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73화
불과 5분 사이에 상황이 역전됐다.
턱을 치켜들고 뻣뻣하게 굴던 정용재는 눈치를 살핀다.
반대로 축객령을 받았던 박준오는 탁자에 놓인 커피를 여유 있게 음미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똥줄이 타고 있는 쪽에서 먼저 움직이게 돼 있으니까.
불편한 침묵을 버티기 힘들었는지, 정용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닉스의 박준오 이사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박준오는 대답하는 대신,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한 번 더 홀짝인다.
그러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잔을 내려왔다.
탁.
찰나의 정적을 참지 못한 정용재가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아까 말씀하셨던 디자인 특허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분란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협의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분란의 소지가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디자인의 한계가 명확한 모바일 기기의 특성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그 점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말이죠.”
속이 훤히 보이는 말에 박준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허허, 이거 참 이상한 일이군요. 디자인의 한계가 명확한데, 어찌 애플폰4 이전에는 비슷한 디자인의 휴대폰이 없었을까요? 그전까지 국내에 발매된 터치폰이 100종도 넘었을 텐데요.”
“그건 그러니까…….”
정용재가 뭔가 변론을 하려 했지만, 박준오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오성전자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이 나온 시기가 딱 애플폰4가 출시된 이후라는 거죠. 이거 참,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는 공교로운 일이군요.”
“디자인적 영감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카피는 아닙니다.”
“음? 제가 카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시기가 공교롭다고 한 것뿐이죠. 혹시 부회장님이 카피라고 생각 중이셨던 거 아닙니까?”
“그, 그럴 리가요.”
정용재는 속이 타는지 찬물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 오성은 이번 일로 잡음이 생기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건 저희 닉스 역시 마찬가집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끝냈으면 합니다.”
“후후, 그렇다면 이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 가방 하나를 꺼내 보인다. 테이블에 올리는데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이래 봬도 골드바가 가득 들어 있어서 제법 무겁습니다.”
“골드바? 금이 들었단 말입니까?”
“한 번 보시죠.”
가방을 개봉하자 그의 말대로 금빛이 너울거린다.
골드바는 빨간색 보관 케이스에 오와 열을 맞춰 늘어져 있었다.
“박준오 이사님께 개인적으로 드리는 물건입니다. 대략 20억은 될 겁니다.”
“20억이라…… 이걸 받으면 제가 뭘 해드려야 하죠?”
“간단히 서류에 사인 하나만 해주시면 됩니다. 오성이 닉스의 디자인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확인서죠. 서명과 동시에 똑같은 가방 한 개를 더 드리겠습니다.”
박준오는 가방에 가지런히 늘어져 있는 골드바를 꺼내, 한참이나 이리저리 돌려 본다.
묵직한 금빛이 그의 눈동자에 아른거린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정용재의 입가가 사선으로 기울어진다.
저명한 학자, 깨끗하다는 정치인, 공정성을 내건 언론인 등등.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골드바 앞에서는 꼬리를 흔들어 왔다.
이번 역시 그러리라 의심치 않았고 말이다.
“제가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골드바를 준비해 주는 곳은 오성이 처음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는 구경하던 금덩이를 넣고 가방을 닫아 버린다.
“스케일은 조금 실망입니다. 오성급이면 공이 하나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곳과 별반 차이가 없군요.”
“사인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돈이 총 40억입니다. 인생에 이런 기회가 오는 건 흔치 않습…….”
박준오는 그의 말을 다 기다리지도 않고 서류 가방을 다시 돌려놓는다.
“닉스가 애플에서 벌어들인 로열티가 얼만지 아십니까?”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다.
디자인 로열티에 대한 조사 자체를 안 한 걸 보니, 압박하지 않았다면 비용을 줄 생각조차 없었겠지.
박준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6개월간 2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한화로는 2300억 원이 넘는 돈이죠. 그것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고요.”
“마, 말도 안 돼.”
정용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작년에 만들어진 신생기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어지간한 대기업 계열사 하나보다 높다고 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리고 저는 닉스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돈다발을 안겨줘도 소용없다는 완곡한 거절 표현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정용재가 포기한 듯한 한숨을 토해낸다.
“후, 닉스가 원하는 건 뭡니까?”
“오성전자와 정식 로열티 계약입니다.”
“우리가 디자인을 직접 받은 것도 아닌데 로열티를 드리는 건 무리한 요구 같습니다.”
“오성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미련 없이 자리서 일어나는 박준오.
급해진 건 정용재였다.
이대로 계약이 파투나면 오성으로선 미국 수출이 막히게 된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잠깐.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법 아닙니까.”
“좋습니다. 일단 들어보죠.”
순간적으로 정용재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퉁겨진다.
“디자인 사용료로 10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디자인을 받아 쓴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후하게 쳐 드리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디자인을 받아 쓴 게 아니라 무단으로 썼으니, 괘씸해서라도 돈을 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크으…….”
속마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박준오는 벌써 수십 번은 갈기갈기 찢어져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정용재는 없던 인내심까지 끌어올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다.
“1000달러에 미국 판매 물량은 대당 0.2달러를 추가로 드리죠.”
“복잡하게 할 필요 없고, 저희는 2%만 받겠습니다.”
“예?”
되묻는 정용재에게 손가락 2개를 펴 보인다.
“닉스는 갤럭시스 시리즈 매출에 2%를 원합니다. 납품가가 아니라 출고가의 2%요.”
“자, 잠깐만요. 세상 어디를 가도 디자인 로열티를 2%나 주는 곳은 없습니다.”
“이 조건이 부당하다 싶으면 지금이라도 디자인을 수정해서 출고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내수로 물량을 돌리시던지요.”
“큭…….”
이를 꽉 문 정용재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진다.
이미 오성전자는 수출용 갤럭시스S를 수십만 대나 찍어 낸 뒤였다.
게다가 미국 수출용은 부품이 달랐기에 내수용으로 돌릴 방도도 없었고 말이다.
닉스는 오성을 현미경으로 보듯 조사해서 들어왔고, 오성은 닉스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이건 애초부터 결과가 나온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2%는 무리한 조건입니다. 1%는 어떻습니까?”
박준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에도 정용재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럼 1.3%, 1.3%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이미 로열티 계약이 맺어진 애플이 있기에,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로열티의 하향 조정은 불가하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단호한 답변에 정용재의 얼굴이 재색으로 변한다.
그런 그에게 승자의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해서 1000만 달러에 대당 0.2달러를 제시하더라고. 물론, 딱 잘라 거절하고 2%로 고정해 버렸지.
“오성도 꽤 급했나 보군요. 1000만 달러나 내걸다니.”
-급할 수밖에 없지, 공장에 찍어둔 갤럭시스S 재고가 70만 대야. 그건 모델이 달라서 내수로 돌리려면 부품부터 교체하고 리패키징 해야 하는데. 어후, 들어가는 비용만 수천억일걸.
“지금이 딱, 빼도 박도 못하는 타이밍이긴 하죠.”
-이 사악한 놈, 어쩐지 대응 안하고 기다린다 했더니만. 어찌 됐든, 출고가의 2%로 최종 협의가 끝났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우산을 집어 든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평일임에도 사람이 북적댄다.
플랫폼 밖으로 빠져 나가자 익숙한 모습의 구형 캐딜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예요! 보스, 여기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곰 같은 덩치의 사내.
닉스 소프트의 대표인 브라이언 브릭이었다.
그는 직접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브릭,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죠. 매번 화상통화로만 회의했으니까요.”
악수를 한 손에 묵직한 압박이 느껴진다. 생긴 것만 곰이 아니라 힘도 곰급이다.
“회사에는 별일 없죠?”
“별일 있죠. 보스가 닉스 소프트 1주년을 기념해서 온다고 하니 다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거, 너무 기대하면 안 되는데.”
내가 볼을 긁적이고 있자, 브릭이 직접 차 문을 열어준다.
“이미 늦었어요. 기대치가 성층권을 뚫은 뒤니까요. 자, 어서 타시죠.”
그의 캐딜락은 여전히 뒷좌석에 쓰레기가 뒹굴고 있었고, 내가 탈 조수석만 치워진 상태였다.
“왠지 쓰레기가 1년 전에 있던, 그대로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좀 한가해지면 차를 새로 살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여유라는 놈이 생길 틈이 없네요.”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레퍼토린데.
차에 오르자 단숨에 공항을 빠져 나간다.
브릭의 캐딜락은 낡았지만, 배기량이 높은 차라서 그런지 달리긴 잘만 달려댔다.
운전대를 잡은 브릭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보스, 이번에 닉스 챗 사용자가 4000만 명이 넘은 거 아시죠?”
“저번 회의 때 들었습니다.”
“이 기세대로만 이어지면 전 세계인이 닉스 챗을 쓰지 않을까요?”
그의 말대로 전 세계인이 단일 메신저를 사용한다면, 그 메신저의 파급력은 어느 정도일까?
사용빈도로만 따지면, PC의 윈도즈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 닉스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능가하게 되는 건가? 아니, 그러기엔 너무 이르다.
현재 닉스 챗이 먹은 파이는 애플폰을 쓰는 사람에 한해서이고, 전 세계에서 애플폰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5%가 채 안 됐으니까.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올해는 본격적으로 후발주자들이 우릴 추격하려들 테니까요.”
“흐흐,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고 해요. 그래야 개발하는 맛이 나죠.”
브릭은 연이은 닉스 챗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만든 앱을 벌써 4000만 명이나 쓰고 있었으니 자신감이 안 생기면 이상한 거겠지.
“아 참, 안드로이드OS용 닉스 챗 개발은 끝났습니까?”
“흐흐흐.”
그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웃음만 흘려댄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대시보드를 열어보세요.”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일단 그의 말대로 대시보드를 열어본다.
안에는 총 4대의 스마트폰이 들어있었다.
블랙베리 볼드, 모토로이, 옴레아2, 노키아X5800.
마치, 휴대폰 박물관 같은 모습이었다.
“종류별로 모아놨네요. 그런데 이게 왜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브릭은 품에서 또 하나의 휴대폰을 꺼내 든다. 역시 실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애플폰4였다.
그는 운전 중임에도 능숙하게 닉스 챗을 실행시킨다.
“뭐 하는 거예요. 설마, 모든 모바일OS에서 닉스 챗이 쨘 하고 구동되는 걸 보여 주려는건…….”
그때, 진동 소리가 부르르 들려온다.
진동은 대시보드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에서 나는 것이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여기 모인 기기만 해도 블랙베리, 안드로이드, 윈도 모바일, 심비안이다.
이 모든 기기에서 닉스 챗이 돌아간다니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가슴이 계속 방망이질 친다.
한 손으론 옴레아2를 다른 한 손으론 모토로이를 집어 든다. 각각 안드로이드OS와 윈도 모바일이 설치된 기기다.
마른 침을 한 번 넘기곤 스마트폰을 켜 보는 순간, 팔뚝에 닭살이 쫙 일어난다.
[닉스 챗은 전 세계 스마트폰에 설치될 준비가 끝났습니다.]
놀란 눈으로 운전석을 바라본다.
그러자 브릭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두들겨 댄다.
“닉스 챗 1주년 기념 에디션입니다. 어때요, 보스. 마음에 드세요?”
내가 그에게 해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호우!”