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76화
우버가 닉스에 매각됐을 당시.
매각에 찬성했던 로이 존슨은 회사에 남게 되고, 매각에 반대했던 에릭 트레버와 그를 따르던 무리는 퇴사를 선택했다.
퇴사한 트레버와 직원들이 한 일은 당연히 우버와 같은 라이드 셰어링 업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에픽카는 기존의 우버 시스템을 그대로 차용했다.
법적인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지만, 우버를 운영한 경험이 있던 트레버는 개의치 않았다.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 특성상, 선점 효과만 유의미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대규모 투자를 따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투자를 받아서 세를 키우고, 또 투자를 받고 또 세를 키운다.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자잘한 법적 분쟁쯤을 뭉개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
이것들은 에픽카에 투자하고 싶다는 벤처 캐피털의 투자 의향서였다.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는 에릭 트레버는 서류 몇 장을 훑더니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다.
“엘런, 엘런? 어디 있어?”
트레버의 부름에 집무실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여성스러운 이목구비에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거기에 우월한 몸매까지.
모든 걸 다 가진 그녀의 외모는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을 보는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엘런 페이지.
에릭 트레버와는 하버드 수학과 동문으로 우버의 창업 멤버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머리로 트레버의 오른팔 자리를 차지한 여인이다.
“나 불렀어?”
“어, 잠깐 앉아봐. 투자사 선정 문제로 이야기 좀 하자고.”
“전에 이야기 끝난 거로 아는데.”
그녀의 말에 트레버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많은 서류 좀 봐. 모두 에픽카에 투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잖아.”
“에릭, 내가 말했잖아. 투자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지금도 운영하는 데 큰 문제는 없잖아?”
“아니, 그래도…… 지금 투자를 받으면 한 방에 세를 확장할 수 있잖아. 로이 자식을 바닥에 처박을 기회라고.”
“그러지 않아도 로이는 고전하고 있어. 네가 고안한 그 프로그램 때문에.”
그녀의 입에서 프로그램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트레버가 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켕기면 하질 말았어야지. 들키면 어쩌려고 밀어붙이는 거야?”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이야. 어쭙잖은 스타트업 신세로 사라지는 거보단 백배 낫잖아. 봐봐, 여기 쌓인 투자 의향서들을.”
트레버의 말에 엘런은 뭐라 반박을 하려다 입에서 삭혀 버린다.
그녀는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말했다.
“지금 들어온 투자 건은 전부 피라미야. 멘로 벤처나 골드만 삭스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일단 투자받아서 몸집을 불리고 나중에 들어오는 거도 받으면 그만이지.”
“성급하게 받은 투자는 VC측 평가에서 오히려 마이너스야. 자금을 방탕하게 쓰거나 운영 미숙으로 보일 여지가 있거든.”
그녀는 우버에 오기 전, 벤처 캐피털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 때문에 투자에 관한 건은 트레버가 항상 지고 들어갔다.
“칫, 자금을 잔뜩 땡겨서 다른 도시까지 영역을 확장하기만하면…….”
“에릭!”
“알겠어. 알겠다고. 대물이 걸릴 때까지만 잠시 숙이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렇지 엘런?”
“그리고 그 인페르노인가 뭔가 하는 프로그램, 안 썼으면 좋겠어. 우린 그거 없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인페르노는 트레버가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다.
본디 용도는 라이드 셰어링 서비스에 필요한 통계를 내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용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인페르노는 경쟁사 앱에 들어오는 패킷을 분석하고, 마음대로 변조해서 재전송하는 형식으로 변질됐다.
예를 들어 승객이 닉스 제로의 드라이버에게 콜을 넣으면, 인페르노가 패킷을 중간에 탈취해서 에픽카에 전송하는 형태였다.
보통의 드라이버들은 닉스 제로와 에픽카를 동시에 쓰고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승객을 태워서 운행했고 말이다.
“인페르노는 계속 쓸 거야. 아니, 써야만 해. 나를 내쫓은 로이 그 자식이 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에릭, 이건 범죄야.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범죄? 웃기지 마. 여긴 실리콘 밸리야. 성공만 하면 모두가 날 우러러보겠지. 스타트업의 신화, 기적의 천재 따위로 떠들어 대며 말이야. 그래, 사소한 흠결 따위는 아무도 신경 안 써. 오히려 팬보이들이 힘껏 변론까지 해줄걸?”
“하지만…….”
트레버는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챈다. 그러고는 억지로 자신의 무릎 위에 그녀를 앉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그녀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남자인 그를 힘으로 이길 순 없었다.
저항을 포기한 그녀가 트레버를 쏘아 본다.
“자꾸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이게 내가 일하는 방식이야. 상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한 후 요리하는 거지.”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오던 그의 손이 브래지어까지 타고 들어온다.
“에, 에릭!”
“가만있어.”
거기서 만족을 못 한 트래버는 그녀의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끌어안는다.
“앞으로 일 년 안에 승부가 날 거야. 그때쯤이면 로이는 날 내쫓은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지. 흐흐흐.”
그녀는 고개를 천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불완전해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그런 형광등이었다.
* * *
닉스 제로의 데드 콜이 경쟁사인 에픽카보다 많게는 5배나 많았다.
우린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닉스 제로의 호출 데이터를 면밀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후- 전부 다 정상이잖아.”
너무 오랫동안 모니터를 쳐다봐서인지 눈이 아려온다.
데이터 분석에만 매달린 게 벌써 사흘째.
호출 데이터에선 별다른 이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데드 콜을 발생시킨 사용자, 콜이 들어온 위치, 시간대, 빈도까지. 모든 정보를 뒤져봐도 유의미한 개입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트레버가 수작을 걸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저 그는 미래에 비슷한 일을 꾸민 인물이었기에 정황상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트레버가 꾸민 게 아닌 걸까?
이 와중에도 닉스 제로에 점유율은 경쟁사인 에픽카에 넘어가고 있었다.
닉스 제로가 프로모션을 2배나 더 퍼붓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프로모션을 더 늘릴까? 자금 여유는 충분하니 압도적인 자본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도 못 잡고 돈만 꼬라박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일단 데드 콜이 뜨는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려는 차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찾았어! 찾았다고!”
“스칼릿?”
그녀는 가져온 노트북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봐봐. 여기 이 파일. 이게 문제였어. 우리가 패킷을 보내면 중간에서 다른 녀석이 인터셉트해서…….”
노트북 화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 같은데, 전문가가 아닌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스칼릿도 그걸 알았는지 대뜸 펜을 꺼내 그림을 그려댄다.
“자, 이게 우리가 쓰는 닉스 제로 앱이야. 이건 사용자와 드라이버고. 사용자가 우리에게 앱으로 콜을 보내면 당연히 우리 데이터 센터로 와야 하잖아? 그런데 그 신호가 여기서 변조돼서 넘어오고 있었어.”
“쉽게 말해서 정보가 새고 있었다는 거네요.”
“그렇지. 역시 이해가 빠르네.”
“누가 이런 짓을 꾸몄는데요? 혹시 트레버의 에픽카?”
그녀는 손가락을 딱 튕긴다.
“빙고. 거기다 정보만 빼가는 게 아니라 닉스 제로 드라이버에게 허위 콜까지 넣었어.”
“그러니 승객을 태우러 갔을 땐 허탕이었겠군요. 반대로 에픽카에는 데드 콜이 적으니 드라이버들은 에픽카를 선호하게 됐고요.”
“맞아. 콜을 넣을 땐 우리에게 탈취한 승객 데이터를 썼을 테니, 아무리 데이터베이스를 점검해도 이상을 찾을 수 없었던 거지.”
닉스 제로에서 프로모션을 퍼부어도 점유율이 오르지 않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닉스 제로 앱의 모태는 우버였으니, 우버 앱을 같이 개발한 트레버라면 앱의 취약점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이 괘씸한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스칼릿의 표정을 보니, 어떤 식으로 갚아줘야 할지 벌써 정했나 보다.
“생각해둔 대응법이 있나 보죠?”
“지금까진 우리가 얻어맞았으니, 좀 두들겨 줘야 시원하지 않겠어?”
“좋습니다. 이번 사태의 대응은 스칼릿에게 일임하죠. 저도 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기대해. 트레버라는 자식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게 해줄 테니까.”
* * *
사무실로 뛰어들어온 트레버는 대뜸 소리부터 질러 댔다.
“볼튼,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는 또 뭐냐고!”
“예?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냐고? 지금 그렇게 한가한 말을 할 때야? 에픽카만 쓰는 드라이버들에겐 콜이 아예 끊겨 버렸어.”
“저, 정말입니까?”
서버 책임자인 볼튼은 황급히 서버 현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서버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감시반마저 정상적으로 콜이 들어왔으며, 드라이버들이 승객을 무사히 내렸다고 표시됐으니 말이다.
“서버에는 전혀 이상 없는데요? 콜도 정상적으로 들어오고 있구요.”
“이상 없다는 말이 몇 번짼 줄 알아? 저번에는 모든 승객의 요금이 무료 마일리지로 결제되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를 입었지?”
“그랬었죠.”
“그때도 이상 없다고 안 했어?”
“갑자기 버그가 생긴 탓이지 저희 서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잖습니까.”
책임을 미루는 담당자의 행동에 트레버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럼 그다음에 일어난 사고는? 얼마 전에는 일부 드라이버에게만 콜이 쏠리는 현상이 났잖아. 그건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서버 쪽에서 걸렀어야지.”
“대표님, 그것도 개발 쪽에서 버그 난 거 아닙니까. 저희에게 이러셔도 방법이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부 드라이버의 특혜 논란 때문에 간담회까지 열어야 했던 트레버에겐 모든 게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서버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거야? 문제가 생기면 여기서 거르라고 당신들 고용하는 거 아냐!”
“문제가 드러나야 거르죠.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티도 안 나는 걸 어떻게 체크합니까.”
“지금 나한테 큰소리치는 거야? 어?”
언쟁하는 소리가 커지자, 사무실에서 엘런이 튀어나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둘 다 진정해.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 상황을 먼저 정리해야지.”
“젠장, 요즘 들어 왜 이런 사건들이……. 어, 어? 이거…….”
눈을 가늘 게 뜬 트레버가 머리를 굴린다.
결제 시스템에 생긴 구멍. 승객 콜이 특정 드라이버로 쏠리는 현상. 마지막으로 콜이 서버에만 정상으로 작동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류까지.
“설마, 인페르노를 녀석들이?”
“인페르노?”
볼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볼튼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트레버가 좀 피곤해서 헛소리를 하나 보네. 서버 다시 한번 확인해줄래? 지금 현장에서는 콜이 안 가고 있으니 말이야.”
“어, 뭐 그럴게.”
엘런은 트레버를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에릭, 미쳤어? 다른 사람이 알아채면 어쩌려고 프로그램 이름을 말하는 거야?”
그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제 할 말만 쏟아내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알아차렸어. 인페르노를 알아차렸다고. 닉스 제로와 에픽카의 뿌리는 같은 우버니까 인페르노를 개조해서 그걸로 역공한 거라고! 망할, 로이. 이 개자식! 당장 인페르노로 녀석들 서버를 터뜨려 버릴 거야.”
엘런은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 하는 트레버를 붙잡는다.
“진정해. 지금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없잖아.”
“그럼 어쩌라고!”
“협상하자. 정전 협상. 우리도 공격할 수단이 있으면 상대도 협상을 받을 거야. 일단 급한 불은 꺼야지.”
트레버는 속이 끓어 올랐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진흙탕 싸움이 이어진다면 새로운 앱을 빨리 개발할 수 있는 상대 쪽이 유리할 게 뻔했으니까.
“젠장할. 차 준비시켜.”
* * *
“존슨, 에픽카 쪽 상황은 어때요?”
“대응이 없습니다. 콜을 아예 끊어 버렸으니, 지금쯤은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죠.”
“이상하네. 이 정도로 했으면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그 호랑이가 등장한다.
“로이, 너. 너. 너. 이 자식!”
갑자기 등장한 트레버가 다짜고짜 존슨의 멱살을 움켜쥔다.
“트레버, 꼴이 우습군. 나가서 우리 뒤통수를 치더니 이제 남은 수는 깽판이냐?”
“야! 로이 이 개새끼가!”
눈이 뒤집히려는 트레버를 내가 막아선다.
“존슨은 제 직원입니다. 용무가 있으면 제게 말씀하시죠.”
“넌 뭐야?”
“제가 닉스의 대표입니다.”
녀석이 인상을 팍 찌푸린다.
“일단 앉으시죠.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신 거 아닙니까?”
“칫.”
의자 하나를 끌어와 자리에 앉는 녀석.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앉는 꼴을 보자,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따라오신 여성분은 안 앉으셔도 됩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그녀.
트레버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야기 금방 끝날 거다.”
“흠, 좋습니다.”
내가 말해보라는 손짓을 하자.
“에픽카에 하고 있는 개짓거리. 당장 멈춰. 아니면 너희 시스템도 내가 부숴버릴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너희가 에픽카 앱에 악성코드를 심었잖아! 네가 모르면 루이 저 자식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루이 존슨 역시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 새끼들이 누굴 멍청이로 보나!”
역정을 내는 그의 말을 내가 끊었다.
“잠깐만요. 에픽카 측에서 말하고 싶은 건 저희가 악성코드를 심었다는 거죠?”
“그래.”
“그럼, 그 증거는 있습니까?”
“뭐? 증거?”
트레버의 얼굴이 불독처럼 일그러진다.
우버 앱을 공격하기 위한 인페르노는 본디 통계 저장 시스템이다.
실제로 악성코드를 입력하기 전의 인페르노는 착실하게 통계만 기록할 뿐. 그걸 증거라고 들이밀어도 혐의를 입증하긴 어려웠다.
말을 잇지 못하는 트레버 대신 내가 입을 연다.
“증거도 없으면서 이 난동을 피신 겁니까?”
“으으,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그래, 어디 누가 먼저 죽나 보자고. 엘런, 가자!”
회의실을 나서려는 내가 그를 불러 세운다.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왜? 이제야 협상할 생각이 드나? 겁이 나셨어?”
“그보다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요.”
“뭐?”
“계속 저희를 공격한다는 뉘앙스를 풍기시는데, 혹시 얼마 전 닉스 제로 시스템을 교란한 게 에픽카 측입니까?”
트레버는 갑자기 킥킥대며 웃음을 흘린다.
“그랬다면 어쩔 건데? 너희도 증거가 없는 건 매한가지잖아. 아니면 경쟁사니까 정황증거라도 들이밀 거냐?”
인페르노는 특정 코드를 입력하지 않으면 절대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녀석은 그걸 믿고 저렇게 뻐기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기다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희에게 증거가 있다면 어쩌실 건지.”
“증거?”
“증거는 물론이고 내부 고발자까지 있습니다.”
트레버는 증거라는 말에는 별 반응이 없다가, 내부 고발자 소리가 나오자 눈이 매서워진다.
“흥, 개소리를 더는 못 들어주겠군. 시간을 끌 수작이면 틀렸어. 오늘부터 닉스 제로는 문을 닫아야 할 테니까. 가자, 엘런. 어…… 엘런?”
트레버가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레버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눈빛이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달랐다. 그건 경멸과 증오가 담긴, 그런 시선이었다.
“엘런?”
당황하는 트레버를 무시한 그녀는 천천히 원형 테이블을 돌아, 내 뒤편에 선다.
그러고는 USB 하나를 건넨다.
“대표님,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페이지.”
이 모습을 본 트레버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엘런? 설마, 네가 내부 고발자야?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줘.”
“…….”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우리 사랑하는 사이잖아. 응?”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자 묵묵부답이던 그녀의 입이 열린다. 멸시에 가까운 조소와 함께 말이다.
“사랑? 헛소리 집어치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함께해서 역겨웠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