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87화
파나소닉 본사에 방문한 박준오가 도착한 곳은 ‘임원 회의실’이라는 방 앞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박준오는 떠듬떠듬 영어로 말하는 안내 직원이 돌아서기도 전에, 문부터 열어젖혔다.
임원 회의실 안에는 박준오를 기다리는 2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들은 박준오를 보고선 벌떡 일어나 손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박 상, 저는 배터리 사업부의 니시무라 히사오 전무입니다.”
니시무라의 입에서 나온 건 일본어였지만 박준오는 덤덤하게 영어로 답했다.
“저는 닉스의 부사장 박준오입니다.”
박준오는 어설프게나마 일본어를 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꿇릴 게 없으니 너희가 내게 맞추라는, 일종의 제스처였다.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박. 저는 사사키 도이치입니다.”
니시무라 옆에 있던 사내는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니시무라는 영어를 못하는 듯했지만, 박준오는 개의치 않고 계속 영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인사치레를 마친 세 사내는 책상에 마주 앉는다.
영어를 못하는 니시무라 전무 대신, 사사키 부장이 입을 연다.
“미스터 박, 어떤 일로 저희 파나소닉을 방문하셨습니까?”
“이번 테슬라에 납품할 배터리 건 때문입니다. 저희가 중간에 끼는 바람에 파나소닉 측에서 난처해졌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사키 부장은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댄다.
박준오도 같이 고개를 숙였지만, 눈길은 니시무라의 표정 훑고 있었다.
‘민감한 주제인데 부장급이 전무 앞에서 아무 상의도 없이 말을 내뱉는다? 분명 미리 말을 맞춰뒀군.’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가 흐른 후, 주제가 본론으로 넘어간다.
“아시다시피 저희 닉스는 전문 제조업체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때문에 당장 배터리를 양산할 공장도, 설비도 부족하죠.”
“그 말은 혹시 저희 측과 협업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신지요?”
“맞습니다. 제가 파나소닉에 방문한 이유는 신소재 배터리에 위탁 생산을 의뢰하기 위해섭니다.”
사사키는 습관적으로 니시무라를 쳐다본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사사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파나소닉은 신소재 배터리에 관한 기술이 없습니다. 이번에 선보인 리튬 에어 배터리를 생산하려면 그에 따른 기술을 제공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물론 가능합니다. 특수한 부품이 사용되긴 하지만 그건 저희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저희야 편하죠. 하지만 새로운 설비도 필요할 텐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겠습니까?”
“리튬 에어 배터리도 기본적으로 리튬 계통 이차 전지인 만큼, 기존의 설비 대부분을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자세한 건 이 서류를 보시죠.”
박준오는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영어로, 다른 하나는 일본어로 쓰인 서류였다.
자연스럽게 일본어 서류는 니시무라가, 영문 서류는 사사키가 집어 들게 됐다.
안경을 고쳐 쓴 사사키는 서류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만 먼저 훑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깜짝 놀라게 되는 데.
“연간 발주량이 5만 개나 된단 말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상황을 봐서 차츰 늘려갈 예정이고요. 혹시, 파나소닉에서는 5만 개 생산이 불가능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차량용 고급 배터리의 경우, 공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연간 20만 개는 무리 없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업체에서 5만 개나 발주하는 건 드문 일이라…….”
테슬라에서 선발주 예정이던 배터리가 2만 5천 개다.
한데 그 2배나 발주하다니?
닉스가 테슬라에 납품하는 걸 뻔히 아는 사사키로선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많이 발주할수록 파나소닉에서는 좋을 일 아닙니까.”
“예, 그렇긴 한데…… 일단 서류를 확실히 읽어 봐야 확답을 드릴 수 있겠군요.”
“찬찬히 확인하시길.”
박준오가 가져온 서류는 간단한 약정서가 아니라, 정확한 납품 단가나 기술 제휴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 때문에 사사키는 발언에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박, 죄송하지만 전무님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습니다. 잠시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시죠.”
사사키는 박준오의 양해를 구한 후, 일본어로 말을 꺼낸다.
“전무님, 계약 내용이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좋습니다. 테슬라에서 기존에 보내온 단가와는 거의 배나 차이가 날 정도로 말입니다.”
“나도 봐서 알아. 나쁘진 않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니시무라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이대로 계약하는 건 어떻습니까? 한국 내에도 배터리 공장을 지어줘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그걸 고려해도 엄청난 이득입니다.”
“계획에 변경은 없다. 준비했던 대로 진행해.”
“하, 하지만 이 정도 조건이면…….”
아쉬운 듯 다시 권하는 사사키였지만 니시무라가 쏘아 보내는 눈길에 바로 꼬리를 내린다.
“알겠습니다.”
사사키는 다시 시선을 박준오에게로 향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인 사사키가 말을 잇는다.
“저희로선 이대로 계약해도 좋습니다. 다만, 계약을 진행하기에 앞서, 공장을 한번 확인하고 싶습니다.”
“공장요? 닉스의 한국 배터리 공장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박준오는 의아한 표정이 저절로 나왔다.
닉스의 배터리 공장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샘플 공장만 있고, 주 공장은 이제 기둥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문하셔도 볼만한 게 없을 텐데요?”
“하하, 저희가 월급쟁이인 만큼 위쪽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마땅한 건수가 없잖습니까? 서류만 보고 도장을 찍었다간 나중에 깨질 게 뻔하니 명분을 쌓는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대기업일수록 의사 결정과 결재 체계가 복잡해진다.
물론, 다수의 확인을 거친다는 장점이 있지만, 월급쟁이 대다수는 책임 회피용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알겠습니다. 파나소닉 측 입장이 그러시다면, 방문 일정을 잡아서 연락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른 시일 내에 한국을 방문하겠습니다.”
* * *
돔형으로 지어진 닉스 에너지의 연구실은 파트가 두 개로 나뉜다.
외곽은 리튬 에어 배터리의 샘플 제작과 성능이나 안전성 검사를 하는 A연구실이고, 내부는 배터리 설계와 주요 재료를 연구·개발하는 B연구실이다.
그중 B연구실은 지정된 옷으로 환복은 물론이고 생체 인증, 적외선 카메라, 금속 탐지 등의 까다로운 보안 검사를 통과한 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연구소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는 연구원들.
닉스 에너지의 연구원은 대부분이 아랍계와 인도계였다.
그 이유는 설립 초기에 연구소장 무자파의 인맥으로 연구원을 모집했는데, 처우가 좋고 차별이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 세계의 인도계 연구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후- 이 연구소 너무 답답해. 담배 한 대 태우려 해도 십 분을 넘게 걸어 나와야 하잖아. 아무리 보안이 중요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난 불만 없어. 그만큼 대우가 좋으니까. 높은 연봉과 살 집에 차까지 주잖아? 고국에선 꿈도 못 꿀 대우지. 내가 들은 건데, 여기가 미국보다 대우가 좋대.”
“그건 맞아. 거기다 한국 아파트는 끝내줘. 편의점, 운동시설, 세탁실, 아침 식사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니까. 거기다 차로 20분만 달리면 도심이 나오니 불편한 거도 없고.”
“배달 문화도 끝내주지. 전화 한 통이면 뭐든 가져다주니까.”
담배를 비벼 끄던 그들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족히 서른 돼 보이는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었다.
“갑자기 한국인들이 엄청 몰려오네.”
“파나소닉에서 공장과 연구소를 보러 온다고 했던 거 같아. 그러니 저들은 일본인이라는 소리지.”
“와우, 파나소닉? 거기 일본에서도 엄청 큰 회사잖아.”
“맞아,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회사지. 그런데 단순 시찰이라 들었는데 뭐 저리 많이 온 거지? 다들 연구소로 들어가는 거 같은데.”
“엇, 큰일 났다. 저들을 전부 보안 검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제길, 서둘러. 무자파가 또 한 소리 하겠군.”
닉스 연구소는 길이 미로처럼 복잡했기에 직원 대다수가 지하에 무슨 시설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펌프실, 공조실, 수조실을 지나쳐, 가장 깊은 곳에는 보안실이라 적힌 곳 앞에 도달한다.
보안실은 닉스 에너지의 모든 CCTV와 통신, 보안을 담당하는 곳으로, 설계부터 보안을 위해서 지어진 연구소의 핵심 부서였다.
굳게 닫힌 보안실 문 앞에 서자, 철컥하는 걸쇠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안실에서 나온 사내는 전 SPI의 탐정이자, 현 닉스 보안팀장인 요제프 크라이머다.
그는 날카로운 턱과 깊은 눈 때문에 인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현장보다는 정보 쪽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별일 없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난 애플과 분쟁을 해결한 이후에도 SPI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경쟁 기업의 동향 파악, 해킹 무력화, 내부 보안 및 감시, 카피 앱 개발팀의 와해까지. 드러나지 않은 정보전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닉스 챗 소스를 빼가기 위해 경쟁 업체들이 한 짓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는데.
내부 직원 회유, 악성코드 배포, 해킹은 애교 수준이고 한 번은 사무실 문을 도끼로 깨부수고 들어와 PC를 훔쳐가려던 적도 있었다.
이쯤 되자, 나도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SPI와 정식으로 계약하고 한국은 지부 자체를 인수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탐정이라 지칭했지만, 대부분이 정보 장교 출신이나 국가 보안 팀 출신이었기에 닉스의 보안을 맡기기엔 최적의 인재들이었다.
중앙 모니터에 한 사내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연구원 복장을 한 아랍계 중년인이다.
“목표가 저 녀석입니까?”
내 물음에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3달 전 입사한 ‘울라’라는 사내입니다. 그간의 통화 내역과 메시지를 종합해보면, 오늘 일을 치를 거 같습니다.”
“설마, 오늘 파나소닉 직원들에게 직거래하려는 건 아니죠?”
“파나소닉 직원들은 미끼입니다. 그쪽으로 보안 요원이 쏠렸을 때, 내부에 심어둔 산업 스파이가 움직이는 작전이죠.”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모니터링하던 보안팀 직원이 소리쳤다.
“팀장님, 목표가 움직입니다.”
요제프 팀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대상의 예상 동선을 부지런히 파악하고, 통신 기능을 다시금 점검한다.
“목표, 연구실 뒤편으로 돕니다.”
“그쪽 카메라 연결해.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보던 특수 요원들 같았다.
아, 정보 장교면 특수 요원이 맞나?
연구소는 처음 건물을 올릴 때부터 보안에 중점을 맞춰서 지었기에 CCTV의 사각은 없었다.
연구소 뒤편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울라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조그만 장치를 삽입한다.
“저게 뭡니까?”
“디가우징 툴, 휴대폰 내부 데이터를 백지화하는 장치입니다. 자신의 흔적을 미리 다 지워버리려는 속셈이죠.”
“전문적인 산업 스파이군요.”
“아뇨, 놈은 애송이입니다. 보십시오. 긴장해서 손이 떨리고 있잖습니까. 녀석은 선수가 아니라 매수당한 겁니다.”
그는 휴대폰을 부숴서 저 멀리 던져 버리곤 몇 번의 심호흡을 후,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A연구실을 지나, B연구실의 보안 검색대까지 자연스럽게 통과하는 녀석.
내부까지 들어선 울라가 입을 우물거리다 무언가를 뱉어 냈는데. 그건 손톱만 한 크기의 전자 칩이었다.
놀라운 광경에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저런 식으로 숨겨 오는군요. 몸속에 있으면 금속 탐지가 안 되는 건가요?”
“됩니다. 다만, 저건 이런 일에 쓰이는 커스텀 제조 칩입니다.”
“USB 같은 저장장치입니까?”
“그건 옛날 방식입니다. 요즘은 통신용 칩을 가지고 실시간으로 전송시키는 방법을 씁니다. 일단 전송에만 성공하면 잡히더라도 임무는 완수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주위를 경계하던 녀석이 조심스럽게 PC에 칩을 삽입한다.
그러자 감시 모니터 한쪽으로 녀석이 쓰는 PC의 화면이 분할로 떠오른다.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듯, 필요한 정보만 귀신같이 찾아서 폴더에 집어넣고 있었다.
“요제프, 이대로 털리는 거 아니죠?”
“이미 이 일대의 통신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여길 보시죠.”
요제프가 가리킨 모니터에는 권총으로 무장한 보안 요원 두 명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B연구실 입구까지 도달한 거로 봐서, 스파이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때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인다.
“아, 잠시만요. 훔치게 놔두죠.”
“예?”
요제프는 ‘이 사람, 뭘 잘 못 먹었나?’라는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데이터는 한 번 전송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져가게 두세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이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요제프는.
“다들 들었지? 보안 전부 해제다. 데이터 전송하게 그대로 두고 그쪽으로 가던 보안 요원 물려. 알았나?”
“알겠습니다.”
고함을 친 요제프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한다.
이미 데이터는 전송이 시작된 듯 바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데이터 전송 중 31%…….]
이를 꽉 문 요제프가 나를 바라본다.
“대표님, 지시를 물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데이터가 전송되면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정말 놔둡니까?”
“물론입니다.”
[데이터 전송 중 55%…….]
“대표님, 아직 안 늦었습니다. 어서 통신 차단 지시를! 대표님!”
“괜찮습니다. 가게 두세요.”
“하지만…….”
난 불안해하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을 계속했다.
“큰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만큼 큰 떡밥을 내걸어야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