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84화
각오를 다지고 문을 열어젖힌다.
끼익.
특별실에는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여인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사모펀드 레드 스톤의 투자 책임자 지나 말론.
지나 말론은 피닉스 캐피털에서 엘런의 직속 상사였다.
유일하게 예상했던 인물이기에 놀람은 적었다.
다음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그곳엔 고집스러운 인상의 사내가 앉아 있다.
JP모건의 투자 책임자 찰스 데이몬.
개인 은행으로썬 최대 규모인 JP모건의 실질적인 돈을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가 이번 투자에 합류해 준다면 닉스로선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속으로 주먹을 불끈 말아 쥔다. 엘런, 성공했구나.
마지막으로 돌아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에게 시선을 던진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뒤통수만으로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준다.
사실, 레드스톤과 JP모건만 잡더라도 이미 닉스의 목표는 달성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지막 남은 인물에게 아주 강렬한 이끌림이 느껴진다.
과연 누굴까?
그때 백발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딱 마주친 시선.
지금까지 침착을 가장했던 내 가면이 한순간 무너져 내린다.
투자의 귀재, 최고의 경영자, 세계 2위의 부자, 500억 달러의 자산가. 버크셔 해서웨이의 회장이자 CEO인 워렌 버핏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주가가 요동치고 투자자들이 몰려드는, 한 마디로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버크셔 헤서웨이의 실무진와도 황공할 판에, 버핏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엘런,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거야?
내겐 당황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반가워요, 대니얼 강. 아주 흥미로운 발표였어요.”
레드스톤의 말론이 인사를 건네 오자, 난 곧장 고개를 숙여 답한다.
“반갑습니다, 지나 말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데이몬과 버핏의 말들.
“닉스의 대표가 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무튼, 오늘의 닉스는 테슬라보다 더 빛났습니다.”
“허허, 내 이런 투자 설명회는 처음이야. 정말 멋지군, 멋져.”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도 인사치레가 이어진다.
세 명의 거부를 상대하느라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세 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투자에 관한 요청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버핏은 얼음 잔에 담긴 콜라로 목을 축이곤 말했다.
“허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겐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 당찬 아가씨도 그렇고, 역시 젊은 피란 이런 게 좋거든.”
당찬 아가씨? 엘런을 이야기하는 듯한데, 내 머릿속 엘런은 ‘당찬’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이건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군.
난 긴장을 떨치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아시다시피 닉스는 모바일 서비스인 닉스 챗, 닉스 서클, 제로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테슬라와 제휴하여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도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닉스의…….”
그때, JP모건의 데이몬이 끼어들었다.
“얼마나 투자받으시려고 레드스톤과 버핏 회장님까지 불러 모은 겁니까?”
그의 말투로 보아하니, 다른 투자자들을 같이 초대한 게 못마땅한가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어떤 투자처를 가도 최고의 대우를 받았을 JP모건이 지금 자리에선 최약체였으니까.
말론 역시 의문을 표한다.
“닉스에서 필요한 마케팅비와 공장 설립비라면 한 곳만 초대했어도 됐을 텐데요.”
“아닙니다. 닉스는 이미 로열티로만 3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였으며, 기존 투자금 5억 달러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정도 자금이면 마케팅은 물론이고 공장 설립까지 여유 있게 진행할 수 있죠.”
로열티가 3억 달러라는 말에 사람들 표정이 굳어진다.
애플이 닉스에 로열티 수입을 내고 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게 3억 달러나 될 줄은 예상 못 했나 보다.
“흠흠.”
특히 데이몬의 표정이 안 좋다.
초대를 받았을 땐, 닉스가 돈이 고파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하룻강아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다 큰 범이었기 때문이겠지.
난 준비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닉스의 성장은 이제 시작입니다. 닉스 챗으로 O2O 서비스의 기틀을 닦았고, 닉스 제로는 전 세계인의 교통수단을 대체할 것입니다. 닉스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로 말이죠.”
그때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말론.
“대니얼 강, 잠깐만요. 닉스가 매력적인 투자처라는 건 여기 모인 다른 분들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니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데이몬과 버핏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닉스는 매력적인 투자처입니다. 전기차가 상용화 수준에 도달하면 자동차 시장을 집어삼킬 거라는 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설로 통하니까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요. 닉스는 사업 내용이 확실하고, 장기 성장 가능성이 있으니. 버크셔 헤서워이는 투자할 의향이 있소.”
두 사람이 같은 의견임을 확인한 말론은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린다.
“레드스톤 역시 닉스에 투자할 의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발표 때 듣기론 올해 안에 상장을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예, 연내 상장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타이밍이 참 공교롭군요. 상장에 성공하면 테슬라에 배터리를 독점하는 닉스에겐 엄청난 돈이 모일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못 기다리고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날카로운 질문이다.
돌려 말했지만, 그녀가 진짜로 묻고 싶은 건 닉스가 무리하게 투자받는 게,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니냐는 거였다.
난 그들을 쭉 둘러보곤, 마커를 닫아 버린다.
“여러분이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닉스가 상장 전 투자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쉽게 생각해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논리론 우리를 설득할 수 없을 거요.”
데이몬의 말에 내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뭔가 오해를 하신 거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초대한 건, 투자를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투자를 받지 않겠다? 그럼 대체 왜?”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죠. 닉스에 투자할 기회 말입니다.”
뜻은 같지만,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르다.
“그런 오만한 소리를!”
데이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순간.
갑자기 버핏이 껄껄 웃기 시작한다.
“허허허, 오늘 정말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구먼. 최대의 투자자들을 모아두고 투자할 기회를 주겠다? 이 맹랑한 짓의 이유를 들어라도 보는 게 어떻겠소?”
그는 시골집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흘렸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사냥감을 탐색하는 맹수의 것이었다.
데이몬은 별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내키지 않았지만, 버핏은 JP모건에서도 중요한 고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무례한 소리로 들렸다면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난 예의상 고개를 살짝 숙인 후,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써나간다.
“현재 닉스는 3종류의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먼저 제가 90%를 보유하고 있는 닉스C는 1주당 10개의 의결권을 가집니다. 그리고 다음은 닉스B, 1주당 1개의 의결권이 걸려있죠. 마지막으로 닉스A, 이게 이번에 상장시킬 주식입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했음에도 앉아 있는 세 사람은 대번 눈치를 챘다. 상장시킬 닉스A가 어떤 주식인지 말이다.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건 버핏이었다.
“자네, 의결권이 없는 주식을 상장시킬 생각이군.”
“맞습니다. 연내 상장할 닉스A 주식은 의결권이 없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국가다.
같은 주식이라도 의결권의 숫자를 각각 다르게 만들어서 경영권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쉽게 말해, 주식에 의결권이 아예 없다는 건 닉스A 주식을 아무리 매입해도 주주가 기업 경영에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대번에 말론이 반문에 나섰다.
“잠깐. 의결권 없는 주식이라니. 그걸 누가 산단 말이에요? 그건 주식이라고도 볼 수 없잖아요.”
“의결권이니 뭐니 하는 건 기업을 쥐고 흔들 정도의 자본가들에게나 쓸모 있는 겁니다. 주식시장 대다수를 차지하는 개미 투자자들은 주주의 권리 때문이 아니라 차익을 위해서 닉스A 주식을 살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데요. 만약 공모에 실패하면 어쩌려는 거죠?”
난 테이블로 한 걸을 더 다가가 그녀의 눈높이를 맞춘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슨…….”
“레드스톤, JP모건, 버크셔 헤서워이.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 있는 업체들이 닉스A의 주식을 사들인다면? 그게 주식이든 종이 쪼가리든, 아니면 데이터 패킷이든. 투자자들은 사게 돼 있습니다. 저는 주식이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투자자들이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 있을 때, 재빨리 말을 이어 나간다.
“자, 그러니 여러분에게 닉스A 주식을 상장 전에 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주식을 헐값에라도 팔겠다는 소립니까?”
“의결권만 없을 뿐. 하자 있는 물건도 아닌데 제값을 다 받고 팔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기가 찬다는 표정의 말론과 데이몬.
버핏만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만 특별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닉스A를 매수하신 양만큼, 닉스B 주식을 살 권리를 나눠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마음에 드시는지요?”
* * *
모두가 떠난 특별실.
난 파김치가 되어 소파에 늘어져 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거부들이 은연중 내뿜는 압박감 때문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늘어져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특별실 문이 빼꼼 열린다.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엘런이었다.
“대표님, 들어가도 될까요?”
“예, 들어오세요.”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들어오는 그녀.
내 맞은편에 앉더니 말은 못 꺼내고 입만 달싹거린다.
“결과가 궁금해서 왔습니까?”
“예? 아, 맞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셔서…….”
“좀 피곤해서요.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네요.”
그녀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친다.
“그거 알아요. 그분들과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몸이 위축되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요. 아무래도 일반인들과는 쌓인 경험치의 급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저랑은 멀쩡하게 말하는 거 보니, 저는 아직 일반인급인가 보군요. 열심히 경험치를 쌓아야겠어요.”
“아, 아니에요. 대표님은 첫 만남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좀 적응이 됐다고 할까요. 아무튼, 대표님도 대단해요. 1년 만에 닉스를 이만큼 성장시키셨잖아요.”
농담한 거 가지고 기를 쓰고 설명해대는 게 퍽 귀엽다. 이러니 놀리는 맛이 있지.
“아 참. 엘른, 저분들 어떻게 초대했습니까? 한 분도 모시기 힘들었을 텐데요. 레드스톤은 접점이 있었다 쳐도, JP모건 쪽과 워렌 버핏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하하, 그게…….”
그녀는 씁쓸한 기억을 꺼내는 듯한 표정이다.
“투자 은행 전부를 돌아서 간신히 한 건 따낸 거예요. 씨티그룹, 도이치방크, 모건스탠리, 골드막삭스 전부 뺀찌맞고 하나 건진 거죠.”
“거길 전부 갔었다고요?”
“예, 투자 은행이 전화상으로 설득할 정도로 만만한 곳은 아니잖아요. 직접 발로 뛰었죠.”
준비 기간이라곤 고작 열흘이었는데 대단한 행동력이다.
“그럼 버핏은요? 최종 보스나 다름없었을 텐데요.”
“아, 그건 게임 내기를 했어요.”
“게임요?”
“워렌 버핏은 콘트랙트 브리지라는 카드 게임 마니아거든요. 주로 웹상에서 게임을 하는데, 완전 초보자인 제가 1게임이라도 이기면 초대에 응하기로 했어요.”
“이겼나 보군요.”
엘런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다.
“아뇨, 완패였어요. 버핏은 아마추어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을 정도로 강자였거든요. 그래서 버핏을 직접 찾아가서 계속 게임 해달라고 떼썼죠. 아주 막무가내로요.”
이거 참. 어디까지 놀라야 할지.
여러모로 대단한 아가씨다.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가 와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아마도 닉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관심이 생겨서 방문했던 거겠죠.”
“그래도 엘런의 노력이 없었으면 버핏은 닉스가 무슨 회사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정말 큰일을 해줬어요.”
“고맙습니다.”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웃어 보이는 그녀.
억지로 표정 관리하는 게 빤히 보이지만 그래서 더 기특하게 느껴진다.
“저기…… 대표님.”
“예.”
“실례가 아니라면, 투자 건은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 참, 그녀는 처음부터 이게 궁금해서 왔었지.
“엘런은 이번 상장 책임자인데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세 곳 모두 닉스에 투자하기로 계약했습니다.”
“와! 세 곳 전부요?”
“버크셔 헤서웨이가 11%, 레드스톤이 7%, JP모건이 7%를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 혀로 녹여 버렸거든요. 뱀처럼 말이죠.”
내가 뱀처럼 날름거리는 제스쳐를 보여주자 엘런의 볼이 빵빵하게 부푼다.
그러다 결국은 웃음보가 터져서 박장대소를 해댔다.
“대표님, 죄송해요.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어서.”
“제 개그에 이렇게 웃어주는 경우는 저도 처음인지라. 고마우면서도 당황스럽네요.”
엘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책상으로 향한다. 그곳엔 방금 쓴 계약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제가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녀는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계약서를 훑어 나간다. 그러길 잠시,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이 멈춘다.
“저기…… 대표님?”
“뭐가 잘못 됐습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닉스A 매입가가 주당 21달러라고 돼 있는데…….”
난 그녀에게 다가가 계약서를 다시 쳐다본다.
“예, 그렇게 돼 있네요. ‘닉스A 주식을 주당 21달러에 매수하고 매수량만큼의 닉스B 주식을 동 가격에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깔끔한 계약서네요.”
“계약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나를 쳐다본다.
“닉스A의 발행 주식 수는 10억 주가 넘잖아요. 주당 21달러에 10억 주면…….”
“맞습니다. 닉스의 시가 총액은 210억 달러가 될 예정입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