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IT재벌-86화 (86/206)

기적의 IT 재벌 86화

[일본]

두 개의 스마트폰에 적힌 글씨는 같았다.

일본이라는 두 글자는 이차 전지 업체, 소니나 파나소닉을 뜻했다.

다만, 방법에서는 의견 차이가 뚜렷했다.

“이차 전지 시장이 불황인 지금이 인수의 적기입니다. 특히, 파나소닉은 무리해서 산요를 합병했기에 회사 자체가 흔들리고 있어요.”

“아니. 인수는 반대야. 인수만 한다고 공장이 뚝딱 돌아갈 거 같아? 공장 내부 사정을 모르는 우리가 양산까지 준비하려면 걸림돌이 한두 개가 아니야. 아마, 내년은 돼야 생산이 시작될걸?”

“직원들 급여를 대폭 올리고 잡아두면 됩니다. 직원이 그대로면 경영진이 바뀐 거뿐이잖습니까? 양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매형의 말에 대뜸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난 어디까지나 이론에 의해서 의견을 내는 게 고작이지만, 매형은 기업 법률가로서 직접 현장을 뛰던 사람이었으니 무게감의 급이 달랐다.

“네가 하나 간과한 게 있는데. 경영진만 바뀌는 게 아니야. 또 하나 크게 달라지는 게 있지. 바로, 회사 간판이야.”

난 경청 모드로 고개를 끄덕인다.

“일본에서 파나소닉은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야. 근무하는 직원들 역시 일본의 기둥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지. 하지만 닉스는? 알려지지도 않은 해외의 신생 기업이 공장을 인수한다는데 돈을 더 준다고 직원들이 남아 있을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은 단순히 고용의 안정성이나 복지 따위의 물질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근로자를 대하는 주변의 인식이나 사회적 지위까지, 모든 게 달라진다.

그 때문에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이직은 돈을 2배 더 줘도 고민을 거듭하지만,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은 같은 돈을 줘도 이직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였다.

“결정적으로 인수가도 문제야. 파나소닉이 저물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덩치는 비대하다고. 일 년 전, 파나소닉이 산요를 얼마에 인수한 줄 알아?”

“46억 달러죠. 그것도 일본 정부가 개입해서 가격을 낮춘 거니, 실제 가치는 60억 달러가 넘을 겁니다.”

“잘 아네. 이제는 두 회사는 한 몸뚱이야. 인수가는 기존보다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아지진 않을 거다. 닉스가 52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해도, 파나소닉을 억지로 삼키려 들다간 닉스 전체가 기울 수 있어.”

현 정세를 냉철히 돌아보면 매형의 의견은 조목조목 맞는 말이다.

닉스가 파나소닉을 먹는다는 건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키는 것만큼 무리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매형이 미래에 배터리 사업이 얼마나 커지는지 알아도 이런 의견을 고수할까?

2010년 생산 배터리는 70% 이상이 포터블 기기에 사용되는 소형배터리다.

그러나 10년 후에는 전기차와 더불어 ESS(energy storage system · 에너지 저장 시스템)의 부상으로 대형 배터리 시장이 33배나 급성장하게 된다. 이걸 알면서도 인수를 포기할 수 있을까?

“현우야,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잖아. 테슬라의 투자가 물 건너간 지금, 우리가 위탁 생산 의사를 밝히면 파나소닉 측에서도 좋다고 받아들일 거다.”

여전히 정도를 말하는 매형.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난 손가락 2개를 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투 트랙 전략으로 가는 겁니다. 저는 파나소닉이든 어디든 배터리 사업부 인수를 목표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럼, 난 위탁으로 접근하고?”

“예, 그거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해보고 타당한 쪽으로 결정 내리는 겁니다. 업체도 여러 곳을 찔러 보는 거고요.”

매형은 내 고집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그럼 최종적으로 심판은 누가 봐? 페이지 양이 해주는 건가?”

갑자기 시선을 받은 엘런은 난처하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제, 제가 심판? 무리예요. 저는 경영진도 아닌데 어찌…….”

“페이지 양 말고는 사람이 없습니다. 닉스 이노베이션의 임직원은 여기 있는 3명이 전부니까요. 현우, 네 생각은 어때?”

난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엘런이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닉스 이노베이션에서 유일한 중립적 인사 아닙니까. 거기다 캐피털사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으니, 투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가능하겠죠. 안 그래요?”

궁지에 몰린 엘런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표정이다.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그녀가 갑자기 아! 하는 감탄사를 토해낸다.

“두 분, 잠깐만요. 이미 저희는 쟁쟁한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받았잖아요. 그것도 주당 21달러나 받으며 말이죠. 그런데 공모가를 올리기 위해 또 뭔가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적당히 양산에 들어가는 척만 하고 상장하는 게 낫지 않나요? 양산 시작하다가 일이 꼬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잖아요.”

“리스크는 피하고 과실만 딴다?”

“예, 그거에요. 일단 상장만 성공적으로 끝낸 다음에 인수든, 위탁생산이든, 결정하는 거죠.”

지극히 금융계 사람이 할법한 생각이다.

아마 책으로 낸다면 ‘투자의 정석’ 쯤 되겠지.

“엘런, 한 가지 물어보죠.”

“말씀하세요.”

“당신이 워렌 버핏이나, 레드스톤의 말론, JP모건의 데이몬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세요?”

개떡 같은 물음이었지만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들도 우리가 액션만 취하는 걸 눈치챌 거란 말씀이시네요. 하지만 그걸 안다 해도 대응할 방법이…… 아,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들이 상장과 동시에 닉스A 주식을 전량 매각해 버리면 우린 망하는 겁니다. 그들이 원한 건 처음부터 의결권이 있는 닉스B 주식이지, 깡통인 닉스A 주식이 아니거든요.”

그들이 가진 25%의 주식 중, 일부만 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주가는 바닥을 칠 것이다.

더불어 닉스A 주식은 앞으로 거부들이 공모가 끝남과 동시에 내던진 주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닐 테고 말이다.

“그들이 내던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짜 실적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 완전히 이해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은 못 따라간다는 것도 함께요.”

“너무 풀 죽어 있지 마세요. 엘런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요.”

“그런 걸까요?”

“지금이 경험치를 쌓는 과정이라 생각하세요.”

옆에 있던 매형의 입이 씰룩거린다.

아마, 경영 1년 차인 내가 캐피털 업무 4년 차인 엘런에게 경험 부족이라는 말을 하는 게 이상하게 들렸겠지.

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다.

“그런 의미에서, 엘런은 심판이 아니라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이번에는 판이 커질 테니 경험치를 쌓기 안성맞춤이죠.”

“예? 그럼 심판은요?”

“심판은 투자자들이 알아서 해줄 겁니다. 자그마치 52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가만있을 리 없죠. 지금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엘런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녀로선 난처하게 중간에 낀 거 거보다, 대표인 내 쪽에 붙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겠지.

“현우, 이 자식. 치사하게 2:1로 싸우시겠다?”

“어허, 전문 기업 법률가님께서 왜 이러십니까. 쫄리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시죠.”

“허허허, 요놈 보게나.”

매형은 가소롭다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엘런은 미안하다는 표현으로 두 손을 모아 보인다.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내가 이기면, 한국에 카페 들어가는 거. 닉스가 회사 차원에서 밀어주는 거로. 어때?”

“제가 이기면요?”

“그럼 내 주식 다 팔아서 카페 내야지. 물론 내가 진다는 생각은 1%도 안 하지만.”

음흉한 웃음을 숨기려는 데도 자꾸 비집고 흘러나온다.

“지금 닉스 주식 팔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실 텐데요.”

“질 생각 없다니까. 내가 이 바닥 물 먹은 지 10년이 넘어. 너 같은 초짜한테 지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어야지. 안 그래요, 페이지 양?”

엘런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본다.

“나중에 딴 말하기 없습니다?”

“네 걱정이나 해. 한국에 직영점 1000개를 한 방에 낼 거니까.”

나와 매형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서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말이다.

* * *

기존의 리튬 이온 배터리 제조업체는 리튬 에어 배터리의 등장으로 주가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나마 한국의 오성SDI나 KG화학은 가격 경쟁력과 더불어 자사의 전자제품에도 다수의 배터리를 보급했기에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지만, 소니나 파나소닉 같은 일본 업체들은 사정이 달랐다.

특히 2009년 12월, 이차 전지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산요를 합병했던 파나소닉으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테슬라, 테슬라. 하…….”

파나소닉 배터리 사업부의 니시무라 전무는 테슬라의 신작 발표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신소재 배터리를, 그것도 교체 형식으로 쓴다니?

상상에서나 가능한 구상을 실제로 쓰겠다고 꺼내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더 큰 문제는 그게 상상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테슬라Z 2세대라는 실존 모델이 나와 버렸다는 거다.

“어이, 사사키.”

“예, 전무님.”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는 니시무라 전무의 오른팔, 사사키 도이치 부장이었다.

니시무라 전무가 그를 키웠기에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그는 그런 심복이었다.

“테슬라에서 공개했다는 신형 스포츠카 정보는 알아봤나?”

“예, 확인했습니다.”

“어때? 얼마나 허풍을 섞었든?”

“그게…….”

사사키 부장은 내키지 않는 말을 씹듯 내뱉는다.

“제로백은 스펙에 나온 그대로였습니다.”

“항속거리는?”

“시험 주행 땐 심하게 과속을 했기에 2000㎞를 주행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터를 2개로 늘린 걸 감안하면, 2000㎞를 주행할 배터리는 기술은 확보했다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니시무라 전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사키는 급히 사족을 붙인다.

“판매 조짐이 따로 없는 거로 볼 때, 테슬라Z 2세대는 퍼포먼스용으로 출시한 거 같습니다. 따라서 양산은 불가능하니 그리 큰 문제가…….”

듣고 있던 니시무라가 책상을 쾅 소리 나게 내려친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반인 중에 실제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 거 같아? 대부분 수치상으로 쓰인 스펙과 기자들이 찍어댄 영상을 보고 감탄하는 게 전부잖아!”

“그, 그렇습니다.”

“그럼 한 대만 만들어도 큰일인 거지, 뭐가 문제가 아니야?”

“죄송합니다.”

쯧, 하고 혀를 찬 니시무라가 담배를 꺼내 든다.

“후-”

그나마 다행인 건 신소재 배터리의 재충전 효율이 95% 남짓이라는 거다.

재충전 효율이 99% 이상인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충전 효율이 떨어지니, 잦은 충전이 필요한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은 파나소닉이 지킬 수 있을 터.

하지만 테슬라의 전기차가 시장을 장악하면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이 쪼그라드는 건 당연한 순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니시무라는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망할, 머스크 자식……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본디 파나소닉은 테슬라와 배터리 공급 계약을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막판 단가 협상만 남아 실무진끼리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테슬라 본사에서 독점 계약이 발표됐다.

듣도 보도 못한 닉스 에너지라는 곳과 말이다.

‘차라리 잘 됐어. 닉슨지 뭔지 하는 아마추어 놈들이면 상대하기 쉽지.’

거구의 니시무라가 일어서자, 의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준비했던 그거는 잘 돼 가고 있나?”

그거라는 말에 사사키의 양 어깨가 움찔한다.

“무, 물론입니다. 시일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확실하게 진행 중입니다.”

“그래, 이번 일에 회사의 사활이 달려있어. 돈은 얼마든 써도 되니까 무조건 성공…….”

삐리릭- 삐리릭-.

아직 니시무라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정맞게 인터폰이 울려댄다.

“제가 받겠습니다.”

니시무라는 인터폰을 받으려는 사사키를 손으로 막아선다.

“예, 니시무라입니다.”

-전무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디서?”

-한국에서 오신 분인데, 닉슨이라는 곳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닉슨? 닉스 아니고?”

-아, 죄송합니다. 닉스가 맞는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좋아, 올려 보내.”

인터폰을 내려놓는 니시무라가 사사키를 돌아본다.

“들었나, 사사키.”

“예, 전무님.”

“흐흐, 놈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알지? 준비한 대로만 하라고. 그럼 우리 페이스로 흘러갈 테니까.”

음험한 미소를 머금은 니시무라와는 달리, 사사키의 눈동자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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