다려 준 후, 말을 이었다.
“파나소닉 경영진은 결국, 닉스가 제안한 배터리 위탁 생산을 받아들일 겁니다. 자, 여기서 진짜 질문입니다. 당신에게는 엄청 중요한 부분이에요. 파나소닉에서 닉스의 위탁 생산을 받아들이면 산업 스파이 짓을 했던 사사키 씨는 어떻게 될까요?”
“그, 그게…….”
말을 못 하고 우물거리고만 있는 그를 위해, 내가 대신 답을 꺼내준다.
“파나소닉 측에선 닉스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사사키 씨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갈 겁니다. 더 나아가 당신을 매장하기 위해 지금까지 행했던 일들의 고소·고발도 같이 진행하겠죠. 왜? 당신만 사라져 주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끝날 테니까요.”
“저는 우리 회사를 믿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사사키는 필사적으로 부정해댄다. 머리로는 이해했음에도 한평생 몸 바친 회사에서 버림받는다는 걸 가슴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거다.
“사사키 씨. 잘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이번 일을 떠맡은 시점에서,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번 일을 성공시켰다 해도 산업 스파이 짓을 한 직원을 회사가 데리고 있겠습니까? 자사의 비밀을 빼돌릴지도 모르는데요?”
“우리 회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멍해져서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를 보자, 처량하기보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멍청한 소리군요. 당신은 화도 안 납니까? 처음부터 회사는 당신을 버림 패로 쓴 겁니다. 이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내다 버릴, 버림 패 말입니다.”
“내가…… 버림 패?”
새하얗게 변했던 사사키의 표정이 이제는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인간을 지탱하는 마지막 희망이 빠져 나간 듯한, 죽기 직전 사형수의 표정이 저리할까.
“아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난 최선을 다했다고.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해? 대체 왜!”
내 역할이 지금까지는 그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 악마였다면, 이제는 이승으로 다시 끌어 올려다 줄 천사를 할 차례였다.
난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여기서 당신이 살아 나갈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 사소한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죠.”
방금까지 절망이었던 그의 눈빛에 스며든 건 의심이었다.
쯧쯧, 그 의심을 미리 회사에 했었더라면 이런 꼴을 안 당했을 텐데.
“제가 처음부터 당신을 잡아넣을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감방에 처넣은 후,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 나가면 그만이었겠죠. 안 그렇습니까?”
대화의 흐름을 파악한 사사키는 내 손을 덥석 쥐더니 고개를 책상에 처박는다.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이 한 몸 가루가 되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허, 이러지 마세요. 주변에 눈이 많습니다.”
사사키는 주변 시선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책상에 고개를 처박는 걸 멈추지 않는다.
“대표님 부탁드립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뭐든, 뭐든 다 하겠습니다.”
“뭐든 한다라……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네요.”
준비해온 서류를 그에게 건넨다.
사사키는 서류 제목만 보고도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성공 보수는 닉스의 사외 이사 자리 5년입니다. 급여는 연 10만 달러이며 무조건 임기를 보장합니다. 아, 자리는 딱 두 자리가 빕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죠?”
머리를 90도로 처박은 사사키가 공손히 서류를 받아든다. 그리곤 비장함이 깃든 눈빛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성사시키겠습니다.”
* * *
언제부턴지 시간이 빌 때면, 혼자서 전망 좋은 호텔 레스토랑을 찾곤 했다.
조용한 환경에서 혼자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틈틈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케치를 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곳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창밖으로 백사장이 보인다는 거다.
드넓은 백사장과 잔잔한 파도.
아직 해수욕을 즐기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커플로 온 연인들, 아이를 데려온 가족들, 여자를 낚으러 온 사내놈들까지.
점처럼 조그만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잠시지만 복잡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잊히는 기분이다.
한참이나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내 이름이 들려온다.
“야! 강현우! 큰일 났다, 큰일!”
고개를 돌아보니 숨을 헐떡거리는 매형이 서 있다.
“음?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대요.”
“어떻게 오긴, 매번 휴대폰 끄고 사라지면 여기로 오잖냐.”
“그랬었나요.”
매형은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에 앉는다.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다. 회사로 이런 게 날아왔어.”
“이게 뭔데요.”
서류를 읽기도 전에 매형이 설명을 꺼내 든다.
“뭐긴 뭐야, 내가 파나소닉에 보낸 위탁 생산 계약서지. 그런데 계약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매형이 내민 서류는 내가 사사키 부장에게 쥐여 보낸, 바로 그 서류였다.
계약서의 마지막엔 예쁘게 니시무라 전무와 파나소닉 대표 직인이 같이 찍혀 있었다.
역시 성공했구나.
사사키는 결정권자인 니시무라의 최측근이다.
그라면 니시무라의 약점을 낱낱이 알고 있었을 테니, 그걸 쥐고 협박함과 동시에 닉스 임원 자리를 당근으로 제시했을 거다.
뒤가 없는 사사키로선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을 테고, 니시무라는 어쩔 방도가 없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장을 찍었을 거다. 물귀신만큼 무서운 건 없으니 말이다.
서류를 보던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매형이 다시 입을 연다.
“혹시, 네가 수정해서 보냈어?”
“맞습니다.”
평소엔 내가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도 별말 안 하던 매형이지만, 이번 건은 좀 달랐다.
매형이 의욕적으로 진행하던 일을 말도 하지 않고 틀어버렸으니, 자존심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까.
“파나소닉 측과 마찰이 좀 있었거든요.”
“마찰?”
난 파나소닉에서 산업 스파이를 보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매형은 배터리 기술을 빼가도록 놔뒀다는 말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그러다 파나소닉에서 자체 배터리 개발에 성공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우린 완전히 망하는 거라고.”
“특수 처리한 탄소 나노 튜브가 없으면 배터리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녀석들이 자체 개발할 수도 있잖아.”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다.
IBM에서 2010년부터 리튬 에어 배터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끝끝내 실패한 기술을 파나소닉이 뚝딱 만들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 사실을 매형에게 말할 순 없었기에 다른 말로 둘러댔다.
“만에 하나 파나소닉에서 리튬 에어 배터리 개발을 성공시킨다 해도, 그땐 이미 제가 파나소닉 배터리 공장을 인수한 뒤 일 겁니다.”
“저 자신감. 어후, 재수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매형은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다.
“그나저나, 위탁 생산 안 하고 인수한다던 놈이 그새 생각이 바뀌었어? 왜 서류를 고쳐서 도장 찍게 작업 친 거야?”
“아뇨, 제 생각은 변함없이 인수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런데 왜 계약서를 수정해서 보낸 거야? 거기다 연간 발주량이 20만 개라니, 테슬라에서 받겠다는 물량은 한정돼 있어. 알고 있지?”
“압니다.”
“테슬라에 매년 5만 개씩 떤다 치고, 남은 15만 개의 배터리는 어쩔 생각이야? 아니지 매년 20만 개씩 3년이니 45만 개나 남겠네.”
“남는 건 재고로 쌓으면 되죠.”
“뭐?”
대책 없는 답변에 매형의 눈이 가자미눈이 된다.
“거짓말을 해도 나한테 하면 안 되지. 네가 아무 계획도 없이 일을 벌일 놈이 아니잖아. 그치?”
“흐흐, 그런가요?”
“웃으며 둘러댈 생각 말고 빨리 보따리 풀어봐. 무슨 생각으로 배터리를 20만 개나 발주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